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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얼마나 더 사랑을

 

 

송나라의 문장가 구양수가 이야기했다는 삼다 원칙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글쓰기의 기본이다. 과연 많이 읽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 공감하거나 비평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며 곧이어 스스로 쓰게 된다. 그러고 보면 저 삼다 원칙은 각각의 개별적인 행위를 분류하여 원칙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글 잘 쓰는 사람의 연속된 행위를 묘사해놓은 것 같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도 경험일진대, 많은 글을 읽는다면 그만큼 많은 삶을 자진하여 추경험하게 되는 셈이고,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러니까, 읽고 쓰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일이리라. 나갔다 돌아오면 이전과는 무언가 아주 조금이라도 깊어지거나 넓어지거나 달라져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나가보는 책이라는 바깥,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는 것일수록 노력을 요구한다. 만일 단어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단어가 쓰인 문장을, 문장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단을, 문단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책 전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책 전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책 안에서의 단어 하나하나의 쓰임새를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해석학에서는 이것을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신비롭게도 기적적으로(!) 책을 읽어낸다. 단어 하나하나와 책 전체가 맺는 연관을 어느 순간 깨닫는다. 그것은 통상 취미에 지배된다고 여겨지는 문학이나 예술, 혹은 외국어나 학문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한 지붕 아래 거주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타지역 출신의 이웃, 나아가 인간 일반의 이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또 우리가 마음에 두고 생각하는 사물이나 사태에 관해서도 그렇다.

 

우리는 대개 사랑과 호기심으로 그것을 해낸다. 남편이나 아내의 불변하는 습관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살아온 인생을 거듭 생각하고, 이웃의 음식 냄새나 음악 소리 너머 그들의 얼굴을 궁금해 하는 것, 모든 새로운 세계는 좋거나 싫기 이전에 우선 이상하게 여겨질지라도, 사랑은 그 이상하고 궁금한 것을 이해하도록 추동한다.

 

그러나 뉴스에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우회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하는 영화 장면에 대한 해석이나 국회에서 입법을 추진 중인 법안에 장안의 화제가 된 만화 제목을 다는 방식처럼 원전을 배신하는 명백한 오독과 마주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새로운 책은 노력하여 이해할 수 있으되, 중요한 국면마다 잘못된 인용과 명명으로 얼룩진 책은 호기심을 떨어뜨리고, 글쓴이에 대한 신뢰도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아무리 사지와 머리에서 인류애를 쥐어짜보아도 독해하기 여간 힘들지 않다. ()

<매경춘추> 2015.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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