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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왼손의 투쟁

시에 관해 생각하고 있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오르가즘에 대해 생각하느라 전혀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애정 행위와 비슷할 것이다. 시는 아마도 반쯤 무의식적이고 집중된 행동의 일환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처음 무엇인가 자기 속엣말을 순전히 자발적으로 백지에 적기 시작한 시점을 떠올려보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다. 속엣말은 흔히 (기억과 상상을 포함한) 생각이거나 느낌이거나 이 둘의 혼합일 터이고, 양 끝에 생각과 느낌이 있는 선분 위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스펙트럼의 어디쯤이 좋은지에 관해 쓴다는 것은 매우 곤란하고 불쾌한 일이다.

 

게다가 좋음이란 얼마나 애매한 말인가. 그것은 개인의 취향에만 국한되는 좋아하다의 명사형(‘좋아함’)이 아니라 객관적인 훌륭한 상태의 진선미가 통합된 어떤 이데아와 관련되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나는 절대시와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양한 시대와 지역에서 다른 버전으로 수정되고 변환되어 유통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절대시라는 이데아의 원본은 여러 다른 버전을 생산했다는 사실 이외의 별다른 실체적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 훌륭하지만, 그 사건적 돌출의 최초의 모습이 박제된 가상의 상태로 우리에게 주어질 리 만무하다. 그 최초가 신비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것은 유의미하다. 만일 그것이 스스로를 우리 앞에 느닷없이 드러낸다면, ‘단 한 편의 가장 위대한 시라 주장하는 그것은 유일신교 원리주의자들의 신처럼 모든 변화를 이단으로 간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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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것이 좋은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싸이와 블록버스터야말로 가장 좋은 예술이라고 말해야 한다. 물론 그보다는, 입맛이 잘 훈련된 사람의 혀끝에서 검증된 와인이 정말 좋은 와인이 아닐까요?”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흄도 이미 취미 기준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문학의 귀족성에 아련한 향수가 있는 나조차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선 다음과 같은 반문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상업주의가 불러온 자본주의 소비 대중 독재의 시대에 그 와인 감별사가 주류 회사의 로비를 받지 않았다고 당신은 어떻게 확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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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나로서는 속엣말을 쓸 때 한 가지 원칙을 생각하고 있다; 너무 멋지게 쓰려고 노력하지 말 것.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한 것의 대부분이 너무 멋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멋졌던 것 같다. 이것은, 아닌데 기라고 얘기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꾸미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쉬운 선택지를 확신해버리지 않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김수영이 이야기한 시인의 양심이나 정직성 같은 단어들을 나는 이런 방향으로 해석한다. 이 원칙의 반대편에는 감상적인 나르시시즘과 객기, 수사로 승부를 보려는 흑심, 지나친 위선과 위악, 따라서 온갖 종류의 ‘-들이 있다.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이 대표적인 ‘3대 척인데 이런 들은 자기를 포함한 세상 전체를 모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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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방법적으로 채용하는 재기 넘치는 글들에 대해서는, 그러나, 솟아나는 애정을 숨기기 힘들다. ‘방법적인 들은 ‘-이 뭔지 알면서, 알고 미워하면서 그 연기를 실제로 감행하기 때문이다. 물론 방법적인 척인 척처럼 교활한 ‘-도 있다. 그런 글이나 사람이나 사건을 대하고 나면, 오랜 세월을 견딘 좋은 고전들을 비누 삼아 눈, , , 입 및 온몸을 박박 문질러 세척해야 한다. (어라? 나는 방금 무의식적으로 좋은고전들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을 좋아하는이라고 수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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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앞으로 올 좋은 시에 관해서 나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미래의 소관이며, 시가 언제나 하나의 돌출적인 사건이고, 따라서 시의 효과가, 그러므로 여하한 방식으로 시에 관해 논한다는 것이 언제나 사후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좋은 시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월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좋아해온시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텍스트와의, 개인들 간의, 세계와의) 관계 속에 있고, 우리가 충분히 자기 자신인 것은 언제나 이 관계 안에서 언제나 지속적으로 (아주 천천히라고 할지라도)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사실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으면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으로 자신을 연명해야 하는 끔찍한 자아의 내용 없는 단단함을 옹호하는 (척 하는) 유아론자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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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로티는 생각하는 단단한 자아에 대한 반대 입장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켜 자아란, 문화의 코일에 불과하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 스물두 살에 이런 입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나는 이 말이 두려워 나의 변하지 않는 자아더 잘방어하기 위해 그의 책들을 읽은 적이 있다. 결국 이 독서는 결과적으로 나를 설득하는 과정이 되고 말았다. 나는 본질이나 선험’, ‘고정 불변하는 자아’, ‘실체같은 단어들을 조심스럽게 회의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잠정적이라든가 당분간같은 어휘를 쓰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개량주의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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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오랜 습작 기간 동안 시를 쓰면서 내 손이나 몸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학교에서는 온갖 정초주의적인 이론들을 습득하고 있었던 머리로 하여금 인정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도 같다. 그것은 키르케고르의 왼손과 오른손처럼키르케고르는 온갖 회의적이고 미학적이며 유한자로서의 감각과 사유를 담은 책들과,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며 이론적인 저작을 구분하여 왼손 저작오른손 저작으로 이원화했다자기의 분열을 끝까지 벌린 다음, 그 분열에 눈 감지 않고도 양손의 서로 다른 기능을 허용하는 흔치 않은 훌륭함의 실오라기를 발견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어떤 이들은 키르케고르의 왼손 저작이 거대한 농담이므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 것을 조심스레 제안하는데, 그건 그가 은밀하게 오른손잡이임을 고백하는 언명이 아닐 수 없다. 하여간 키르케고르의 이원화 작업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다르게 하기라고 하자. 이를테면 미국에서 태어나 트로츠키주의자인 부모 아래에서 야생 난에 대해 오타쿠에 가까운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언어철학자 로티가 트로츠키와 야생 난을 결합하려고 수십 년간 용을 쓰다가 마침내 자기 이름 옆의 괄호 안에서 철학자라는 말을 지워주기를 요청했을 때, 그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터, 그의 용기 덕분에 나는 트로츠키와 야생 난을 종합하려는 지나친 정합성에의 요구를 의심할 수 있는 행운을 때맞춰 얻었던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이를테면 롤리타독일 이데올로기, 메탈리카 4집 앨범과 예수의 종합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포기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롤리타와 메탈리카, 독일 이데올로기와 예수의 화해도 만만찮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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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경험의 절대량을 요구한다. 가령 시가 폭죽처럼, 얻어맞는 자의 신음처럼 마구 터져 나오던 80년대의 시인들이 90년대 이후 겪어온 변화는 이런 용기를 요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용기는 통증의 절대적인 경험이 구성해온 자신의 단단함에 비례하는 어마어마한 무게를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어느 날 문청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한 91년에 내가 닳도록 읽고 있었던 김정환의 85년 시집 좋은 꽃의 마지막에 수록된 맹서의 후반부와, 92년 출간 당시에 읽은 시집 희망의 나이의 서시인 첫눈의 도입부 사이의, (이해했다고 생각한) 어마어마한 상실감을 나는 20년쯤 흐른 후에야 실제로 체감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피투성이 희망이

피투성인 채로 나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잠깨어 돌아가자

잠깨어 돌아가자

안되면 몸이라도 팔자 걸음이라도

되자

절망은 아무 변명도 되지 못한다

--맹서후반부

 

처음 보았다

시청 분수대 위로 파란만장하게

눈이 내린다 누더기

소련연방이 해체된다 프라자호텔 위로

낭자한 것이 치솟는다 찬란하게

외투자락이 흩날린다 얼굴에

와 닿지 않고 몇십년 흔들리는 눈이

내리지 않고 허공에 외친다 오 나는

붙들 것이 현실밖에 없다

--첫눈도입부

 

맹서좋은 꽃에 수록된 시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시는 아니지만, “안되면 몸이라도 팔자 걸음이라도/되자3중 의미--‘몸이라도 팔자/거름이라도 되자’, ‘몸이라도, 팔자 걸음이라도 되자’, ‘몸이라도 팔자, 걸음이라도 되자’--로 계속 읽다 보면 이 운산의 열도가 절망은 아무 변명도 되지 못한다라는 필연적 귀결에 필요한 연료임이 너무나 분명해서 머리에 펄펄 열이 나게 만들었는데, 몇 년 후 시청 분수대 위로 내리는 눈을 보면서 해체되는 누더기 소련연방을 생각하는 시인의 비참은 또 어찌나 열렬했는지, 의도적 행갈이가 감각적 현실과 해체되는 신화를 연관 짓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터뜨릴 자기 울음소리가 무서워 장전된 눈물의 총신을 자기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만지작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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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대안이라는 신화가 해체된 후에 붙들 수밖에 없었던 현실, 그러니까, “하드록을 하면서 사회주의를 논하는 그에게/가난한 운동가요로 그냥 밀려온/나는 무엇으로 선배인가”(후배, 희망의 나이)라는 자문의 형태로 왔다고 해도 좋을까. 나는 왜 좋은 시에 관해 써야 할 지면에 80년대 시에 대한 만가(輓歌)를 쓰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무한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유한자로서의 현실을 등한시하거나 일시적인 쾌락에 사로잡혀 영원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변화에 열려 있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에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에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는 일이란 이제까지 사회가 나에게 가르쳐준 언어가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이라는 것, 내가 상상도 못했던 어떤 일이 이 세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며 그것이 나의 눈앞에 닥칠 사태를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을 나의 오른손과 왼손의 화해와 투쟁을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선배들의 시를 통해 배운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 때때로 나는 이 바깥(그게 소련연방이건, 율도국이건, 에덴동산이건 간에)이라는 가정이 있었던 시절의 윤리적 뚝심과 거기서 오는 감동과 초월적 보편자에 대한 믿음을 한없이 그리워하면서 고문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니까 아직 왼손이 오른손에 대해 가진 연민과 염오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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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 짧은 지면 안에 저간의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경험들을 총괄하여 내가 좋아해온 시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나는 이 이야기의 본론을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윤리적으로도 선하고 인식론적으로도 올바르며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좋은 시는커녕 좋아해온 시에 관해서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뻔뻔하게 쓸 수가 없다. 적중되기 싫은 것이다. 적중되면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것이다. 적중될 리 없는 것이다. ‘보여줄 수만 있는 것말하려고하니 거짓과 허위가 되어버린다. 거짓말이다. 여기에 쓴 것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하지만 그 입장이 오른손의 것인지 왼손의 것인지는 적시하지 않겠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오른손의 협잡이 있었다는 사실은 괄호 속에 넣고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다.)(2013-06-24)

(<현대시> 201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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