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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ard

유토피아에서 아나키로


 기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시인에게 시 쓰기 자체가 실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개성이 다양한 만큼 실천의 모습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 이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를 여러 평론가와 시인의 시각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기획의도에 대한 나의 해석이 이 글의 성격을 규정지을 것이었다. 1. ‘실천’은 무슨 뜻인가? 2. 1.의 의미와 관련하여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2의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성립 가능한 구문이라면, 그것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은 가능한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라는 의문은 타당한가? 4. 이 청탁서는 평론가인 나에게 보내어진 것인가, 시인인 나에게 보내어진 것인가, 혹은 그도 아니라면 시민이나 자연인으로서 발언하는 것도 무방한가? 이 구분은 유의미한가?
 

이 혼란을 흔들어 재정렬해보자. 나는 즉각적으로 이 기획의 의도가 최근의 담론과 관련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시와 실천’은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혹은 예술과 정치의 다른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나는 기획 의도에 적혀 있는 “시인에게 시 쓰기 자체가 실천”이라는 말을 다시 들여다본다. 기획자의 관점을 중립적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문구는 ‘실천’이라는 말 앞에 반드시 ‘정치적’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론theoria에 반대되는 실천praxis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시 쓰기라는 예술적 생산(창조)행위가 비평이나 철학의 이론적 관조행위와 어떻게 같고 다른가, 혹은 무슨 관계에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 될 것이다. 이때 이 기획은 ‘시와 실천’이 아니라, 철학이나 비평 등의 이론 일반과 대조되는 ‘시의 실천적 성격’, 혹은 ‘시라는 실천의 철학적 사변과의 차이성과 특이점 또는 그 관계’에 관한 것이 될 것이었다.

아니, 나는 지금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 하고 있다. 이 기획은 명백하게, ‘‘시가 여하한 의미의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그리하여 광의의 정치적 실천의 한 양태라면, 그것의 현재 양상이 어떠한 것인지’ 사유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이 못 말리는 사유의 강제 때문에, 편집자보다도, 최근의 논쟁보다도, 나의 외부 세계 전체가 나의 정신과 영혼을 향하여 퍼부어대는 질문 때문에, 나는 이 청탁에 응하기로 한 것이다.


선호되는 알리바이


논란의 여지를 일으키지 않는 안전한 모범 답안의 요지는 이런 것이 될 것이었다. (나는 이 안전한 답안 주변을 서술할 주변 자료들을 탐색하는 중이었지만,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다음 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시작할 요량이었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분명 시는 모든 종류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천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정치적 실천의 장에서 의식적으로 사고되고 그러한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쓰여져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 미적 측면은 사유가 기획하는 바의 명백성을 언제나 벗어난다. 시는 (적어도 최소한의 객관성을 가정하거나 중용에 입각해서 시를 ‘논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이고도 미학적이며, 어느 한 부분도 간과될 수 없다. 이 두 측면은 사실 논하는 자의 관점―따라서 그의 욕망에 어떻게 투영되는가―에 대해서만 유의미하다. 김수영의 「풀」이 민중시로 해석되기도 하고 존재론적인 시로 해석되기도 하는 것처럼. 이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시의 속살이 일으키는 감흥이야말로 시의 특권이지 않겠는가—이것은 황희 정승 식의 대답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할 자의 지적도 물론 옳다. 모든 것은 좋다. (이 얼마나 실용적이란 말인가!) 특히나, 우리가 예의바른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이, 이 차이들과 그 가능한 판본들의 다양성을 감싸 안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결국 통합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시의 실천’에 대한 입장은 대개 두 가지다. 다음과 같이;

 “오, 당신은 시의 정치성을 옹호하시는군요. 시가 세계를 변혁하거나, 적어도 최소한, 시인의 정치적 개입이 적극적으로 개진된다면 더 나은 세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아니, 설사 시가 세계를 변혁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시가 약자의 편에 서서 더 나은 유토피아의 기획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박애와 평화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상주의적이어야 할 테니까, 그 편이 논리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옹호되어야 마땅할 테지요. 물론 시에는 언제나 정치적인 국면이 포함되어 있을 테지요. 하지만...당신은 혹시 당신 자신으로서 느끼고 사고하기를 간혹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의 고유함과 개별성--따라서,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무의식과 이것이 지탱하고 있을 당신의 자율성이 어느 정도 희생당할 위험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모자란 미적 재능을 윤리적 교의로 충당하려 한다는 생각이 가끔 들지 않습니까?”


혹은,


“오, 당신은 시의 미학적 자율성을 옹호하시는군요. 시가 이데올로기나 관습에 종속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도구가 되어버릴 테고,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이데올로기나 천박한 세계의 충실한 대변인으로 대번에 전락할 테니까요. 심지어 문학의 죽음 이전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이미 선언된 바 있지 않습니까. 물론 시의 미적 완성도나 모험적인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의 신비는 애매함과 모호함, 가장 순간적이면서 영원한 번뜩이는 시적 찰나를 포착하고 그것을 타인들에게도 보여주는 천재성에 근거한다고들 하니까요. 하지만...당신은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이전 시대의 유물인 ‘천재’라는 개념에 심하게 자신을 동일시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져 당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무의식의 총체가 사실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의 예술 창작은 허무한 유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끔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술자리나 프랜차이즈 카페의 흡연실에서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싶기도 하지만(사실 그것도 별로 가능하지 않은데, 그것은 우리가 이런 입장들을 내보일 수 있을 만큼 우리 자신이 명확한지 그렇지 않은지 판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생일날 시집을 선물로 주고받던 아스라한 추억이 이미 지나간 시절에 속하는, 문학이 사소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보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이런 이야기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 나온 사람들의 흥을 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지?), 대개 이런 이야기들의 심화된 형태들은 평론가들의 지면을 통해 지적으로 유통될 뿐이다. ‘하지만...’ 이후의 심도 깊은 논의들과 합의에 도달하기에는, 조금 피곤하고, 앞서 인용한 김수영의 뚝심 있고 신비로운 모순의 조화 상태에 대한 언명이야말로 이 피곤한 갈등을 간략하게 (물론 그 자신에게 간략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와 산문 곳곳에 표명되어 있는 피로와 분노를 떠올려 보라.) 봉합해주는 것이다. “시인은 선천적으로 혁명가”라는 그의 말은 시인들의 그 모든 이질적인 작업들에 얼마나 명쾌하게 무한한 자부심을 부여해주는가. 그가 이미 대신 고민하고 제출한 결과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추체험되고 당분간 우리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 존재론적이고도 (법이 아니라) 정의에 입각한 실천적 진실/진리truth를 무의식적으로 꾀하면서 결과적으로 도출되는 그 효과로서의 정치적 균열이, 지각상으로는 모호하지만 감각적으로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문학, 혹은 예술 일반)의 예외적인 특이성이며 이것은 어느 정도 진실이라는 증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