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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범, 교환일기 교환일기 한재범 모두가 이 이야기를 안다 이른 새벽마다 매일 교실 문을 열던 선배가 겪은 일 평소처럼 커튼을 열었는데 창가에서 유령이 나왔다는 이야기 유령의 발처럼 가벼운 이야기를 아이들은 좋아하지 그 선배 같은 아이는 해마다 반에 한 명씩 있으니까 커튼을 열면 유령이 나올까 그런 기대감에 매일 새벽 등교를 했는데 어느 날은 네가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어두운 교실에 들어와 커튼을 연 후에야 너를 발견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엎드려 있던 너를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는 없어 네 옆에 놓인 작은 노트를 펼쳤다 “아래층 할머니 잘 살아있을까 언젠가부터 아무리 뛰어다녀도 시끄럽다고 올라오질 않았지 이젠 뛸 사람도 없을 텐데 엄마는 아직도 베란다에서 나무를 기를까 동생은 여전히 몰래 베란다에서 담배를 필까 모두 다..
강정 시집, <백치의 산수>, 민음사, 2016 백치의 산수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보니 이 집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괜히 문밖으로 나가 노크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 개수를 확인한다검은색과 푸른색 신발이 있고흰 신발이 하나 구겨져 있다 흰 신을 신고 잠깐 나갔다가돌아오자마자 검은 신발로 갈아 신는다 흰 신을 신은 자는 밖에 있는데, 흰 신이 말하려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나를 올려다본다 푸른색 신발 위엔 지난봄의 나비가 어른거린다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문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선회하는 나비의 기침소리 공책을 펼쳐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 본다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다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온다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신는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거나물속에서 기어나..
사후의 사후를 사는 냉담자의 멜랑콜리, 혹은 신성성의 재상상: 송승언의 시 돌의 감정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의 윤리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문득, ‘나는 돌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상상이야말로 가능한 상상과 불가능한 상상의 접점에 서는 첫 경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철학자는 근대 초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아직 매일 햇볕을 받으며 물속에 잠긴 돌 위를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강변을 산책하는 일에 익숙했고, 콘스탄틴주의와 유대교의 강력한 신 개념과 그 이름을 통한 현실적 지배 속에서 살았지만, 이상하게도 경전의 글자들에 얽매여 있지 않았던 듯 보이는 데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자기 민족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자기의 국가 종교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더욱 더 이상한 것은, 그가 지극히 종교적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는 범신론적이고도 유물론적으로 자연과 우리의 물리..
누구나 알고 지내는 파르티잔 하나쯤은 있는 거 아니에요? 고등학교 동창들을 서울에서 만나면 서효인 아마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러하지 않겠지만우리는 강남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사투리를 썼지조금은 불편해지려고 했다 너희가 사투리로자의식을 확인하는 자들이여 절대로 잊지 못하는사투리여 왕따의 기억처럼 죽이고 죽여도되살아나는 빌어먹을 사투리여염병할 뉘앙스여 괘씸한 톤이여 공동체여너나없이 쓸데없이 맥락 없이 욕을 뱉고 술잔은이리저리 세상 바쁘고 이것이 몇 년 만일까아마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러했겠지 예전에착한 학생이었고 놀 때는 놀았고 의리도 있었지만지금은 강남대로에서 택시 하나 못 잡는다이왕 모였으니 좋은 데를 갈까 하는 녀석은 여기 또 있고미안하지만 부끄럽다 죄송하지만 기억이 안 나요 반말이어색하요 하지만 사투리는 편하지 감각에 우정을 맡기고기억을 추렴해 보지만 사투리..
격월간 시사사, 통권 84, 2016년 9-10월호 내 인생의 책 이장욱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누가 선물했는지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살아갔다.일을 했다.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 당신이 뜻하는 바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지옥이라고 불렀다. 수만 명이 겹쳐 써서 새까만 표지 같은 것을 당신이라고당신의 표정당신의 농담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한 꿈을 지나서 페이지를 열 때마다 닫히는 것이 있었다. 어떤 문장에서도 꺼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
모순에 대한 중단 없는 사랑을 위하여 나는 오랫동안 하이데거와 첼란을 둘러싼 몇 개의 장면들을 하나의 유비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내가 이 일화들에 흥미를 느낀 것은 제도적 절차를 통해 ‘시인’이나 ‘평론가’가 되기 전이었다. 그때 나는 하이데거와 첼란을, 시를 사랑하는 사람과 시를 쓰는 사람,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과 아름다운 사람, 이를테면 나보코프의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 혹은 토마스 만의 구스타프 아셴바흐와 폴란드 소년의 관계와 같이 생각했다. 롤리타는, 폴란드 소년은, 험버트와 아셴바흐를 얼마나 절망에 빠뜨렸나! 하이데거는 횔덜린과 릴케와 첼란을 읽을 때마다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 단지 시를 사랑할 뿐이라는 확인에 얼마나 비참했나! 얼마나 시인이 되고 싶었나! 시가 ‘명명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철학사 전체를 자신..
시와 세계, 2016, 봄. 사람 그리는 노래 송승언 정원으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에는신도들이 늘어서 있고 신앙심을 시험하려는 듯이줄줄이 대기열을 만들고 혀를 내밀고 있다혀끝에서 신속히 흩어지는 것없었던 듯 새겨지는 것그것을 위해 나는 항상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낯가죽을 새롭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혀를 내밀며 드는 생각은 이것나는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여러 갈래의 길로 이어지는 정원에 서서향나무의 뒤틀림에 경탄했다저렇게 뒤틀릴 수만 있다면 개발 중인 신도 두렵지 않을 텐데비늘조각이 육질화 된 향나무를 보며향나무 좋지...나도 좋아해말씀하시던 신부님은 맥주 마시러 갔고 나는 이제 내 팔다리의 멀쩡함을 입증하기 위해뇌에 대 타격을 입은 사람의 말을 빌려 쓴다탁구 하던 사람술집 하다가 망한 그 사람 종이 울리면 슬프지는 않았다..
김정환, 좋은 꽃 이즈음 강의에서 황지우를 다루면서 김정환 시 생각이 많이 났더랬는데 나는 아무래도 10대 후반에 읽었던 시의 자장이 형성해놓은 80년대식 세계관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자꾸 고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30대 초반까지는 이것 때문에 80년대 시인들을 혼자 속으로 많이 원망도 했던 기억이 난다. (장정일이 서울에서 보낸 3주일에 해설 대신 80년대 시인들을 욕해놓은 것을 나는 백번 이해한다. 물론 격변하는 한국 현대 정치사 안에서 보자면 그도 나보다는 훨씬 앞 세대 사람인 것이 분명하지만, 저 충혈된 80년대의 격정이 미필적 고의로 감염시켜버린 '희생자'들은 자기 세대의 변방으로 밀려나 그 운명을 끝끝내 살아내야 하는 것이니까.) 아무튼 황지우를 읽으면서 자꾸만 김정환이 그리워 오랜만에 좋은 꽃을 꺼내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