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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이 더미 위에

: 세기문학>에 부쳐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이렇게 시작한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주인공 한탸는 폐지 압축공이다. 그는 매일 종이를 압축기에 넣으면서 가장 윗부분에 가장 경외할 만한 책을 펼쳐 얹는다. 곧 펄프 죽이 될 종이 뭉치들에 대한 경례처럼. 폐간된 잡지들에 대한 파란>의 기획도 이런 경례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세기문학>이 종간한 지 올해로 8년째다. 나는 두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5년간 발행된 이 잡지를 모두 간직해왔다. 2013년 혁신호 직후 내가 처음 참여한 62호부터 종간호인 83호까지. 다만 김현 시인의 「질문 있습니다」가 실린 74호만은 누군가 빌려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가져..

지난 글/기타 2026.08.10

폭우

여름에는 모든 것이 우거진다. 운동장을 둘러 서 있는 플라타너스의 청록색 잎사귀들은 무서운 속도로 영역을 확장하고 등나무 벤치 그늘에는 동그랗게 말렸다 펴지면서 기둥을 더듬어 오르는 덩굴손들, 체육복을 입은 중학생들은 플랭크 자세로 땡볕 아래 굴비 두릅처럼 줄지어 엎드려 뻗쳐 있다. 손바닥에 배겨오는 굵은 모래알. 길을 잃었는지 비틀비틀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눈앞에서 기어가는 왕개미. 이 모래들도 바다에서 왔을까? 교문을 나서서 40분만 걸으면 해변에 갈 수 있지. 그렇지만 이 도시 사람들은 여름엔 바다에 가지 않는걸. 해수욕객들이 바다를 더럽히고 있기 때문에. 짝꿍 선희도, 충무에서 전학 온 현정이도, 청소 시간이면 교실 뒤에 밀어둔 책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소형이도, 교회 오빠에게 온통..

지난 글/기타 2025.11.19

나의 시는 나의 허물

두 번째 시집이 나왔을 때 나는 신경외과 병동에 있었다. 수면마취 없이도 위 내시경을 무난하게 견딜 만큼 통증에 둔감한 내가 “시인의 말”을 쓰고 얼마 후 오른쪽 머리부터 어깨를 거쳐 팔과 손가락까지 불에 지지고 끌로 긁어대는 듯한 통증에 울면서 밤이 새기를 기다려 간 근처 제법 큰 병원에서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사지 마비가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울프 노트』는 인쇄소에서 으르렁거리면서 자기 울음을 복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 무서운 진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친정 근처 관절척추전문병원에 두 번째 견해를 들으러 갔다. 다행히 두 번째 의사는 몹시 보수적이어서 몸에 칼 대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숟가락조차 들기 힘든 더러운 몸도 6주간 통증을 참고 나면 수술을 면할 희망이 있..

지난 글/기타 2025.06.19

디오니소스 신도: 강정 시인의 시에 부쳐

(강정 시 "용의 탄생", "열흘 간의 유령", "그림자의 견습, 혹은 독신의 뿌리"(시집 에 수록)에 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태몽을 알고 있다. 어머니가 꾸었거나 아버지가 꾸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어머니나 아버지의 혈족이 대신 꾸어주기까지 하는 태몽은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로서 서양철학의 관점에서라면 심리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겠지만, 우리 문화 안에서는 가족 단위 공동체에서 공유되는 개인의 탄생 신화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태몽과 같은 개인 차원의 존재론적 근거 짓기는 공동체 전체의 신화처럼 광역화된 형태로 신봉되거나 공유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상징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대개 잉어나, 용, 호랑이, 별, 달, 해와 같이 아주 오랜 옛날에도 신화적으로 상상했을 ..

염장이와 선사

염장이와 선사 조오현 어느 신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가니 때마침 늙은 염장이가 염습殮襲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염습하는 모양이 얼마나 지극한지 마치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 보고서야 관뚜껑을 덮는 것이었습니다.사실 오늘 아침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라도 죽으면 시체라 하고 시체라는 말만 들어도 섬찍지근 소름이 끼쳐 곁에 가기를 싫어하는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다 늙고 병들어 죽어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text & context 2025.01.19

계간 시와사상 2024 겨울

새로 장대성 술은 아니고요잘 좀 살려고 새사람이 되려고기지개를 켜면서 외친 말이에요 회사 근처 원룸은 누런 직사각형 같고나는 아침마다 수학 문제를 풀듯이 분주해져요대기업을 안 다녀 다행인가요 거긴 너무 비싸니까땅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넓이라서다행입니까거울 안의 나에게 물으면 웅얼웅얼 뭐라는지 모를 입 모양이즉석밥을 다 털어 넣을 때까지 따라다녀요 그런데 아침부터 멧돼지가 기차에 치여 죽고멧돼지의 죽음보다 출근길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니오늘도 잘 살긴 힘들겠죠 이를 닦으면서도 나는 자꾸멧돼지는 왜 기차역까지 내려왔는지표는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래도먹고사는 문제겠죠 사는 동안죽기 전에 죽어버리러 온 것이겠죠 무서운가요무서웠을 겁니다..

text & context 2025.01.02

뱀의 혀: 김정환, <황색예수2> 해설

400 쪽에 달하는 그의 이번 시집 원고에 꽂아둔 포스트잇 인덱스들이 빛나는 밤이다. 원고 최종 마감일을 여러 번 갱신한 밤이다. 나는 저 인덱스들을 어떻게 종합해야 할 것인가. 종합은 가능한 것인가. 종합이 그의 시를 이해하는 가장 유의미한 방법이라고 나는 나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우선 회상의 문으로 들어간다.   시차 적응: 1985년 시집을 1991년에 읽고 2023년에 다시 읽으면   언젠가 다른 지면에 몇 번 고백한 적도 있지만, 나는 10대 후반에 지나치게 80년대 문학에 몰입했던 탓에 시대에 맞지 않는 세계 해석에 오랫동안 사로잡힌 적이 있었고, 지금도 거기서 다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것이 나에게는 오랜 숙제였는데, 내가 80년대 문학에 몰입했던 10대 후반은, ..

두더지 언덕으로 산 만들기

내가 지켜보는 동안 개는 들판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이따금 멈추어 킁킁대고는 다시 달린다. 원을 그리며 가서. 주로 두더지 언덕들 주위에서 냄새를 맡더니. 곧장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나는 내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에 산만해진다. 곧 갈게요. 뭐 하고 계세요? 저명한 여성 시인이 묻는다. 독서 중인가요? 집필 중? 공원이 아마 멋지겠죠. 아뇨, 아뇨, 나는 당황한다. 두더지 언덕들을 보고 있어요… 저의 개가 그 속에 코를 들이밀어서요. 오, 정말요? 전 작업 중이실 거라 생각했어요. 알겠어요, 끝나면 전화할게요. 개는 이제 가장 큰 언덕부터 시작해 킁킁거리며 맹렬히 땅을 판다. 나는 총명한 시를 쓰기에는 너무 멍청하다. 나는 개에게로 달려간다, 녀석이 너무 몰입하고 있기에. 소리를 지르지만 녀석..

문학의 공포

1. 초월적 상상력의 부정적 총체성으로 얼룩진 ‘세계의 밤’을 지나 ‘우리-없는-세계’의 ‘존재-없는-생명’의 공포에 도달한다. 또는 충동의 가없는 질주를 지나 매끄럽게 균질화된 권태로운 기분의 세계에 도착한다. 아무튼 저 세계의 밤은 충동과 부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 ‘우리-없는-세계’, 또는 균질화된 권태 속을 미끄러져 가는 지금-여기의 시공간은 가장 작은 요철도 무덤처럼 불룩한 충격을 안겨주는 곳이다. 어쩌면 낭만주의 다음에 고전주의가 오는 것처럼, 혹은 패션 유행의 30년 주기설처럼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세대는 복고를 새것으로 겪는 것일지도. 그러나 과거와 꼭 같이 반복되지 않으므로, 복고가 되기 전의 그것을 겪은 사람은 거부감을 표시할지도. 그러고 보면 이즈음의 시는 어떤 면..

지난 글/tender 2024.04.17

20세기의 연기 속에서

시인 겸 철학자 유진 새커의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철학의 공포』에서 저자는, 자신의 취향을 문화사적이고 존재론적인 연구와 적극적으로 혼합하려고 한다. 그는 고딕 소설과 공포 문학, 20세기와 최근의 공포 영화와 재난 영화에서 재현하고 있는 공포의 대상들을 유형화하고 이를 자기 자신과의 토론을 통해 이론화하면서 느슨한 시적 이론을 펼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실체가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익명적 공포에 관한 담론으로 이것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 근거로, 그는 고전적인 괴수 영화들(좀비, 흡혈귀, 악마, 유령 영화들)과 대별되는 ‘거기 있음’의 공포를 제시한다. 가령, , , , , , , , , 등의, 이름을 확정지을 수 없는 공포의 대상들에 관한 영화 제목들을 예로 들면서, 이런 ‘새로운’ 종류의 공..

지난 글/tender 2024.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