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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저 가늘게 뜬 눈의 황홀


잘 익은 살구 알처럼 눈높이에 떠 있었던 저물녘의 태양은, 터뜨리면 흘러나올 듯한 무게감을 늘어뜨리며 천천히 마천루 뒤로 사라져갔다. 그 광경을 함께 보면서,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석양을 본 지 만 33년 하고도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내 눈꺼풀 속에서 보고 있는 이것은, 2년 하고도 절반이 지난, 마지막 석양의 꿈. 오래된 어제의 석양이지만, 어제의 석양도, 내일의 석양도, 내게는 매양 오늘의 석양만 같다. 해가 나지 않는 흐린 날이나 지난여름처럼 내내 비가 퍼붓던 계절에도, 어제의 석양이나, 내일의 석양이나, 내게는 매양 오늘의 석양만 같아서, 두 눈 속 저녁의 노을빛은 어떤 떠남을 암시한다. 떠남의 가장 떠남다운, 모든 떠남의 궁극적인 떠남을.
 

처음 석양의 꿈을 꾼 것이 언제였더라?

대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사방에 주황색 크레인과 불도저, 포클레인이 우뚝 우뚝 멈춰서 있는 지평선 위로 느릿느릿 지는 붉은 해를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고, 홀가분했고, 황홀했고, 종내, 쓸쓸해지고 말았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면 또래의 흑인 아이가, 지는 햇빛에 눈을 빛내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꺅꺅 웃으며 사막을 내달렸지. “저기까지!”,라고 지평선에 몸을 반쯤 담근 해를 가리키면서. 그러니까, 꿈을 꾸기 며칠 전, 나는 흑백 TV로 주말 영화 예고편을 보았더랬고, 제목은 <흑과 백>. 짧게 머물렀던 고향, 개발 중인 공업도시의 풍경과, 서로가 서로를 그림자처럼 달고 늪을 헤매며 콘트라스트로 움직이던 두 개의 윤곽이 이런 꿈을 만들었던가.

이후 약 30년 남짓, 한 해에 적어도 한 번, 나는 해지는 사막의 꿈을 꾸었고, 취학 전 장래희망은 중장비 기사였다. 어떤 날에는 선인장이 몇 개 사막에 떠 있었고, 또 어떤 날에는 저 멀리 외딴 집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언제나 석양의 붉은 빛이 가득 찬 지평선이 편편히 깔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울고 싶은 붉은 눈두덩 같기도, 대장장이가 담금질 중인 달아오른 쇳덩이 같기도 했고, 사방 아무 곳에도 벽이 없는 지독한 홀로 있음이 주는 해방감은 언제나 비장한 광희의 빛을 띠고 있었다. 빛 덩어리가 핏덩이로 변하는 영원한 찰나에 시간은 멈추고, 흑백 TV의 <흑과 백> 예고편이 예고한, 나의 그림자 같은 검둥이 형제와 달리거나 멈춰선 채, 주황색 크레인과 불도저와 포클레인, 그 거대한 비인간적인 힘의, 비석처럼 숭고한 정지 상태와, 이상하리마치 검은 커다란 그림자들을 애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꿈은 내게서 떠나버렸다. 변경하는 풍경의 여러 판본들이, 이렇게 생생하게 눈 속에 화인(火印)처럼 찍혀 있는데.

그러다간 이렇게 어느 날, 꿈속에서라도 유일한 벗의 이름을 30년 가까이 묻지 않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만나 어쩌다가 헤어져버렸는지 모르는 어린 시절 친구들처럼(아마 우리는 언제나처럼 어느 해질 무렵에 헤어졌을 테지), 재개발 후 사라져버린 추억이 묻은 집터들처럼(오, 그것을 미래의 당신들은 하나라도 발굴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끝내 마음을 가늠하지 못하고 요절한 첫사랑처럼(거기는 집보다 평온한가요, 나는 그 뒤로 해 저무는 사막의 꿈을 꾸기를 멈추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 너는. 언제나 나의 대척점에 있었던, 너는. 추상이 되기 직전의, 너는. 이니셜을 바꿔가며 보내지 못할 편지들을 써넣던 오랜 나의 사막 같은 황홀한 고립의 일기장이여. 꿈밖에서 신경쇠약에 시달릴 때마다 나를 위로하던 명랑한 검은 고독이여.

모든 떠남은 죽음의 연습.

그러니 어제의 석양도, 내일의 석양도, 내게는 매양 오늘의 죽음의 연습, 생의 가장 뚜렷한 음화(陰畵)이리라. 그러니 나로서는 아침놀의 야릇한 신생의 부조리로는 그 황홀을 설명할 길을 끝내 찾을 수 없다.

그러다 나는 뜬금없이 석양의 가늘게 뜬 눈 속에서 저, 언제까지나 홀로 완벽하다는 오래된 소문의 고독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소문에 갇힌 자는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오른쪽과 왼쪽에 아들과 영혼을 앉혀두고도. 나는 이 고독을 유일한 그의 결핍의 표지로 달아주고만 싶고, 그렇지 않다면 그의 무정함으로 인하여, 그에게 기도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저 가늘게 뜬 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금과 피의 색채를, 다 아는 자의 운명, 다 느끼는 자의 운명, 유일하게 영원한 자의 고독으로부터 오는 슬픔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또한, 그의 가늘게 뜬 눈의 고독을 응시하는 또 다른 가늘게 뜬 눈의 고독에 관해 생각한다. 지는 해를 바라볼 때마다 그 숭고한 비애에 눈을 가늘게 뜨는 당신은 아마도, 잘 알려진 예의 그 사내가 짓던 복잡한 눈빛을 닮았으리라. 누구나 석양을 바라볼 때엔 가늘게 눈을 뜨고 그 속에 빛이 흘리는 피를 가득 담는 것이다, 쏟아질 듯이 빛나는 것이다. 황혼 속에서 당신은 언제나 온전히 당신 혼자이며, 가장 혼자이며, 진짜 당신이다.

그러니까, 그 사내가 달렸던 형틀이 어느 방위를 향하고 있었더라?

천둥 번개를 동반한 경전의 증언과 상관없이 나는, 그가 고개를 늘어뜨리고 석양의 마지막 빛을 눈에 담았으리라 상상해 본다. 완만한 굴곡의 S자로 그의 몸을 뒤튼 고통 속에서, 그가 보았던 수많은 석양들의 맨 마지막 석양을. 그가 연습했던 모든 떠남의 가장 마지막 떠남을. 그날, 비석처럼 정지해 있던 몇 개의 십자 형틀과 그 침묵 속에서 가늘게 뜬 눈을. 그 눈이 아주 감기기 전까지 붉은 울음처럼 충혈된 서녘 하늘을 보며 그가 진실로 마음에 품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사도의 복음도 전해주지 않았다. 그가 하지 않은 말들, 그의 가장 사적(私的)인 말들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 알려지지 말아야 했을 것이다. 사적인 발언들이 바람직한 균열의 증언으로 간주되기에 이른, 신의 죽음이 공공연히 표명된 근대를 그는 살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어쩐지, 그의 공적인 발언들의 자애로운 방식이 그의 시적인 심성을 추측하게 한다. 그가 여러 번 울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나 아버지를 부르며 울던 남자. 목수의 호적에 올랐으나 지상에 아비가 없었던 남자. 서른세 살에 마지막 황혼을 본 남자. 사흘 후 그의 시신이 사라지기까지, 동굴 속에서 그의 심장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채로,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은 마지막 힘을 다해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자라난 나의 머리카락들을 그에게 바친다.

거기에 석양의 향기가 어리어다오.

어제의 석양도, 내일의 석양도, 매양 오늘의 석양과 같고, 그럴지라도,

매번 오늘의 석양만이 가장 깊은 향기를 내뿜는다.

- <GQ>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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