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글/작품론

(4)
왕의 박력을 가진 시인이 있었다면 * 조 메노스키 지음, 정윤희, 정다솜, Stella Cho 외 옮김, 『킹 세종 더 그레이트』, 핏북, 2020 처음 이 책이 흥미를 끌었던 것은 작가가 “스타트랙” 시리즈의 집필자 중 한 명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한동안 이공계 연구자들이 주인공인 시트콤 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스타트랙”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철없이 학교에서 나이 먹어가는 의 주인공들이 홀딱 반해 있는 “스타트랙”에 대한 경외감과 ‘덕질’할 때의 감정에 이입한 상태에서 이 책의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말하고 한글 쓰는 자연인의 입장과 에 대한 팬의 애정이 혼합되어 대뜸 이 책을 사고 말았다고나 할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스타트랙”처럼 미국적인(마치 각국의 이민자들이 연방을 이루듯이 다종다양한 행성의 사람들이 ‘연합..
밥숟가락과 봉분 사이-발바닥들의 운명 물든 생각 이사라 수천 년 물들여진 염색공장 가는 길은 좁고 구부러진 골목들로 이어집니다 이런 골목들은 미로를 낳고 미로는 언제나 생각을 낳습니다 오랜 가난이 묻어나는 그 길 가는 길에 어린 일꾼들이 할당된 오랜 슬픔을 염색하고 있습니다 슬픔의 장치는 염색물이 고인 벌집 구덩이들처럼 꿈틀댑니다 피부를 뚫고 가슴 속에 자라나는 벌집 같은 기억들도 염색되는지 창공에 널리는 것들 모두 골목의 그늘을 비의(悲意)처럼 드리우고 미로를 지나갑니다 여인의 손아귀 속에 손목 잡힌 저 아이도 미로 속 골목의 아이로 자라서 금새 한 몫을 하는 일꾼으로 염색될 것입니다 색색으로 물든 빛깔을 햇살에 너는 것을 보면서 염색공장 가는 길에 나는 자주 자주 멈추어 서서 길마저 염색되는 지표(地表)에 관한 생각들을 건져 올립니다 이..
교련 시간-이영주 교련 시간 이영주 네가 학교 옥상에서 미끄러지는 순간을 뭐라 불러야 할까 붕대를 둘둘 말고 교련 시간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구하는 법을 배운다 『이방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너는 딱 한 페이지만 읽었다 창가 맨 뒤에 앉아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의 귀퉁이를 칼날로 도려냈다 쌍둥이의 청바지는 언제나 고급스럽군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동생의 허리춤에 손을 넣고 웃었다 태양 때문에 누굴 죽이지는 않겠어 코를 킁킁거리던 쌍둥이는 한 군데서 달라진 자신들의 얼굴을 마주보고 침을 뱉었다 붕대를 감는 시간보다 푸는 시간이 더 빨랐던 너, 책상 밑으로 기어가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던 너는 『이방인』의 살인 이후 장면은 궁금하지 않았다 붉은 물을 들이마시며 담장의 나무들이 똑같은 표정으로 창문을 긁었다 시범을 보이려 ..
폐허의 섬 파르티타-이승원 폐허의 섬 파르티타 이승원 건물의 사체가 먼지를 머금고 아직 직립해 있을 때 썩지 않는 생선 꼬리를 맡으며 나는 누구의 이름을 생각해냈던가 인공물이 자연에 근접하며 낡아간다 지워지고 흔들리며 지붕은 속살이 드러나 그곳에선 빤히 혼자라는 게 허기처럼 떠오르고 태양계를 벗어나는 탐사선처럼 깊은 수심 속으로 내려가는 죽음을 상상한다 살마다 녹슨 새장은 스스로를 속박한다 들떠 일어난 천장의 페인트가 나방처럼 날개를 젓고 버려진 스패너들 검어진다 네 얼굴처럼 묽게 칠한 그의 아랫도리가 가리고 있는 두 개의 흐린 눈은 언제를 기억해내려 했던가 해가 흘린 피를 유리창이 반사한다 광택을 잃은 구층 아파트의 허물어지는 베란다 느리게 몸을 열고 거품을 무는 바다에서 새가 제 흰색을 공중에 그린다 짙은 물이 고인 거대한 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