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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ard

정동, 그리고 多衆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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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마우스 포테이토의 피로

 

여기에 일을 마치고 온 한 사람이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케이블 TV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녀는 피곤하고 온통 나른한 느낌에 사로잡혀 자신의 노동에 지친 심신을 환기시키기 위해 채널을 돌리고 있다. 온갖 종류의 채널들이 그/녀의 눈을 스쳐 지나가다가 마침내 그럴 듯한 영화 한 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 속에는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보고서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차 있다. 정신의 한 부분은 자신의 노동에, 그리고 또 다른 부분은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환기에의 요구로 몹시 피로하다. 그러나 그/녀는 리모트콘트롤러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여기에서 리모트콘트롤러는 더 이상 TV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가까이 있는 그/녀를 통제한다.) 피곤한 그/녀는 차라리 TV를 꺼버리고 잠을 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제멋대로 이미지를 그/녀의 시신경을 통해 투여하고 머리 속에 등록시키는 TV의 세계,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다. 분명히 그/녀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태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TV를 갖다 버리거나 오지로 망명하는 길 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라고 부른다. 이 수많은 수동적 이미지 등록의 피곤에 지친 사람들은 TV를 떠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또다시 피곤한 정보들의 숲 속을 헤맨다. 카우치 포테이토마우스 포테이토mouse potato로 자기 존재를 새로이 로그인한다.

매일 이러한 생활을 반복하던 차에 가공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치자.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곧바로 날아온 여객기는 단도직입적으로 건물을 끝장낸다. 노동에 대한 상념과 알 수 없는 도피 충동으로 머리 속이 어지러웠던 그/녀는 무슨 영화의 한 장면쯤으로나 여겨질 그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정말로 환기된다. /녀는 환호한다(/녀는 미 제국의 세계경찰 노릇에 눈꼴이 신 주변국가 출신이다). 그리고 곧 그/녀는 죄책감을 느낀다(/녀도 그 건물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사람이다). 이 초대형 리얼리티 쇼를 놓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손해다. 아무리 영화에서 화성인들이 지구를 폭파시킨다 해도 현실에서 건물 하나가 날아가는 것보다 더 신나는 구경거리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건물의 이름과 국적이 은유하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라. 월드 트레이드와 스테이트들이 끝장난다면 그/녀는 더 이상 카우치 포테이토나 마우스 포테이토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요는, 피곤한 이미지들의 등록을 말살시키고 햇볕과 바람을 조용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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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으로부터 제국중』의 저자들이 빌어오고 있는 정동affect은 햇볕과 산책에 친숙했던 중세-근대 사이에 출현했던 돌연변이와도 같은 철학자의 예리한 통찰력으로부터 나왔다. 20세기 후반의 감성을 가지고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텍스트를 정초주의적인 전통 철학들의 이성중심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철학 전통들로부터 건져내어 ()현대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새로이 하나의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어휘들의 꾸러미를 내어놓는다. 코기토와 전혀 다른 어떤 주체를 발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로지 관념과 (때때로 문제가 아주 복잡해질 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신을 통해야만 자신의 존재에로 도달하는 데카르트의 유아론적인 독단론에 비하면 어떤 사물/사태가 를 정동하는 방식들에 기쁨과 슬픔이라는 훨씬 생생한 구체적 어휘들을 통하여 그 사물/사태와 주체의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정서들을 본질과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아마도 스피노자의 시대에 보다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훨씬 납득하기 쉬운 설명이다. 특히나 코기토로부터 도구적 이성에 이르기까지 동일 근원적인 한 줄기로 연결되어 있는 주체의 일관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의 광기를 보아온 근대 이후의 개인들에게는 피로해진, 누군가 자기의 슬픈-수동[정념]들에 이름을 붙여주기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언제나 바래왔다는 것이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 없었던 막연한 피로와 환기에의 욕구에 이름을 붙여준다(혹은 상기시킨다)는 것은 속 시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것은 주체의 특이성을 버리지 않고 세계라는 완전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해준다. 이는 현상학/해석학과 언어철학의 집요한 주제의식을 이루고 있는 언어를 통한 인식론적 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해준다. 정동되는 능력을 통해 주체와 사물/사태/또 다른 주체가 공통적인 제 3의 것을 공유한다는 것은 현대의 위대한 철학적 시도들이 오랜 수업기간을 거쳐 도달한 것들과 겹쳐진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실증적인 방식을 두루 거친 다음에야 도달했던 언어공동집단, 후설이 수학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을 오랫동안 고민한 다음에야 도달한 생활세계의 영역과 같은, 즉 데이빗슨의 말을 조금 변형한다면 우리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100% 할 수 없고, 대화 상대자가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여전히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기적적인 상태와 같은, 도구 이성적인 논리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조화의 상태 말이다. 게다가 공통적인 것을 통한 되기의 세계는 창조를 강조함으로써 단지 이러저러한 현실 세계의 설명에 그치고 마는, 단지 현재하는 세계에 대한 수긍에 불과한 것보다 훨씬 희망적이다. 야호! 만세! 세계의 부조리에 지치고 논리와 현실의 부적합성에 학을 뗀, 생산되는 것이라고는 끝없는 궁금증 뿐인 학문이라는 비물질 노동에 지쳐 있는 인문학도들은 기쁜-수동의 순간을 경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