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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대학교육 ‘혁신’ 유감

 

                                                                        Budi Satria Kwan, <Book-Window of the World>

 

그러니까, 내가 철학과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가 재떨이를 던지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예반 때문에 떨어진 성적을 만회하겠다고 고2 겨울방학에 수학 문제집을 들고 남산도서관에 간 것이 화근이었다. 거기에는 많고 많은 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처음 보는 낯선 단어들로 세계를 다시 설명하려는 사람들의 책만 모아놓은 방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한적하고 나른한 그곳에서 수학문제도, 풀기는 풀었지만, 중간 중간 집어든 이상한 책들에 씌어 있는 이상한 낱말들로 된 답 없는 이상한 문제들은,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창가 자리에 나를 붙들어두곤 했었다.

 

지금도 공부라는 낱말을 들으면 그 고즈넉한 겨울 저녁의 햇살이 혼곤히 비쳐들어오던 창가 자리를 떠올린다. 나는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이고 계속 공부를 할 요량이지만, 그리고 이제는 공부라는 것이 언제나 책상 앞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또 아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공부의 첫 경험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궁금해서 자발적으로 모르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희열과 함께 기억된다.

 

물론 철학과는 재미만 있는 곳은 아니었다. 정합성에 대한 지나친 요구나 기계적인 논리와 싸우고 있을 때면 문``철이 한몸이었던 고대 그리스의 전인적인 태도를 얼마나 시샘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대학 3학년 때 로티라는 철학자를 수업 시간에 알게 되었다. 분석철학의 유망주였던 그는 어느날 문학 문화라는 것을 들고 나타나 세계를 비유적으로 재서술하는 것의 가치를 역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2001년 한국을 방문해, 대학의 외부 요인에 의한 인문학 위기에 관해 우려를 표명한 원로 문학평론가 김우창 선생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에겐 교육부 같은 것이 없습니다.(...)(그리고) 자금을 제공하는 부자 보수파들은 어떻게 된 셈인지 대학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현존하는 남의 나라가 부러운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어떤 학교는 돈을 주고라도 직업이라는 이름을 떼려고 하고, 또 실질적으로 직업학교가 되어버린 많은 학교들은 이제 취업률에 의해 인문학 분과들을 조정하게 생긴 지금, 내 기억 속의 창가 자리를 구성하던 그 혼곤한 햇살과 뜨거운 흥분과 서늘한 궁금증은 이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깃들 수 있을까. ()

 

-<매일경제> 매경춘추, 20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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