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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무(無)의 두드러기에 대한 명상



처음 시를 썼던 때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것은 1987년 6월의 어느 날이었고,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작은 치자 화분에 깔린 이끼 위를 기어다니던 민달팽이를 꼼짝없이 한 시간쯤 들여다본 후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 단순한 생물은 그토록 느린 속도로 젖은 이끼 위를 돌아다니며 화분을 빠져나갈 생각 같은 것은 하고 있지 않았다. 집이 없구나, 너도. 이렇게 혼자인데 말이지. 연무가 깔린 뿌연 대기는 온화하고, 오후 네 시의 햇빛은 알맞게 익어 평온이랄지 나른함이랄지 느리게 유동하는 어떤 집중된 정서가 나를 일종의 명상 상태로 몰아넣었다.

어린아이들이 종종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이때를 생각한다. 그럴 때 아이들은 온몸으로 명상 중이다. 살갗에 열려 있는 모든 땀구멍으로 들어오는 익숙하고도 알 수 없는 어떤 냄새와 상종하는 중이다. 그러다간 갑자기 뱃속에서 나비 떼가 마구 날아오르는 것이다.

나는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 침대에 엎드려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것들을 연습장에 적기 시작했다. 이 텅 빈 하얀 종이, 이걸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어! 긁으면 긁을수록 가려운 두드러기처럼 끊임없이 적지 않고는. 88올림픽을 위해 시범적으로 써머타임제가 시행 중이었고, 그래서 해가 무지하게 늘어나 있었으므로, 태양의 조도가 아주 천천히 낮아졌다. 어스름, 그 어스름의 여러 밝기를 기억한다. 연필로 쓰고 있는 내 글씨가 주변 어둠의 밀도와 뒤섞일 때까지 나는 가려운 종이를 긁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각조각의 글들은 이상하게도 각각 다른 목소리로 쓰여 있었다. 어떤 것은 운문이고 어떤 것은 산문이었으며, 어떤 것은 “숲으로 가야 한다”로 시작하는 전원시 모양을 흉내내고 있었고, 어떤 것은 “여우와 갈매기”라는, 우화시라고 주장하고 싶은 어떤 것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나에게 이전에는 전혀 맛본 적이 없는 강렬한 오락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의 글쓰기 스승은 누구일까. 민달팽이인가, 6월의 온도와 습도인가, 그도 아니면 호르몬의 부기우기인가.

아니, 그 전에 나는 껌 종이에 인쇄돼 있던 시들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것을 언제나 베껴 써두던 것을 생각한다. 거기에서 나는 헤세가 쓴 이별에 관한 훌륭한 시를 읽었더랬다. 껌 종이에마저 시가 쓰여 있던 80년대의 유년을 생각하면, 등화관제처럼 사방의 불빛이 꺼지고 검은 밤하늘에 돌연, 수없이 빛나던 별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 촌스럽고 어이없는 국가주의와 반공의 시절은 나에게 예상 밖에 명상의 시간을 시도 때도 없이 제공했음이 틀림없다. 민방위 훈련 중에는 책상 밑에서, 애국조례 시간엔 앞에 선 아이의 뒤통수를 보면서, 국기에 대한 경례 때는 가슴에 손을 얹고, 오후 다섯 시엔 애국가를 들으면서 나는 실컷 ‘멍때리고’ 쓸데없는 명상에 몰두했다. 아마 얌전히 앉아 노련하게 딴생각하는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아니, 그보다도 더 전에 어린 나의 감수성을 어이없이 강화시킨 것은 학교 앞 문방구에 파는 시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질 나쁜 공책 표지에 쓰여 있던 아폴리네르와 푸쉬킨과 박인환. 지금 생각해보면 대개 비극적이거나 감상 일색이었지만 저질 번역이나 오기(誤記)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시의 시대의 강력한 기후 형성과 관련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튼 그때의 아이들은 모두 시가 적힌 책받침이나 연습장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던 84년의 책받침은 한 쪽에는 브라우닝의 「봄날 아침」이, 다른 한 쪽에는 하이네의 「어느 곳에」가 적혀 있었다. 아빠와 둘이 살았고, 대부분 혼자 있었다. 「봄날 아침」을 읽으며 소나기가 맑게 갠 아침, 셋방 창문을 열고 주인집 돌배나무의 어린 돌배에 맺힌 물방울에 햇빛이 마구 떨어지며 내 두 눈을 때리던 것을 기억하면, 가난하던 시절이 낙원처럼 느껴진다. 그 싱그러운 브라우닝의 뒷면에 나그네의 고독과 죽음을 노래한 하이네가 박혀 있었던 건 반공교육이 감수성을 키운 건만큼 아이러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모르는 거지여인이 모르는 거지아이를 때 묻은 포대기에 업고 문 열린 우리 집 방안에 앉아 우리 집 밥상에 우리 집 밥을 퍼서 내 숟가락으로 먹고는 고맙단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지기도 하던 그런 시절. 하이네의 「어느 곳에」를 달달 외었고, 그 마지막 연을 나는 정말로 사랑했다. “어디라 할지라도 다를 것은 없다. / 하늘은 어디나 꼭 같은 것을. / 밤이 되면 죽음의 등불 / 별은 나를 비추리라.” 어째서 이런 불길한 시를 읽으며 거의 항상 위안을 받았는지 모른다. 겨울밤이면 별 대신 쥐들이 천장을 뛰어다니거나 방에 몰래 들어오고, 천장에서 가끔 바퀴가 얼굴에 떨어지고, 때문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던 시절. 그러니 나의 글쓰기 스승은 껌 종이인가, 반공 이데올로기인가, 책받침인가, 비 그친 돌배나무에 휘황하게 빛나던 가난한 햇살인가, 하이네인가.

아니, 아니,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전에 나는 엄마가 할부로 사주었던 문학전집을 기억한다. 보물섬과 우주전쟁으로 시작해서 말하는 떡갈나무와 가르강튀아, 스물 두 개의 눈동자와 아Q정전, 기암성과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지나 메트로폴리스로 끝나는 이 곶감창고에서 나는 언제나 1권부터 30권까지 차례로 곶감을 빼 먹었다. 다 먹고 나도 없어지지 않는 신나고 슬프고 우습고 흥미진진한 곶감들은 차례로 다시 빼 먹어도 전혀 물리지 않았다. 책에 재미 들린 나는 중간 중간 아빠의 책장을 뒤졌고,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슬프고 고통스러우면서 어딘가 아름답고 두근거리는 엄마 아빠의 일기를 훔쳐보았다. 나의 문학의 스승은 금성사 컬러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인가, 엄마 아빠의 일기장인가.

어쩌면 78년과 79년, 엄마가 설거지 때마다 틀어놓았던 산울림과 조용필, 사이먼앤가펑클과 이글스였을까. 밤의 조용한 어둠 속 창밖에서 새어들어오던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혹은 벽에 걸린 나무 십자가 위에서 빛나고 있던 형광 예수의 고요히 떨구어진 고개, 그도 아니라면,

나는 웅성거리는 고요와 나른한 유동 상태 속에 나를 거꾸로 띄워두던 엄마 뱃속의 심해를 지나 내가 존재하기 시작하기 전 아주 단순한 입자였던 때를, 아주 먼 옛날 아차, 이제 막 진흙더미에 깔린 시조새의 이빨이나 발톱을 기억해내야 할지도 모르고, 혹은 처음 시를 쓰던 순간에서 거슬러 올라갈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까지 이르는 반대 방향의 길을 짚어봐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도, 뒤에도, 끝에는 넘치는 무한한 침묵, 창세기 앞장과 계시록 뒷장처럼 하얀 백지가 놓여 있다. 무한인지 0인지 알 수 없는 그 침묵에 열광하지 않았더라면, 넘치도록 충분한 고독 속에서 내가 무언가 다른 것으로 있으면서 나의 지워짐을 상상할 수 없었더라면,

나는 쓸데없는 것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라고, 써본다. 불편할 자유 같은 것은 요구하지 않았을 거라고. 정말일까?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아니, 아니, 아니, 나는 이 장면들을 모두 찢고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저의 글쓰기의 스승은 우연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기꾼입니다요, 제가 민달팽이를 바라보다가 쓰러져 잠드는 대신 연필을 들었던 건 베개보다 연필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죠.

아니, 아니다. 증명할 수 없다. 어째서 갑자기 닿지 않는 뱃속이 가려웠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열광하는 데서 시작했다고밖에는. 그래, 그 침묵 속에 무언가가 가득 고였었다고밖에는. 그게 무슨 짓이었는지 전혀 몰랐다고밖에는. 나는 그것을 여전히 알 듯 모를 듯 하고, 그러나 여전히 느낀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된다. 그러나 느끼지 않는다면, 쓰지 않는 삶도 괜찮을 것이다.

<대산문화> 2011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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