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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자라의 짓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을 오늘 문득 떠올리다가 이 속담의 주인공에게 자라가 무슨 짓을 했는지 종일 궁금했던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사전을 찾아보니 고슴도치에게 혼난 범이 밤송이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이 북한에서 이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필시 이 속담은 경험을 통한 학습 효과라는 보편성을 전해주는 동시에 큰 범이 자신의 위용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가시 뭉치에 심리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상황을 풍자적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 상태의 자라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목을 움츠렸다 폈다 하는 것 말고는 자라가 할 수 있는 무슨 놀라운 일을 떠올리기 난감한 것이다. 남편은 자라가 분명 손가락을 물었을 거라고 했지만, 속담은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는다.   

 

실로 길어도 한 세기를 채 살기 힘든 인간으로서는 전해 내려오는 지식과 이전 세대의 훈육을 거치면서 여러 방식으로 세상을 익혀 가지만, 자기 경험만큼 강력한 학습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불이 뜨거운 것을 꼭 만져보아야 아느냐고 힐난하는 사람은 불에 관한 많은 정보를 섭렵할 수는 있지만 잠시라도 불에 데어본 사람만큼 그 위험을 감각적으로 지각하고 세심하게 주의하고 있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다른 한편, 경험이 우리를 종종 속인다는 것 또한 사실이지 않을까솥뚜껑이 자라로, 밤송이가 고슴도치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예기치 않았던 상황을 경험한 후 종종 그 경험의 그림자 속에서 이후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여러 종류의 증오와 공포증은 이런 위험 학습의 과도한 효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순애보를 배신당하고 이성을 혐오하는 사춘기 소년에서, 어릴 적 반복적으로 부당하게 체벌 당한 후 정의를 믿지 않게 된 어른에 이르기까지, 일시적이거나 지속적이거나 의외의 경험은 그토록 강력하여 때로 스스로를 공격할 수도 있는 과잉 자가 면역 체계를 만든다. 그러고 보면 저 속담은 비슷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일반화해서 지각하는 주관적인 경험론이 지나칠 때의 위험을 또한 재치 있게 환기시켜주는 듯하다.

 

그나저나 자라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무슨 짓을 하긴 한 것일까?()

 

-<매경춘추> 2015.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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