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시인에게 시 쓰기 자체가 실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개성이 다양한 만큼 실천의 모습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 이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를 여러 평론가와 시인의 시각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기획의도에 대한 나의 해석이 이 글의 성격을 규정지을 것이었다. 1. ‘실천’은 무슨 뜻인가? 2. 1.의 의미와 관련하여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2의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성립 가능한 구문이라면, 그것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은 가능한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라는 의문은 타당한가? 4. 이 청탁서는 평론가인 나에게 보내어진 것인가, 시인인 나에게 보내어진 것인가, 혹은 그도 아니라면 시민이나 자연인으로서 발언하는 것도 무방한가? 이 구분은 유의미한가?
이 혼란을 흔들어 재정렬해보자. 나는 즉각적으로 이 기획의 의도가 최근의 담론과 관련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시와 실천’은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혹은 예술과 정치의 다른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나는 기획 의도에 적혀 있는 “시인에게 시 쓰기 자체가 실천”이라는 말을 다시 들여다본다. 기획자의 관점을 중립적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문구는 ‘실천’이라는 말 앞에 반드시 ‘정치적’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론theoria에 반대되는 실천praxis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시 쓰기라는 예술적 생산(창조)행위가 비평이나 철학의 이론적 관조행위와 어떻게 같고 다른가, 혹은 무슨 관계에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 될 것이다. 이때 이 기획은 ‘시와 실천’이 아니라, 철학이나 비평 등의 이론 일반과 대조되는 ‘시의 실천적 성격’, 혹은 ‘시라는 실천의 철학적 사변과의 차이성과 특이점 또는 그 관계’에 관한 것이 될 것이었다.
아니, 나는 지금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 하고 있다. 이 기획은 명백하게, ‘‘시가 여하한 의미의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그리하여 광의의 정치적 실천의 한 양태라면, 그것의 현재 양상이 어떠한 것인지’ 사유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이 못 말리는 사유의 강제 때문에, 편집자보다도, 최근의 논쟁보다도, 나의 외부 세계 전체가 나의 정신과 영혼을 향하여 퍼부어대는 질문 때문에, 나는 이 청탁에 응하기로 한 것이다.
선호되는 알리바이
논란의 여지를 일으키지 않는 안전한 모범 답안의 요지는 이런 것이 될 것이었다. (나는 이 안전한 답안 주변을 서술할 주변 자료들을 탐색하는 중이었지만,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다음 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시작할 요량이었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분명 시는 모든 종류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천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정치적 실천의 장에서 의식적으로 사고되고 그러한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쓰여져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 미적 측면은 사유가 기획하는 바의 명백성을 언제나 벗어난다. 시는 (적어도 최소한의 객관성을 가정하거나 중용에 입각해서 시를 ‘논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이고도 미학적이며, 어느 한 부분도 간과될 수 없다. 이 두 측면은 사실 논하는 자의 관점―따라서 그의 욕망에 어떻게 투영되는가―에 대해서만 유의미하다. 김수영의 「풀」이 민중시로 해석되기도 하고 존재론적인 시로 해석되기도 하는 것처럼. 이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시의 속살이 일으키는 감흥이야말로 시의 특권이지 않겠는가—이것은 황희 정승 식의 대답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할 자의 지적도 물론 옳다. 모든 것은 좋다. (이 얼마나 실용적이란 말인가!) 특히나, 우리가 예의바른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이, 이 차이들과 그 가능한 판본들의 다양성을 감싸 안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결국 통합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시의 실천’에 대한 입장은 대개 두 가지다. 다음과 같이;
“오, 당신은 시의 정치성을 옹호하시는군요. 시가 세계를 변혁하거나, 적어도 최소한, 시인의 정치적 개입이 적극적으로 개진된다면 더 나은 세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아니, 설사 시가 세계를 변혁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시가 약자의 편에 서서 더 나은 유토피아의 기획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박애와 평화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상주의적이어야 할 테니까, 그 편이 논리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옹호되어야 마땅할 테지요. 물론 시에는 언제나 정치적인 국면이 포함되어 있을 테지요. 하지만...당신은 혹시 당신 자신으로서 느끼고 사고하기를 간혹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의 고유함과 개별성--따라서,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무의식과 이것이 지탱하고 있을 당신의 자율성이 어느 정도 희생당할 위험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모자란 미적 재능을 윤리적 교의로 충당하려 한다는 생각이 가끔 들지 않습니까?”
혹은,
“오, 당신은 시의 미학적 자율성을 옹호하시는군요. 시가 이데올로기나 관습에 종속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도구가 되어버릴 테고,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이데올로기나 천박한 세계의 충실한 대변인으로 대번에 전락할 테니까요. 심지어 문학의 죽음 이전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이미 선언된 바 있지 않습니까. 물론 시의 미적 완성도나 모험적인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의 신비는 애매함과 모호함, 가장 순간적이면서 영원한 번뜩이는 시적 찰나를 포착하고 그것을 타인들에게도 보여주는 천재성에 근거한다고들 하니까요. 하지만...당신은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이전 시대의 유물인 ‘천재’라는 개념에 심하게 자신을 동일시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져 당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무의식의 총체가 사실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의 예술 창작은 허무한 유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끔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술자리나 프랜차이즈 카페의 흡연실에서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싶기도 하지만(사실 그것도 별로 가능하지 않은데, 그것은 우리가 이런 입장들을 내보일 수 있을 만큼 우리 자신이 명확한지 그렇지 않은지 판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생일날 시집을 선물로 주고받던 아스라한 추억이 이미 지나간 시절에 속하는, 문학이 사소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보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이런 이야기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 나온 사람들의 흥을 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지?), 대개 이런 이야기들의 심화된 형태들은 평론가들의 지면을 통해 지적으로 유통될 뿐이다. ‘하지만...’ 이후의 심도 깊은 논의들과 합의에 도달하기에는, 조금 피곤하고, 앞서 인용한 김수영의 뚝심 있고 신비로운 모순의 조화 상태에 대한 언명이야말로 이 피곤한 갈등을 간략하게 (물론 그 자신에게 간략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와 산문 곳곳에 표명되어 있는 피로와 분노를 떠올려 보라.) 봉합해주는 것이다. “시인은 선천적으로 혁명가”라는 그의 말은 시인들의 그 모든 이질적인 작업들에 얼마나 명쾌하게 무한한 자부심을 부여해주는가. 그가 이미 대신 고민하고 제출한 결과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추체험되고 당분간 우리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 존재론적이고도 (법이 아니라) 정의에 입각한 실천적 진실/진리truth를 무의식적으로 꾀하면서 결과적으로 도출되는 그 효과로서의 정치적 균열이, 지각상으로는 모호하지만 감각적으로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문학, 혹은 예술 일반)의 예외적인 특이성이며 이것은 어느 정도 진실이라는 증언이.
시인은 시민인가
하지만 이 같은 논변을 되풀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며 이 이중성은 시의 신비로운 통합성에 근거한다’는 결론의 변종들은, 애초에 이 논의의 촉발에 주어진 어휘들의 결합방식--미학‘과’ 정치, 시‘와’ 실천--에 고착되어 있으면서도 이 고착의 피로로부터 벗어나 양심을 안심시켜주는 안전한 봉합에의 욕망에 투항한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을 지속하거나 심화하는 논변들이 오히려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주제를 둘러싼 기획이 거듭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우리는 최근 수년간 벌어진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과 이 사건들의 연쇄반응이 불러온 외설적인 폭로로서의 한 죽음이 그 촉매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이 폭로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사람들은 겨우 ‘으으’ 하는 신음소리에 가까운 외침을 공포와 전율 속에서 따로 또 같이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이 폭로의 상징적인 의미를 우리는 아직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데, 그것은 우리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 견해를 표명하는 순간 불러일으켜질 공모의식과 그것의 부채 탕감에 우리 자신이 깊숙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 대신 발언해줄 다른 이의 입술을 기다려왔다. 우리는 그들의 이러저러한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우뚱하며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지면에 제출되지 않는, 제출되지 않기로 된 입장들은 대체 얼마나 위험한 것들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는가? 시인과 평론가들에게 입장을 체출하라는 자타의 요구, 그 사상 검증의 요구에 포함되어 있는 어휘들—이를테면 ‘시’와 ‘실천’ 사이에 ‘-와’를 삽입하여 두 개념을 묶을 때 떠오르는 ‘문학의 진정성’, ‘진보의 가능성’, ‘문학과 사회’, ‘반영이냐 모사냐’, ‘시의 정치성’, ‘정치의 미학화냐 미학의 정치화냐’ 등—은 아직도 유효한가? 그 어휘들과 아직 제출되지 않은 잠재적인 선언들은 과연 얼마만큼 교집합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이러한 어휘들이 주된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근과거를 기억한다. 최근의 ‘미학적인 것-정치적인 것’ 논쟁은 그 근과거의 논쟁적 어휘들이 급격히 민망해져버린 사회적 상황에서 벌어진 외설적인 폭로가 불러온 공황 상태와 연루되어 있다. 산발적으로 지적하거나 언급해왔지만,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일반론적인 의미에서의 ‘시와 정치의 관계, 혹은 미학성과 정치성이 어떻게 통합 가능한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왜 하필 최근에 와서 이 해묵은 논쟁이 요청되었는가 하는 질문의 요건, 그리고 차라리 질문을 바꾸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근의 논변들이 품고 있는 실질적인 질문을 수면에 드러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지금-여기는 유토피아에 얼마나 가까운가, 이 점을 시인들이 고민할 필요나 자격이 있는가’ 하는, 유토피아 정치 기획 내에서의 시인의 효용, 혹은 존재 조건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실재 쓰여지고 있는 시는 현실에서 정말로 정치적 실천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현재적 상태에 관한 분석의 필요에 관한 것인데, 이 질문 안에서 첫 번째 질문은 이미 해결된 것으로 치고 있다. 즉, 시인은 이미 시민과 동일한 주체로 간주된다.
우리는 이 질문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시민인가? 시인이 시민이 될 수 있다면, 좋고도 훌륭한 최선의 이데아가 아니라 모방으로 이미 오염된 것을 또 다시 모방하여 오염시킨다는 이중 모방의 모욕적인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가 행할 수 있는 자기만의 재주―시민적 ‘덕’에 걸맞은―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플라톤의 그 유명한 유토피아 기획과 시인 추방론을 시발점으로 삼고 있는 랑시에르와 바디우의 논변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미학적인 것-정치적인 것, 혹은 미학-정치 논쟁에 대한 이해는 그 모든 유의미한 사유와 기억할 만한 잠언들에도 불구하고 현실 민주주의에 대한 부당한 편향의 컨텍스트와 유토피아 기획 사이의 비틀린 유비 관계를 간과함으로써 심각한 오해에 빠져 있다.
예술이 감성을 (재)분할하는 특이한 형태의 실천이라는 랑시에르의 견해
가령, 랑시에르의 경우, 그는 <감성의 분할>에서 플라톤의 국가 기획에 기대어 모방자(예술가)를 새로이 정의하고자 시도한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모방자는 정의상 이중적 존재다. 잘 조직된 공동체의 원리는 각자가 거기서 제 ‘본성’이 그를 운명짓는 것 한 가지만 한다는 것인 반면에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 (...) 노동의 이념은 우선 결정된 활동의, 물질적 변형 과정의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부재’에 근거한, ‘다른 것’을 하는 데 대한 불가능성이라는 어떤 감성 분할의 이념이다. (...) 모방자는 이 분할 속에 갈등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그는 이중의 인간,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감성의 분할>, 오윤성 옮김, 도서출판 b, 2008, 58쪽
의문의 여지없이 시와 정치의 오래된 참조항인 플라톤의 <국가>를 통해 유토피아의 기획 자체가 분업에 의해 조직된 정치 체제를 의미하고 있는 한, 시인이 유토피아로부터 추방되든, 특이한 시민으로 받아들여지든, 그는 이미 하나의 직업인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나는 랑시에르의 감성의 (재)분할이라는 키워드가 플라톤의 이 같은 기획적 성격에 깃들어 있는 ‘분업하는 인간’의 이념을 비판하는 일에도 역시 고민을 쏟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시인을 인증하는 방식—시인이 유토피아의 전형적인 직업인은 아닐지라도, 노동하는 타인들의 감성을 재구성함으로써 공동체에 유의미하고 쓸모 있는, 저 나름대로 특이하게 노동하는 인자로 합리화되는 결론은 희한하게도 플라톤의 유토피아 기획에 맞춤하여 도출된다는 데에서 적잖은 당혹감을 느낀다. 물론 그는 단순히 예술의 사회적 유용성으로 이 논의를 수렴시키는 것은 아니며, 게이브리얼 록힐과의 대담에서 “‘정치적 예술’은 세계의 상태에 대한 ‘자각’을 야기할 유의미한 스펙터클의 단순한 형태로 작용할 수 없다”(<감성의 분할>, 90)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위 ‘정치적 예술’이라고 불리우는 프로퍼갠더 형태의 예술을 비판한 것이지, 이미 둘러싸고 있는 빠져나갈 수 없는 분업 사회의 테두리를 충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예술이 대중예술을 포함한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모든 감성 창조적 활동이라면, 그러한 예술 일반의 감성을 분할하는 작동방식은 가장 교묘하게 체제영합적인 방향을 정위할 수도 있다. 시를 위시한 문학예술이, TV나 소셜 네트워크가 수행하는 (재)분할의 영향력과 비교될 수 있을 만큼 더 큰 효과를 발생시키는가? 보다 관대하게, 만화든 드라마든 온라인 게임이든 모든 창의적인 결과물들을 광범위하게 예술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매스미디어의 ‘실천’ 방향이나 그것을 수용하는 현대의 노동하는 인간이 전유하는 내용이, 체제 자체를 떠받치고 있는 시장의 이익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가? 그 같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또다시 예술 창작의 가이드라인을 어떤 식으로든 마련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또 다시 이미 “세계의 상태에 대한 ‘자각을 야기할 유의미한 스펙터클의 단순한 형태로 작용할 수 없”는 ‘정치적 예술’로 회귀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예술 작품들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위한 기준들의 견지에서 질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 이후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 “예술적 실천들에 의해 산출된 사물 현시 양식들 또는 논리 연쇄 양식들을, 그것들 본래의 사용을 위해, 전유하는 것은 정치들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가치 판단인지 사실 기술인지 선뜻 알아보기 힘든) 진술(<감성의 분할>, 92)은 그 자신이 바라는 바와는 달리 시학적 특질을 띤 미학적 이론 진술이 되기에는 불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그 자신이 품고 있는 감성을 분할하는 예술의 특질과 정치적 실천이라는 양자 개념의 관계가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계기에 의존하는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이 모호함이 온통 빠져나갈 구멍들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우리가 감성의 분할이라는 개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때 이후에 야기될 행위의 방식이 우리가 받아들인 의미심장한 내용들에 비추어 의미심장하게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보자마자 호감을 느낀 어떤 사람의 셔츠에 묻은 얼룩을 보고 ‘허술하다’고 생각하기보다 ‘인간적이다’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평가 이전에 평가조건 자체를 결정짓는 주관적인 편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 대신 시와 이론, 시와 정치의 만남에 관해 말해줄 누군가를 너무 몸이 달아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장 두려운 것은 이것이다; 철저하게 분업화된 이 체제 내에서 우리가 즐기는 것들이 종국에는 우리를 배신할 것이라는 강력한 예감. 어떤 시인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는 두렵지 않다. 어지간해서는 시인이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우리에게 불편할 것을 요구하며 이 불편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여되는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쏠쏠한 재미를 주는 평일의 TV 예능 프로그램이, 일일 막장 드라마가, 트위터가,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이 제공하는 창의적인 기획들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는 가끔 심각하게 두렵다. 요는, 다른 분업적인 노동자와 달리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인(모방자)에 관한 랑시에르의 서술은, 전체적으로 광범위한 모든 예술 행위가 지닌,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재현하며 재형성하는 특질에 대한, 주장이나 당위보다는 사실 ‘묘사’에 가까운데, 그것이 묘사하는 바가 현대적인 문화투쟁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19세기 노동자들의 수기 분석으로부터 너무 많은 자료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체제의 분업화된 노동에 근거한 그림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예술가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이건 예술이 행하는 바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다른 삶의 형질 전환에 복무한다는 일반론적인 관찰 자체는 비관론과 낙관론을 모두 가능하게 한다.
철학자들이 그토록 시인을 인증시키고 싶어 하는 이 등록소—공화국이란 대체 어디인가. 어째서 그토록 시민의 증명서를 발급 받아야 한단 말인가. 여기는 유토피아가 아닌데 말이다.
시와 철학이 서로를 인증한다는 바디우의 견해
바디우는 랑시에르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시인 추방론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플라톤이 추방하려던 시인이 이중 모방의 혐의를 받고 있었던 점에 초점을 맞추고 현대 시인들은 사실 플라톤의 시대와는 달리 그처럼 모방에 매달리는 자가 아니라고 (주로 말라르메를 옹호하면서) 주장한다. 그러니까 현대의 시인들은 플라톤이 추방 대상으로 지목한 용의자와 동일인물이 아니다. 바디우가 <비미학>에서 시인을 구출하기 위해 취한 이 태도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이념’은 사물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초월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처럼 질료를 규정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형상도 아니다. 시가 선언하는 것은 사물들이 그것의 ‘이념’과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비미학>, 장태순 옮김, 이학사, 2010, 85쪽. (강조는 저자)
따라서, “현대 시는 미메시스와 정반대이다. 현대 시는 그 작용을 통해 어떤 ‘이념’을 드러내며, 그 ‘이념’의 대상과 그것의 객관성은 드러난 ‘이념’에 비하면 빛바랜 복사본일 뿐이다.”(<비미학>, 46-7) 즉, 시인은 모방을 통해 이념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고를 보호한다”(<조건들>, 이종영 옮김, 새물결, 2006, 122)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현대 시 일반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말라르메로 대표되는 어떤 (모방하는 자들이 아닌) 시인들만이 이에 상응한다. 그것은 말라르메로 대표되는, 모방이 아닌 현대 시는 “사고의 실천”으로 드러나고(<조건들>, 140), “고립화된 공정 속의 진리가 결코 자신이 버텨나가는 상황과 혼동됨 없이, 인내하는 개별성으로서 진실된 것으로 입증될 것이라고 믿기”(<조건들>, 205) 때문이며, 나아가 “사유의 의무”(<비미학>, 42)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플라톤화되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는, 시의 정치화에도 반발한다.
정치적 가르침이란 대부분의 경우 시의 신비함을 강제로 걷어버리는 것, 언어의 역량에 한계를 미리 설정하는 것이며, 플라톤도 철학이 시에게 주는 가르침을 바로 이런 뜻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결국 명명할 수 없는 것에 강제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며, 현대 시에 반대하여 ‘플라톤화되는’ 것이다.
-<비미학>, 56-7
이 ‘플라톤화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시인을 시민으로 등록시키려는 욕망보다는 시에 대한 철학의 교조적 태도에로 향해 있다. 철학은 시에 경계를 설정하고, 잡히지 않는 의미를 붙들어 매며, 현대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이념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고정화시켜 오히려 오염시킨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현대 시는 이미 플라톤적인 모방자가 만들어내는 모방의 모방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같은 철학의 시도는 공기를 풍선 속에 가두어 보존하려는 무용한 욕망에 불과하다. 이 같은 바디우의 논의는 이 글의 초반에서 문제 제기의 한 가능성이었던 이론과 시적 실천 사이의 논란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바디우는 전통 철학에서 시에 관해 취하고 있었던 태도와는 썩 다른 제스처를 취한다. 파르메니데스 식으로 시와 동일해지려는 철학의 움직임과 그로부터 비롯하는 철학의 시에 대한 질투, 플라톤 식으로 시에 논변적 거리를 둠으로써 배태되는 시를 배제하는 태도,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시에 대한 지식을 철학에 포함시켜 미학적 지역성을 할당해 줌으로써 도출되는 시의 분류 작업 등 시에 대한 대표적인 철학적 태도들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며, 또한 하이데거의 시인에 대한 배려—“시인의 말하기와 사색자의 사고하기의 해독할 수 없는 짝짓기 속에서 신성의 재활성화를 공허하게 예언하도록 하는 것”(<조건들>, 128)—도 ‘철학의 입장에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시에 대한 질투로 시작해 ‘시에게 책임을 짊어지우는 것’(이는 <철학을에 대한 선언>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디우가 하이데거를 지지하는 라쿠-라바르트에게 사용한 표현이다.)으로 변화해온 철학의 태도가 바디우에게 있어 어떻게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그는 또한 시가 (마치 철학의 숙제 검사라도 하
려는 것처럼) “논변이 행해지고, 행해졌고, 행해질 빈 페이지의 시점을 표시하러 온다”(<조건들>, 139)고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시에 대한 옹호가, 시의 자율적인 운동이 자기도 모르게 철학에 대한 은총이나 선물이라고나 할 만한 철학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나뿐일까. 여전히 시에 대한 철학의 질시와 특화와 환호가 뒤섞인 애증이 읽히는 것은 어째서일까.
내가 바디우에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할 때이다;
시는 묘사도 표현도 아니다. 시는 세계가 주는 감동을 담아낸 그림도 아니다. 시는 하나의 작용이다. 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세계가 대상들의 모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는 사유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시의 작용을 위해서는—그 현전이 객관성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다. <비미학>, 61.
시가 작용이라는 말은 메타적 서술을 괄호 안에 넣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메타적인 서술에 매달려 실제 수행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성실한 이론가는, 공통감각의 세련과는 멀리 떨어져 법이라는 타율의 세세한 매뉴얼에 따라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을 방해하는 세금 징수원을 닮았다. 작용으로서의 시는 점심시간에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서 자기의 생선 다섯 마리와 떡 두 개를 이웃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자기 도시락을 열어놓고 서로 나누어먹게 만드는 자발적인 행위다. 그것은 기적을 일상 속에 전개한다. 김수영이 “시라는 절대적 완전과 혁명이라는 상대적 완전”에 관해 논문이나 두꺼운 책을 써서 그 의미의 엄정한 디테일을 기술하는 대신, 「김일성 만세」처럼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그를 오해로 몰아넣을 시를 썼을 때, 이 시 쓰기는 현실 정치적인 내용을 가진 금기 파괴가 아니라 그 자신의 사방을 통제하고 있었던 ‘규율’이라는 개념 자체를 뛰어넘는 하나의 작용이지 않았을까. 그는 그 시를 서랍 속에 밀어 넣어놓았지만 그것을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개인적인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이후의 글쓰기는 그 전과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그 자신이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이 ‘작용으로서의 시’는 우리에게 수행성에 보다 관심을 둘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때에 시는 이론과의 관계에 있어서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이론적 사유를 촉발시키는 촉매가 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하나의 작용이거나 사건으로서 자기 자신을 세계의 (이념 자체인) 질료로서 내어놓는다.
시인은 시민증을 발급받아야 하는가
플라톤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앞서 랑시에르의 미학-정치 이론과 바디우의 진리의 공정으로서의 시와 철학의 관계에 관한 입론이 플라톤의 <국가>에 나타난 시인 추방론의 어떤 지점들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는지 간략하게 논의했다. 랑시에르는 시인이 특이한 방식으로 유토피아의 시민이 될 수 있다고, 공화국에 혼란을 섞어 넣을 꼭 필요한 구성원으로 호명하는 듯한 반면, 바디우는 심지어 시인이, 플라톤이 혐의를 둔 모방자가 아닐 수 있으며, 시가 보여주는 ‘이념 그 자체인 사물’의 현시는 플라톤의 근본 전제인 이데아와 질료 간의 격심한 질적 차이를 단번에 좁힐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서 시인은 유토피아에 거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시민증이 발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시민이되, 플라톤의 가정과는 달리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랑시에르) 시민이며, 수학이나 정치나 사랑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생산하는(바디우) 시민이다.
그런데, 이 플라톤적인 유토피아의 기획을 초기화하는 방식은 어떤가. 플라톤이 <국가>의 2권 말미부터 간간이 시인들을 ‘경건하지 못하고 혼란을 조장하는 불온 인자들’로 비난하기 시작하여 ‘훌륭하디 훌륭한 사람(들)’-철인(들)의 통치 체제인 유토피아의 구성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축출해야 할 대상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상기하고 있음을, 이 유토피아가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철인 체제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현명한 자—훌륭하디 훌륭한 사람은 통치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자신에게 득 될 것이 없다고, 자기 삶의 온갖 안락함을 포기하는 자리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자발적으로 통치자가 되지 않는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는 될 수 있으면 이러한 자리를 사양하고 싶지만 시민들의 간곡한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떠맡는다. 유토피아의 불가능성이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 체제는 참주 정치 체제 다음으로 나쁜 체제인데, 그곳에서는 우연성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발달해서 심지어 제비뽑기로 관리를 결정하는 현실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이곳에서는 온갖 사람들이 자기의 사소하기 짝이 없는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묵묵히 수행해야 할 자기의 노동을 내팽개치고 모두가 정책 결정에 참여하려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같은 ‘지나친’ 민주주의의 발달이 필연적으로 독재자의 출현을 조건 지을 것이며 이내 참주 체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시인의 시민으로서의 자격과 요건을 유토피아를 참조해서 논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지혜롭고 훌륭하디 훌륭한 철인 치하의 정체가 아닌 다음에야 이 같은 논의는 허수아비 논쟁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 ‘그들’(das Mann)은 어느 누구도 시인을 추방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최선자들의 정체’를 구성할 만큼 훌륭하지 않으니까.
말할 수 없이 사소한 이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한없이 사소한 세계다. 시인이 혼란을 조장하기는커녕, 이제 신성함의 이데아를 믿는 사람은 시인 밖에 안 남은 것 같다. 게다가 이 사소함은 모든 ‘위대한 롤 모델’들의 실종과 동일근원적이다. 정치에서 영웅이, 사회에서 귀족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에서도 천재가 사라졌다. 우리는 이 사태를 견디어야 한다. “귀족이 있다면, 자신이 귀족이 아닌 상황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래서 귀족은 없다! 시민 시대에 인간에 관한 정치이론은 이런 감정적 삼단논법에 기초를 둔다.”든가 “재능은 가진 사람에게는 함정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짜증나는 것일 뿐이다. 천재여 집으로 가라.”는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현실 민주주의의 환멸에 대한 언명(<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은 이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해석한다. 이것은 온갖 정치적 올바름을 실행하기 위해 차이를 강조하면서 벌어진 희생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소수의 영웅, 귀족, 천재가 사라진 사태는 훌륭한 보통 사람들의 경험적 삶에 있어서는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영웅, 귀족, 천재의 ‘이념ideal’이 사라진 사태는 정신적인 공황을 몰고 왔다.
이 사태는 점진적인 민주주의적 이상의 실현의 과정에서 일어났는데, 이론 역시 이러한 상황을 조장하는 데 일조해왔다. 천재는 어떻게 사라졌는가? 리처드 로티는 프로이트가 천재성을 민주화했다고 말한다. 실은 이것은 매우 긍정적인 언명이었다. 천재성이 서사를 만드는 뛰어난 능력이라면,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 삶을 재서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실증했고 또 그러기를 독려했다. 영웅적 특질은 정치적으로는 시민들의 승리와 반영웅들의 부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귀족성은 시장의 세속적인 발랄함의 부상으로 멸시당했다. 당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영웅도, 귀족도, 천재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노력해서 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스노비즘에 빠진 글줄 깨나 쓰는 부자에 불과하다. 자기 서재에 철학자들의 전집과 시선집과 고전문학전집을 구비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이 말을 겨우 은유로나 사용할 수 있을, 성실하고 관대하며 약자들에 대한 연민을 열심히 훈련한 돈 많은 사람. 이것이 최선이라고 이 사회는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철인 체제만 빼고 플라톤이 말한 체제들―과두정체, 민주정체, 참주정체―이 모두 다 있다.) 그러나 이 가르침에는 이 모든 것-천재, 영웅, 귀족-이 당신 자신 안에 모두 거주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모든 최고의 지위를 내면화하라는 내용이 포함된다. 실행하라!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든, 타인들에게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법의 그물에 사로잡히지 않을 만큼만 최소화하면서—열심히 실행한다면 당신은 그 방면의 최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실행하면서 우리가 이념으로 삼을 대상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념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옆 사람과 경쟁한다. 우리 동시대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콤플렉스는 이 같은 이념의 대상이 사라진 사태에서 비롯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소한 차이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따라서 철인 체제는커녕 덜 떨어진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나와 당신들은 시인이 시민증을 가지고도 비렁뱅이나 백수나 금치산자처럼 세계의 규율에 맞지 않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를 쫓아내거나 비방하거나 인증할 자격이 없다. 우선, 시인은 가정주부가 그렇듯이 하나의 직업이 아니며, 그는 세상 모든 일들이 노동이 아닐 가능성을 꿈꾸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하는 것은 어떤가. 분업화된 노동의 개념을 우선 버리고 생각해보는 게 어떤가. ‘감정노동’이나 ‘비물질노동’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대신 노동이라는 어휘를 빼고 생각해보는 게 어떤가. 그가 시를 노동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임금도 거의 없이 즐겨 야근하며, 때로 밤을 새며, 자기의 노동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의 삶을 다 바치고 있다’고 우리는 현실 자본주의의 어법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그것이 일이라 생각지 않고 즐겨 수고를 자청하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처럼 즐거워서 무언가에 몰입하고 기꺼울 수 있다면.
‘시가 되려는 자’
당신은 이 생각이 너무 공상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그 모든 ‘노동’을 둘러싼 어휘, ‘정치’를 통해 미학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들도 최종적으로는 나의 꿈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라고 반론을 펼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개념을 상상하고 신조어를 붙이는 대신 어떤 상태를 먼저 상상하고 자기가 그것이 될 수도 있다고 ‘믿어야’ 한다. 이 점에서 나는 바디우가 ‘시가 하나의 작용’이라고 했던 것을, 라쿠-라바르트에 반대하여 “시가 오히려 산문을 해명해주”며, “사건과 결정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적 사고의 실질성이 프로그램의 모호한 정식화를 사후적으로 허용해준”다고, ‘우리는 사고에서 사고에 대한 사고로 나아가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며 사고에 대한 모든 프로그램은 사고 이후에 오고, 그래서 사고의 작동 구도를 변화시킨다’고 한 것에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념의 폭력과는 다르지만 시도 역시 폭력적이다. 편안한 어제의 사고방식에 오늘과 내일을 몽땅 맡기고 있는 자에게 다른 방식의 사고 구성을 갑작스럽게 불러오는 시의 이 폭력성은, 그러나 종종 파괴의 비가시성을 동반하기 때문에 알아보기 쉽지 않다. 시는 낯선 비유들을 짱돌이나 화염병, 사제폭탄처럼 세계에 투척하지만, 그 질료와 형상이 결합된 형태는 종종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한번 그 광경을 접한 자는 자꾸만 다시 그러한 광경과 대면하고 싶어진다.
심지어 자기가 시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소수의 희귀한 경우들을 사람들이 성자, 혁명가,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 플라톤의 유토피아의 기획에 등장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시민의 기술은 기실 경험에 의해 연습된 가업이나 주변에서 자주 접한 기술에 의해 결정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는 목수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목수로 살 예정이었던 목수의 아들이 제 머릿속의 책상이나 의자의 이데아를 모방하여 그것을 제작하는 목수가 되기를 그만두고 자기 자신이 이제껏 있어본 적이 없는 어떤 이데아가 되고자 한다. 그는 갑자기 조직화된 사회의 직업인이기를 그만 두고 자발적으로 백수가 되어 방랑하면서 도중에 만나는 어부, 세관원, 지식인 관리들에게 제 할 일을 그만두고 이 특이한 백수 집단에 가입하기를 권유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여기와는 다른 곳, 이것과는 다른 것에 관해 말하고 자기 자신이 메시지의 전령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가 되기 시작한다. 제국과 식민지 곳곳에 갑자기 출몰해 사람들의 일손을 멎게 만드는 이것을, 시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라 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시가 될 수도 있으며, 시가 되고자 하는 이런 사람이 어디엔가 또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해야 한다. 무책임하지 않으냐고? 모든 사람들이 노동을 그만두고 시가 된 이후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그 다음엔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시의 기획할 줄 모르는 무책임성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섣불리 협회에 가입하지 않고도 자기에게 자기를 인증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자연과 자유가 일치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