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ces는 2006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아시아 문화 컨퍼런스의 이름이다. 올해 3회째를 맞아 말레이시아 페낭에 소재한 세인스 말레이시아 대학Universiti of Sains Malaysia에서 8월 7일부터 3일 간 “상품화, 쟁점 그리고 창의적인 문화”라는 제목으로 공식 일정을 진행했다. 아시아라는 광범위한 지리상의 명칭을 문화라는 더 광범위한 학문 명칭과 접목시킬 때 무엇이 출현할 것인가. 이 컨퍼런스는 아직 이런 궁금증에 괄목할 만한 구체적인 지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발표자나 토론자들의 국적은 말레이시아, 부탄, 일본, 한국, 홍콩, 대만, 태국, 미국으로, ‘아시아’를 대표하기에는 너무 적거나 광범위하고, 참가인원은 해당 지역 참관인을 모두 합해도 60명을 넘지 않아 총 11개의 패널이 진행된 점을 생각하면, 참관인들의 대부분이 발표자나 토론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제외된 것은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개발도상국인 관계로 연구자들이 항공운임이나 숙박료 등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로컬한 것이 아시아 문화 연구의 특성이라는 듯, 대부분의 발표 내용은 케이스 스터디에 그치고 있어 지나치게 협소하거나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한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사가에 대한 소개부터 태국 지역 운동가들의 군소 라디오 방송국 운영에 관한 취재에 이르기까지, 홍콩 연구자의 동북아 국가들에서의 영화 산업의 생장 추이에 대한 연구에서 말레이시아 이슬람권의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이 소규모의 컨퍼런스는 소재 면에서는 너무 다양하고 그 방법 면에서는 지나치게 획일적이었다. 너무 달라서 다 비슷해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은 페낭을 떠나는 날 페낭 국제 공항의 토산품 코너에서 인사동에서나 파는 선비와 기생이 그려진 동전 지갑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과 기이하게 접목되었는데, 아마도 인사동에서 인도 산 숄이나 케냐 산 토목 공예품과 마주치고도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왜 그 차이가 그렇게 크게 다가왔으며 심지어 후진성을 즉각 떠올렸는가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의 시장’에서 로컬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상품은 같은 진열장에 놓여도 이상하지 않다. (이상하지 않은가? 로컬하다는 것은 하나의 특성일까? 혹, 전근대성이라는? 과거의? 향수를 떠올리는? 인사동은 한국 중의 한국인가, 한국 속의 타국인가? 아시아 문화 연구의 장을 곧장 토산품 가게에 비유하는 것에 관해 당신은 과연 반감을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가?)
이 컨퍼런스의 운영위원인 성공회대 동아시아 연구소의 신현준 교수는 한국인들 참가자와 시간을 보내는 사석에서 ‘동북아는 아시아가 아니다. 한국·일본·중국은 작은 미국이며 더욱더 미국이 되어가고자 한다. 동남아의 낯선 지역성이야말로 진짜 아시아다’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우리는 ‘세계와 지역’을 ‘미국과 나머지’로 자연스럽게 환원시켜 생각하고 있다는 점, 따라서 이 ‘세계-미국’이 근대성-보편성의 모델이며 ‘지역-나머지’가 전근대-개별성의 모델로 은연중에 지칭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가 지상 목표가 되고 나면 이 구도는 곧 ‘세계-미국-미래’와 ‘지역-나머지-과거’로 위치지워진다. 신현준 교수의 언급은 반대 방향을 설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세계화에 상응하는 지역 개발의 논리와는 물론 다른 것이다. 나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계화의 대응 논리로서의 지역화는 세계화를 대타항으로 두고 있는 한 언제나 그것에 상응하는 논리를 제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혹은 지워지지 않는다.
나도 물론 이 혼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 접하는 이슬람·힌두·유교 문화의 다문화국가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말레이계·인도계·중국계의 서로 다른 세 개의 민족문화가 말레이시아라는 제도의 그릇 안에 버무려져 있는 샐러드처럼 평화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한 매혹이었는데, 그것은 내가 여행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매혹은 나의 시선이 처음 방문한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나의 ‘모국’과의 유사성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있었다는 것을 배경으로 한다. 페낭 국제 공항의 고즈넉하고 어딘가 불쾌하지 않을 만큼 낙후한 분위기는 한국의 중소 도시나 20여 년 전 서울을 떠올렸으며 여름의 제주도‘처럼’ 견딜 수 있을 만큼 더운 날씨나 ‘BBQ', 'KFC' 등의 낯익은 간판들에서 느낀 안도감, ‘아시아의 진주’라는 별명을 가진 페낭의 탄중 붕가나 바투 페링기 해변이 차도르 차림으로 제트스키를 타는 무슬림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대천 해수욕장을 연상시켰다는 점 등은 모두 ‘로컬한 것’에 대한 기대는 배반했지만 재빨리 정서적인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말레이시아의 지역성’에서 ‘한국의 지역성’을 발견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는 이 가공할 느낌은 유사성을 통해 자기의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안전을 도모하려는 인간의 도저한 생존본능일 터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재빨리 편입시키려는 ‘성급한 의미화’가 실제로 어떤 보편성을 담지할 수 있는가는 성찰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타자로 생각하고 있는 거주민의 경우는 훨씬 곤란할 것이다. 컨퍼런스의 기조 강연을 맡았던 무하마디아 수라카르타 대학의 패리쉬 누어 교수는 ‘정치적인 것’을 이 ‘문화’ 컨퍼런스와 관련지어 눈에 띄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고백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라는 보편 개념에 입각했을 때 인도계·중국계·말레이계 혈통을 모두 물려받은 동성애자인 그의 입장에서 민족적·인종적 정체성은 더 이상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면서 동성애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자신의 국가 안에서 그의 정체를 보증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기조강연이 있던 컨퍼런스 첫날은 동성애 혐의로 기소된 말레이시아 전 수상의 재판일이었다. 며칠 후 그는 변호인단을 동원해 무혐의로 풀려나는 데 성공한다.) 혹은 그러한 정체불명의 정체가 그를 보편성에 대한 사유로 이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익숙한 주변 세계는 그 자신의 무엇과도 유사하지 않고, 역설적으로 그의 모든 것과 비슷하다. 나는 이제 지역과 세계가, 개인과 사회가 프랙탈 구조로 느껴지기 직전이다. 어쩌면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내용이 모순 조화인 이 프랙탈 구조의 패턴을 이르는 것일까? 그 패턴은 정말 바뀔 수도 있을까? 이것이 ‘성급한 의미화’가 되지 않으려면 필히 그 밑바탕에 움직일 수 없는 기준으로서의 도덕적 가치가 깔려 있어야 하리라.
참관기라는 글의 형식은 많은 것을 면죄해줄 수 있다. 더욱이, 나는 여기에 발표자나 토론자로서 참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청중의 하나로 머릿수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게으른 자격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최소한 20여 년 전의 한국처럼 개발도상국에 살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이 면죄부를 필요 이상으로 이용하며 가능하면 냉정하게 뒤돌아보려고 이 흔치 않은 만남의 가치를 다소 고의적으로 평가절하 했다는 점을 독자들이 염두에 두어주기 바란다. 의미는 계속 부딪히면서 생성될 것이니까 중단 없이 부딪힐 용기만 있다면 조급해하지 않아도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