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하이데거와 첼란을 둘러싼 몇 개의 장면들을 하나의 유비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내가 이 일화들에 흥미를 느낀 것은 제도적 절차를 통해 ‘시인’이나 ‘평론가’가 되기 전이었다. 그때 나는 하이데거와 첼란을, 시를 사랑하는 사람과 시를 쓰는 사람,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과 아름다운 사람, 이를테면 나보코프의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 혹은 토마스 만의 구스타프 아셴바흐와 폴란드 소년의 관계와 같이 생각했다. 롤리타는, 폴란드 소년은, 험버트와 아셴바흐를 얼마나 절망에 빠뜨렸나! 하이데거는 횔덜린과 릴케와 첼란을 읽을 때마다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 단지 시를 사랑할 뿐이라는 확인에 얼마나 비참했나! 얼마나 시인이 되고 싶었나! 시가 ‘명명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철학사 전체를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