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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퇴고는 많이 할수록 좋은가; 악마와 함께 하는 항해

 

처음에 그것은 글이 아니었다. 글이 아닐뿐더러, 말조차도 아니었다. 처음 당신이,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펜을 쥐고 백지 위에 첫 음절을 적어나가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손에 잡힐 수 없는, 파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의 가슴 한가운데를 툭 치고 지나간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붙잡기 위해, 그 말로는 할 수 없는 어떤 감정과 정서, 생각의 모호한 덩어리의 뒷덜미를 낚아채 당신 곁에 잠시 머물게 하려고 당신이 당신도 모르게 결심했을 때, 당신의 존재가 좀 더 현실적으로 그럴 듯하고 꽤 쓸모 있는 사람 구실을 하도록 하는 여러 유용한 제안들을 뿌리치고 용처와 가치를 알 수 없는 불면의 수고를 자처했을 때, 당신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어떤 항해에 자기의 존재를 맡긴 셈이다.

 

처음 항해를 마치고 당도한 그곳에서 당신은 당황한다. 생각보다 멀리 떠내려 온 것 같지는 않지만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는 좀 멀리 온 것 같다. 당신은 좋거나 싫다고 말하기도 힘든 상태다. 단지 매우 지쳐 있으며 이전의 당신과 약간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다. 처음 경험하는 것은 그 이전의 어떤 판단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폭력적인 인상마저 남긴다. 나를 훑고 지나간 이 광풍은 무엇인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내가 원하던 방향이었는가. 원하는 방향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었는가. 당신이 운항해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저 수면 위에 남아 있는 물거품의 궤적은 괴이하고 불친절하며 종종 당신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당신은 이내 그 궤적으로부터 어떤 예지나 의미망, 언젠가 꾸었던 꿈의 희미한 그림자를 발견한다. 당신은 어떤 집중된 정서에 의해 알지 못하는 바다를 향해 나아갔고, 거기에는 절반의 기대와 절반의 불안 이상의 것이 있었으며, 그것은 거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술에 취하거나 약으로 몽롱한 상태는 분명 아니었으며, 그러므로, 말하자면, 당신은 자유로웠고, 이 항해에서 분명 내내 펜을 놓지 않음으로써 키를 쥐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당신 자신이었으며, 또한 분명한 이유를 댈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렸다는 점에서, 동시에 부자유스러웠고, 불가피한 구속 상태에 있었다. 문법, 문장의 원리, 당신이 즐겨 사용하는 조어법, 당신이 자주 노출되어 있었던, 당신을 매혹시켰던 단어와 어조들이 행사한 구속 상태에. 그리고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의 가슴을 훅 스치고 지나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어떤 분위기와 정서, 가슴 밑바닥에서 순간 뚫고 올라온, 자기도 몰랐던 자기의 감정의 거역할 수 없는 구속 상태에. 다시 말해 당신은,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신들려 있었던 것이다.

 

신들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신들리게 하는 시점부터 그는 영매가 된다. 그건 너무 낭만주의적인 문학관이 아니냐고 매도하기는 쉽지만, 아무리 논리적이고 냉정하고 고요한 시를 쓰더라도 최초의 악마적인 충동에서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노동이나 요령이 된다는 것에 반대될 증거를 찾기 어렵다. 악마를 더 잘 부르기 위해 연습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또 불필요한 수고를 덜기 위해 요령 있게 펜을 놀릴 줄 알게 된다면 행운이지만, 다른 종류의 노동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시를 일하듯이 쓰거나 그럴 듯하고 멋지게 보이기 위해 여러 가지 잔재주를 외는 것은 아무래도 좀 바보 같은 짓이다. 신들린 자들은 열등감이나 편의성이 정신의 고양이나 영혼의 배려나 제 주변과의 상통이나 제 안의 시적인 부분의 성장 같은 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또 이제까지 세계를 규율해온 많은 지리멸렬하고 지루하고 낡아빠진 ‘죽은 은유(cliche)’의 가장 가까운 벗이라는 것을 안다. 허세나 매너리즘이 이들의 다른 이름이다.

 

항해가 끝난 그 시점부터 퇴고는 시작된다. 좀 더 항해에 능란해진 어떤 이들은 키를 쥔 순간부터 조심스럽게 항해하기 시작해 자신이 원하는 지점과 방향을 설정하고 별자리와 망원경과 컴퍼스를 운용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초고를 퇴고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항해해본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모험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고, 나는 아무리 능란해지더라도 이런 모험심이 결코 사라지지 말아야 한다고 여전히 믿는다. 악마에게 사로잡힌 그 시점, 맨 정신에 경험하는 광기의 희열에 온전히 자신을 내놓지 않는 자는 자기의 지나치게 말짱한 정신으로부터 절대 탈옥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그 모험이 끝나고 난 뒤에 당신 자신이 한 번 신나게 굿하는 것으로 끝이라면, 당신은 당신만 있는 무인도에서 온종일 꿈만 꾸어도 된다. 다른 이들마저 신들리게 하는 영매는 자기의 임사(臨死) 체험을 세밀화하고 정교하게 만드는 데에 공을 들이게 된다. 그러나 얼마나?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시인들은 언제나 두 가지 걱정에 시달린다. 어떻게 하면 꼭꼭 숨을 수 있을까. (나의 비밀을 덥석 내놓아 말의 가치가 폭락하는 인플레를 목격하게 될까봐. 그리하여 비밀 없는 자기 자신과 작품의 공허를 들여다보게 될까봐.) 하지만, 어떻게 하면 머리카락이 보이게 숨을 수 있을까.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읽어도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고 추측마저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보이저 1호에 실린 금으로 만든 음반에 수록된 바흐의 음악처럼 연주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연주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지구 바깥에서는 그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이 두 개의 고민이 당신의 모험이 끝나는 그 시점부터 당신의 양 팔을 반대쪽에서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됐어’라는 생각을 쉽게 해선 안 된다. 그러나 퇴고를 거듭한 끝에 ‘이 정도면 됐어’라는 생각이 든다면, 딱 한 번만 더 고치고 더는 들여다보지 말자. 너무 많이 고치면 당신의 모험은 점점 거짓말에 가까워질 것이다. 당신이 100% 당신의 작품을 장악하고 명명백백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분석 가능한 꿈만 꾼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억하라. 매일 밤 당신이 아는 것만 꿈꾸게 된다면 당신은 ‘죽은 은유’가 된 것이다. 당신은 최초에 당신이 행한 모험에 당신 속의 악마가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나 악마 둘 중의 하나에게 퇴고의 완성을 내어주면, 당신은 낱낱이 설명되는 노동이나 요령으로 거짓말의 시를 쓰거나 혼자 굿하고 온갖 과도함에 빠져 남들은 다 아는데 자기만 모르는 언어의 인플레이션 상태를 유발하게 된다. (이 글은 얼마만큼의 퇴고를 거쳤는가? 그것은 내 수호 악마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끝) (201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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