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작품론

디오니소스 신도: 강정 시인의 시에 부쳐

orinto 2025. 5. 15. 22:53

  (강정 시 "용의 탄생", "열흘 간의 유령", "그림자의 견습, 혹은 독신의 뿌리"(시집 <웃어라, 용>에 수록)에 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태몽을 알고 있다. 어머니가 꾸었거나 아버지가 꾸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어머니나 아버지의 혈족이 대신 꾸어주기까지 하는 태몽은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로서 서양철학의 관점에서라면 심리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겠지만, 우리 문화 안에서는 가족 단위 공동체에서 공유되는 개인의 탄생 신화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태몽과 같은 개인 차원의 존재론적 근거 짓기는 공동체 전체의 신화처럼 광역화된 형태로 신봉되거나 공유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상징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대개 잉어나, 용, 호랑이, 별, 달, 해와 같이 아주 오랜 옛날에도 신화적으로 상상했을 법한 신비화, 또는 신격화된 범상치 않은 동물이나 천체의 일부로 이 땅에 도착했다는 전언을 들은 바 있고, 이것들은 우리 각각의 생명의 시초를 각별히 고유한 신비적 특질에 정초하도록 한다. 사도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수태 중에 천사의 방문을 받는 일은 좀처럼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고유성과 자기 자아의 창조를 재서술하려는 강한 시인(strong poet: 리처드 로티의 용어)들은 자기 자신의 자아를 거듭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반복적으로 재서술하여 이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키려 한다.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와 제도로부터 벗어나려는 자들은 왕왕 자기 자신을 고아로 정립하거니와, 이때 그는 스스로 자기 태몽을 꾼다.

  신화적 상징들을 자기 식으로 재서술하면서 시 속에서 자신의 거듭되는 탄생을 꿈꾸어오던 강정의 시들은, 이번 시집에 와서는 직접적으로 이 장면들을 현시하려 하고 있는 것 같다.

  가령, 그의 시 「용의 탄생」은 더 이상 인간의 말을 할 수 없게 된 존재임을 발견한 ‘나’가 인간과 인간의 말을 벗어나 신화적 상징인 용으로 재탄생하는 현장을 그리고 있다. 이 재탄생-변용의 계기와 결과는 그가 말 대신 말의 본질인 소리로 돌아가는 데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더 이상 나와 같은 종(種)의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머리를 꼬리로 바꾸고, 네발로 기어다니거나 배를 땅에 문지르며 땅송의 소릴 들으려 했다 꽃이 나를 먹기를 바랐을 뿐, 누구에게 바치지도, 그 꽃으로 마음속 색깔들을 가리거나 위장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러 입이 지워지게끔 했다

-「용의 탄생」 1연 부분

  용의 탄생은 우선 말을 잃고, 곰처럼 뛰는 새, 뱀의 등피를 닮은 흙의 입술, 무늬를 지우고 웃는 호랑이의 이미지를 지나 인간에 대한 재평가--“왜 사람은 두 다리로 선 채/자기가 누구인지 모를까//왜 자기 머리가 풀숲 속 진드기처럼 자신의 피를 빨아먹는 줄 모를까”--로 이어지고, “기다란 물줄기가/기다란 그대로 뱀이 되어 날아올라용오름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종과 돌과 운석과 바다를 불러 울리고 노래하고 불타고 광분하라는 요구로 이루어진 후렴구를 지나 결구에 다가가면, 독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만난다.

  내 입이 보이는가 아니면 소리가 들리는가

  바다가 보이는가 아니면 태양이 울부짖는가

-용의 탄생 16연

  이 눈--“보이는가”--과 귀--“들리는가”--, 눈과 입--“울부짖는가”--의 대결은 또한 말logos과 소리의 대결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이 사랑은 천년이 훌쩍 넘어 금빛 초롱 소릴 모든 생물의 뿌리 끝까지 밝힌다”. 도대체 어떤 나르시시스트가 이토록 대규모의 자기 태몽을 꾼단 말인가? 그는 로고스 너머로 돌아가 자기를 다시 낳으려고 한다.

  이 같은 전지구적 규모의 탄생 신화는 아무래도 그가 차라투스트라의 친구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다. 앞선 평자들이 그에게 ‘감각의 무정부주의자’라거나 ‘서정적인 테러리스트’라는 별칭을 붙여줄 때, 이 형용모순적 표현들은 강정의 낭만주의적이고 비극적인 사유를 열어젖히는 온갖 이항대립과 그 무수한 이항들을 뒤섞고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디오니소스에 대한 편향을 지칭한다. 그는 그림(모방)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이미지와 소리의 경계를 흐리고, 다층적인 시간의 영원한 회귀를 겪으며, (이 모든 특징들을 그의 시 「열흘 간의 유령」에서 볼 수 있다.) 기독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대문자 신의 죽음과 폐허와 기만과 이방 신의 환상적 재림으로 교체한다. 내가 이것을 이방 신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시 「그림자의 견습, 혹은 독신의 뿌리」에서 환상 속에서 목격하는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뚜벅뚜벅 구름을 타고 걸어내려”오는 사람을 화자는 “언젠가 두꺼운 책 속에서 읽었던 인물이었다”고 쓰고 있지만, “그가 내 사타구니를 움켜쥐며 지구의 진짜 모양에 대해 얘기했다 지구는 원체 찌그러진 별이고, 별이란 인간이 짊어질 수 있는 가장 큰 돌멩이이므로 모든 이의 몸속에서 병과 영생을 키우는 알 같은 거라 말했다” 같은, 이어지는 부분을 읽고 있으면, 독자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인물은 재림하는 예수보다는 사타니즘 신봉자였다가 말년에 전도사가 된 오지 오스본이 한창 때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린 노래 “미스터 크로울리Mr. Crowley”의 실제 인물인 알리스터 크로울리,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화가이자 황금여명단의 일원이었으며 영지주의와 카발라를 통합하여 ‘세속-니체주의적’이라고밖에는 형용할 길 없는 자신만의 종교 텔레마를 만들었던, 히피 록 애호가들의 구세주 알리스터 크로울리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 그러나 시에서 환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예수이건, 예수의 참칭자이건, 시의 전체적인 맥락을 과히 해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누구든, ‘나’는 다시금 자기의 탄생 신화를 적는 것이다.

...

스스로 점토 덩이가 되어 나는 나를 다시 빚기 시작했다

...

나는 이미 죽은 것이다

나는 다시 죽은 것이다

...

-「그림자의 견습, 혹은 독신의 뿌리」 부분

  탄생은 반복되어야 하니까. 그러려면 죽음도 다시 반복되어야만 하니까. 그는 몇 번이라도 자기를 거듭 다시 빚을 힘과 의지가 있고, 이 주체적인 영원한 자기 탄생의 반복되는 재서술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원초적인 상징들이 통째로 지칭하는 야수파적인 생명력 자체를 들려준다’.

  이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깃들어온 말의 체계가 아닐 것이다. 관습적인 말의 울타리와 그 제도와 법 바깥의 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그의 최대 목표이므로, 이 말-소리들은 헷갈리고 혼동을 조장하며 구분을 허용하지 않고 양성적이다.

  디오니소스는 신화 속에서 티탄족에게 갈기갈기 찢겨 먹이가 되었고, 찢긴 그의 몸은 물, 불, 공기, 흙으로 변했다. 그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그가 부활하길 간절히 기원했다. 부활할 디오니소스는 모든 개별화와 그로 인한 고통을 끝장낼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의 친구. 비극적 사유로 하여금 비극적 감정을 억누르는 자. 바람과 불과 물과 흙, 더없이 단순한 원소들로 이루어진, 인간적 제도적 간교함 없는 신화적 세계로부터 탄생하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자. 운명에 대한 미련 없는 사랑과 영원히 지속되는 생성의 현장에 참례하는 자. 폭풍처럼 몰아닥쳐서 입과 눈을 지워버리더라도 귀는 영원히 남아있기를 소원하는 자.

  나는 그가 시집 맨 앞에 남긴 다음 문장들의 고요함과 그의 마지막 시의 결구가 파리지옥의 두 개의 입술처럼 다물어지는 장면을 상상 속에서 본다.

  “새들이 노래하는 창가에는 늘 형체 모를 낙인이 있다.//귀를 열면 분명하나 눈을 뜨면 지워진다...”

  그 다물어진 입술 속에 고요와 세상 모든 소란이 한데 섞인 운명의 음악축제가 영원히 벌어지고 있다.(끝)

-<시와 사상> 2024년 가을호

 

A  Hellenistic Greek   mosaic  depicting the god  Dionysos  as a winged  daimon  riding on a tiger, from  the House of Dionysos  at  Delos  (which  was once controlled  by  Athens ) in the  South Aegean   region  of  Greece , late 2nd century BC,  Archaeological Museum of De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