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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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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과 포만감 다른 많은 수도권의 아파트 단지처럼 우리 동네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장이 선다. 아파트 단지에 서는 장은 먹거리를 사러 갈 곳이 없어서 서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입구며 후문 쪽에 벌써 서너 개의 슈퍼마켓과 가게가 있고 어지간한 채소며 생선, 정육 등을 10분 거리 내에서 살 수 있으니, 아파트에 서는 장은 그보다는 무언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만족시켜주는 일종의 문화적인 것에 가까운 듯하다. 게다가 공산품이나 냉동식품이라면 몰라도 신선식품을 주말에 대형 할인마트에서 대량 구매하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수고를 덜어주는 효과도 있다. 오늘이 마침 장날이라 저녁에는 오징어무국이나 끓여볼까 하고 홍고추를 사러 나갔다. 전날 가게에서 다른 재료는 사놓았지만, 이상하게도 단골 가게에서는 상태가 별..
대학교육 ‘혁신’ 유감 Budi Satria Kwan, 그러니까, 내가 철학과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가 재떨이를 던지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예반 때문에 떨어진 성적을 만회하겠다고 고2 겨울방학에 수학 문제집을 들고 남산도서관에 간 것이 화근이었다. 거기에는 많고 많은 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처음 보는 낯선 단어들로 세계를 다시 설명하려는 사람들의 책만 모아놓은 방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한적하고 나른한 그곳에서 수학문제도, 풀기는 풀었지만, 중간 중간 집어든 이상한 책들에 씌어 있는 이상한 낱말들로 된 답 없는 이상한 문제들은,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창가 자리에 나를 붙들어두곤 했었다. 지금도 ‘공부’라는 낱말을 들으면 그 고즈넉한 겨울 저녁의 햇살이 혼곤히 비쳐들어오던 창가 자리를 떠올린다. 나는 아직도 공..
훌륭한 보통 사람 일전에 시인이신 은사님과 함께 했던 식사 모임에서 의정부 화재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더랬다. 맨몸으로 시민들을 구조한 간판 시공업자의 일화는 확실히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에 대해 한층 예민해진 사람들에게 일말의 위안을 주었다. 어쩌면 초자연적인 영웅들을 그린 만화들은 저런 숨어있던 익명의 능력자를 목격한 창작자들에 의해 태어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우리가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훨씬 더 깊은 불안과 걱정에 마주치기도 한다. 만일 우리 사회가 상시적인 안전 체계보다 보통 이상의 헌신도와 선의를 가진 익명의 훌륭한 보통 사람, 평소에는 뿔테 안경을 끼고 다니다가 위험 상황에서는 슈퍼맨으로 변신하는 클라크 같은 사람에게 기대를 걸어야 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잠재적인 우리 중 누..
자라의 짓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을 오늘 문득 떠올리다가 이 속담의 주인공에게 자라가 무슨 짓을 했는지 종일 궁금했던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사전을 찾아보니 “고슴도치에게 혼난 범이 밤송이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이 북한에서 이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필시 이 속담은 경험을 통한 학습 효과라는 보편성을 전해주는 동시에 큰 범이 자신의 위용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가시 뭉치에 심리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상황을 풍자적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 상태의 자라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목을 움츠렸다 폈다 하는 것 말고는 자라가 할 수 있는 무슨 놀라운 일을 떠올리기 난감한 것이다. 남편은 자라가 분명 손가락을 물었을 거라고 했지만, 속담은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는다. 실로..
얼마나 더 사랑을 송나라의 문장가 구양수가 이야기했다는 삼다 원칙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글쓰기의 기본이다. 과연 많이 읽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 공감하거나 비평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며 곧이어 스스로 쓰게 된다. 그러고 보면 저 삼다 원칙은 각각의 개별적인 행위를 분류하여 원칙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글 잘 쓰는 사람의 연속된 행위를 묘사해놓은 것 같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도 경험일진대, 많은 글을 읽는다면 그만큼 많은 삶을 자진하여 추경험하게 되는 셈이고,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러니까, 읽고 쓰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일이리라. 나갔다 돌아오면 이전과는 무언가 아주 조금이라도 깊어지거나 넓어지거나 달라져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나가보는 책이라는 ‘바깥’은, 그것이 새로운 세..
공부와 학점 사이 picture from "Study Test Score Gains Don't Mean Cognitive Gains" 강사들의 방학은 성적 처리와 함께 시작된다. 학생들이 모두 골몰하며 보고서를 채우고 나면, 세상에서는 한낱 시급 노동자에 불과한 인문예술학부의 강사들도, 시급과는 무관하게 학생들의 여러 모로 고뇌에 찬 보고서를 마주하면서 인류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채점에 들어간다. 어떤 보고서는 있는 끼를 다 부려 스스로 사유하는 훈련을 상상력과 더불고, 또 어떤 보고서는 가장 모범적인 교과서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기본적인 사실에 충실하며, 또 어떤 보고서는 자기 앞에 던져진 여전히 낯선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이 특정 문제와 마주선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