지난 글/review 33

기분의 유량통제시스템

우리들의 진화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이근화 (문학과지성사, 2009년) 상세보기 세상에는 자전거를 못 타는 기분도 있다 송곳니가 반짝이는 이상한 기분은 송곳니로 찌르는 이상한 기분으로 위로할 수 있지 -「송곳니」 2연 우리의 사회화된 감정은 대개 무엇에 울고 웃고 화내야 할지 상당 부분 교육된 결과다. 공생활 내에서 우리는 대충 어디서 어디까지가 우울이며 불안이며 공포며 명랑인지 비교적 선명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그 안에서 울고 웃고 떨고 소리 지른다. 는 이 스펙트럼의 선명성 안에서 이해하기 힘들다. 수렴할 수 없는 미묘한 뉘앙스, 차이들에 시인은 사로잡힌다. 이름이 없으나 실재하는 ‘이상한 기분들’, 기분은 감정의 조짐처럼 다가온다. 12음계나 색상표를 들이대어보아도 이 이상한 기분에 딱 맞는 ..

지난 글/review 2009.11.03

삶=똥, 몰수당한 청춘의 알리바이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박후기 (창비, 2009년) 상세보기 박후기는 삶이 일종의 ‘덤’이나 짐이라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배설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이 생산의 지점과 동일한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그 징후일 것이다. 「채송화」에서 “무너진 집안의 막내인 나는/가난한 어머니가/소파수술비만 구했어도/이 세상에 없는 아이/.../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엄마는 아무 때나/울타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오줌을 누었다/죽은 동생들이/노란 오줌과 함께/쏟아져나왔다”라고 쓸 때 태어나지 않을 뻔 한 시적 화자의 느낌은 ‘죽은 동생들’과의 동일시 직전까지 가고, 「꽃 진 자리」에서는 “사과에겐/꽃 진 자리가 똥구멍이다/꽃 진 자리에 유난히/주..

지난 글/review 2009.11.03

고영, 오은 서평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고영 (문학세계사, 2009년) 상세보기 타자(他者)이며 타자(打者)인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중년 남자의 비애란, 그의 삶이 가족과 사회에 바쳐지고, 그 헌신을 위해 자기 자신의 사감(私感)들을 오롯이 감당하고, 평생의 노동이 그를 외면한 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리라는 (확실한) 예감과 떨어뜨려 생각하기 힘들다. (「은자(隱者)」에서 그가 쓰고 있듯, 죽어서 비로소 은닉될 수 있었던 익명적 주체에게, 죽음과 대응항인 삶은 “자해의 흔적인지, 타살의 단서인지 도저히 밝힐 수가 없는” 노동의 흔적으로 치환된다.) 사랑이 많은 남자에게 이 비애는 유독 깊다. 사랑은 모든 국지적인 문제를 전면적인 번민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지난 글/review 2009.11.03

유명한 영희에게서 투명한 앨리스에게로

앨리스네 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황성희 (민음사, 2008년) 상세보기 세계는 완벽하다. 당위성이 빠지면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해진다. 혹은 공유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당위를 수긍하고 난 뒤의 세계는 나름대로 완벽하다. 그런데 완벽이란 게 대체 뭐지? 그건 그냥 그대로 있음, 자연(自然) 아닌가? 유대인들의 신 ‘야훼’의 본래 뜻처럼, ‘스스로 그러한’ 것, 무수한 ‘-임’, Be 동사의 모든 주어들. ‘더 높은 곳’이 없는 이곳에서, 신성은 하향 평준화되고 만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어찌됐든 완벽하다.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는 실용주의의 명제가 세계화되는 자리, 과거의 모든 사건이 정당화되는 자리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던 80년대 소..

지난 글/review 2009.11.03

공기와 총

와락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정끝별 (창비, 2008년) 상세보기 적들을 위한 서정시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허혜정 (문학세계사, 2008년) 상세보기 사라지지 않는 비행운 정끝별 신작 시집의 시들은 소리의 감각에 골몰한 농밀한 결과물들을 다수 품고 있다. 의미 중심의 산문 지향의 시들이 후반부에 여러 편 실려 있기도 하지만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말 자체의 리듬을 잘 살린 정통적 시형의 시들이다. 그런 시들은 바람을 품고 있는 홀씨처럼 행위의 계기들을 품고 있다. 그것은 어떤 가능성의 실체를 품고 있다고 서술되기보다는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인 가벼움의 동작성을 품고 있다고 서술되어야 마땅하리라. 해설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 점은 표제작인 「와락」의 제목이자 시의 운을 이끌어가고 있는 ‘-..

지난 글/review 2009.05.22

절개면 앞에 선 나쁜 소년의 법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허연 (민음사, 2008년) 상세보기 ‘지옥에서 빗소리를 듣던’(「지옥에서 듣는 빗소리」, 불온한 검은 피) 한 남자가 “왠지 모르게 우리는 텔레비전처럼/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청량리 황혼」, 불온한 검은 피)는 마지막 전언을 남기고 사라진 지 13년, 홀연히 귀환한다. 두 권의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얼굴 사진은 애인과 정사(情死)한 다자이 오사무처럼 불길하고, 불길한 얼굴이 으레 그렇듯 나이를 종잡을 수 없고, 좌우가 바뀌어 있다. 그는 방황하는 여름 같았던 청춘을 지나 회사원이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 직장에 가는 일을 부끄러워했지만 목숨이 달려 있었으므로, 병원에 가고 출근을 했다. “왜 가난은 항상 천재이며..

지난 글/review 2009.05.22

'생명-폭력'과 그 숙주들

껌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기택 (창비, 2009년) 상세보기 김기택(金基澤)의 시선은 이번 시집 『껌』(창비 2009)에서 더욱 집요해졌다. 그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독자로서는, 그가 눈 돌리지 않는 이상, 먼저 눈 돌릴 수 없다. 그의 시각적 집요함이 나의 시선을 끌고 들어갈 때, 평범하던 풍경이 별안간 투명한 살갗 안의 핏줄과 근육과 뼈로 화해 거꾸로 나를 응시하는 것을 느낀다. 대상은 평소의 모습을 벗고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대상이 지나치게 가까이 와 있다는 증거이리라. 이 만남은 일종의 폭력적 상황을 통해서만 성사된다. 실재는, 그 있음을 은폐할 때에만 우리에게 평온하고 상식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므로. 그로부터 불편한 진실들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진실들은 쉽사리 지..

지난 글/review 2009.05.22

키스는 왜 두 번 반복되어야 하는가

키스 지은이 강정 상세보기 첫 번째 키스-인류학의 탐침 위에 그려진 크로키 이 시집에는 두 편의 「키스」가 있다. 그리고 「키스」와 「키스」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다. 앞장과 뒷장 사이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키스는 잠시 쉬었다 계속된다. 우리는 ‘나’와 ‘너’가 어떻게 키스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키스 이전에 얼마나 많은 말이 필요했는지도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키스는 혀로 할 수 있는 말 아닌 말의 첫 번째 형태다. 물론 그것은 말보다 수고스럽다. 그러나 그 수고는 기꺼운 수고다. 키스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와 ‘그러고도 우리는 말할 수 있어요’라는 쌍방의 암묵적 합의가 이끌어낸 가장 가까운 상대와의 텔레파시의 시작이다. 그것은 착각과 오해로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위험천만하다. ..

지난 글/review 2009.04.28

처자를 거느린 디오게네스

화창 카테고리 시/에세이/기행 지은이 김영승 (세계사, 2008년) 상세보기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으로부터 7년 만이다. 7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독자인 우리로서는 시집을 통해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시 쓰는 것 말고는 별달리 하는 일이 없는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전업 시인 김영승은 지난 시집에서 “나만이 나의 노예”(「G7」)라는 ‘정신의 위대’와 “하긴/전당포에 외투를 맡긴/마르크스의 아내가 무슨 놈의 품위”(「가엾은 아내」)라던 ‘극빈의 위력’ 사이를 “매달려/늙어가는 호박은, 끌려가지는 않는다”(「매달려, 늙어간다」)는 긴장과 자긍심으로 생존해냈다. ‘생존해냈다’.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사회적 삶은 안전한 은신처가 아니라 온갖 위험의 원천이다. 그렇게 되면 태연자약은 생존의 비밀..

지난 글/review 2008.10.25

풍자와 해탈 사이

차창룡, "고시원은 괜찮아요"(창비, 2008) 차창룡의 신작 시집 "고시원은 괜찮아요"는 풍자와 해탈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라는 앞선 시인의 통찰은, 지금의 말로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정치적이거나 냉소적이거나’쯤 되지 않을까. ‘시’와 ‘풍자’라는 말이 일깨우는 예리한 힘은 뚜렷한 몇 가지의 선택지만을 우리에게 제시했던 가시적 폭압의 시절에 아주 잘 어울렸지만, ‘생정치적으로다가’ 우리 삶의 안과 밖을 한 땀 한 땀 오바로크하고 있는 지금-여기에서도 잘만 사용하면 훨씬 더 잘 어울릴 성싶다. 균열이란 균열은 죄다 시침질하고 마는 민활한 문화적 자본주의 세계의 은밀하고 화려한 색색의 실밥들이, 실은 누군가의 피와 땀이며 우리가 봉사세 명목으로 우리도 모르게 자진납세..

지난 글/review 2008.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