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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작품론

왕의 박력을 가진 시인이 있었다면

* 조 메노스키 지음, 정윤희, 정다솜, Stella Cho 외 옮김, 『킹 세종 더 그레이트』, 핏북, 2020

처음 이 책이 흥미를 끌었던 것은 작가가 “스타트랙” 시리즈의 집필자 중 한 명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한동안 이공계 연구자들이 주인공인 시트콤 <빅뱅이론>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스타트랙”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철없이 학교에서 나이 먹어가는 <빅뱅이론>의 주인공들이 홀딱 반해 있는 “스타트랙”에 대한 경외감과 ‘덕질’할 때의 감정에 이입한 상태에서 이 책의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말하고 한글 쓰는 자연인의 입장과 <빅뱅이론>에 대한 팬의 애정이 혼합되어 대뜸 이 책을 사고 말았다고나 할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스타트랙”처럼 미국적인(마치 각국의 이민자들이 연방을 이루듯이 다종다양한 행성의 사람들이 ‘연합’을 이루는) SF 시리즈를 쓰던 드라마 작가의 시선에서 500여 년 전 계급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조선의 왕권 체제하에 우연히 출현한 한 다재다능한 왕이 주도한 문자 체계의 발명이 어떻게 그려질 것인지 하는 점이었다.

작가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처음 접한 이후 이미 근 20년간 한국 문화 콘텐츠를 좇아 섭렵해왔다고 한다. 그러다 5년 전 한국을 방문하여 한글을 직접 배우고 한글 창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이 이야기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가 느낀 충격은 이 소설의 머리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만약 유럽의 어떤 지도자가 백성들을 위해서 글자를 만들었다면 전 세계는 이미 그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전 세계의 소설과 영화 TV 시리즈 등에서 유럽의 지도자 이야기가 소재가 되고 재해석되었을 겁니다. 저는 한국 외 다른 국가들에게서 세종과 필적할 만한 상대가 있었다면 과연 누가 될 수 있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피렌체의 통치자인 경우일까? 아이작 뉴턴이 영국의 왕인 경우일까? 비교할만한 대상 자체를 찾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이방인 작가의 이런 소회는 독자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짚어보게 만든다. 어릴 때부터 한글 창제에 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온 내게 한 나라의 왕이 (설에 따라서 혼자서든, 혹은 집현전이라는 ‘씽크탱크’을 주도해서든) 하나의 문자 체계를 ‘발명했다’는 사실이 피렌체의 통치자나 영국의 왕의 경우와 나란히 비교되어 생각된 적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역사나 역사를 소재로 한 문화 콘텐츠, 혹은 동화나 소설을 통해 내게 구성되어 있었던 유럽의 ‘왕’은 대개 훌륭한 몇몇 경우 ‘군왕’이었거나, ‘오이디푸스 왕’이나 ‘리어왕’처럼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한낱 인간의 무력함이나 잘못과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인물, 혹은 ‘철 가면’처럼 불운한 아이들의 상상적 자아를 대변하는 상징이었고, 나머지 대다수는 백성들의 실생활과는 멀리 떨어져 호화로운 생활에 젖어있는 ‘인민의 적’, 따라서 개인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상적 근대화를 위해 사라져야 할 봉건적 상징, 혹은 계급주의의 허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아둔한 허수아비 같은 것이었지 문무와 교양을 겸비하고 합리적이고 온화하고 자비로운 인덕마저 갖춘 ‘전인적인’ 표상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것은 플라톤이 유토피아를 구상할 때 순전한 상상으로 등장하는 ‘철인 왕’에게 신화적 색채를 더해서나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작가의 존경심과 사랑이 듬뿍 반영된 세종대왕의 인물 성격은 거의 이상적인 ‘계몽 군주’에 가까운 모습 같기도 하지만, 유럽의 계몽 군주가 또한 절대군주이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종이 왕권 중심의 제도들을 강화했다고는 하나) 양반 관료 중심의 유교적 통치이념을 내세운 조선에서는 애초에 절대군주를 상상하기 힘들기도 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유럽의 왕과 조선의 왕은 한 스펙트럼 안에서 비교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조 메노스키가 놀라고 있는 저 장면이야말로 조선을 비롯한 동양의 과거가 서구인들에게 얼마나 낯선 것인지 증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아마도 작가가 이미 미니시리즈를 구상하며 시나리오를 쓴 이후에 쓰였기 때문이겠지만, 많은 부분 장면 전환이 영상을 보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세종의 탁월함을 돋보이게 만드는 주변 나라들의 정세와 현황—환관의 허수아비로 전락했으나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명나라 황제, 과거 원나라의 광휘를 기억하며 각 유목 민족들의 통합을 도모하고 있는 몽골의 잔인한 부족장, 섬들의 연합과 조선으로의 확장을 꿈꾸고 있는 일본의 주군들—이 따로따로 동시에 전개되다가 한글의 발명과 전파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작가는 대담한 몇 가지 가설을 이 ‘역사 판타지’에 도입하여 자칭 ‘역사 액션 판타지 국제 스릴러물’로 그려냈는데, 이 가설들이 아주 흥미롭다.

소설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가설은 ‘한글을 세종 혼자 만들어냈다’라는 것이다. 이 가설과, 이 소설을 통과하고 있는 이미 죽은 장영실에 대한 거의 브로맨스에 가까운 세종의 그리움 때문에 이 소설은 마치 영화 <천문>의 다음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간순으로는 <천문> 바로 다음이고, 세종의 성격과 비밀스러운 개인 프로젝트로서의 한글 창제 역시 <천문>의 모티프를 이어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동물 소리 흉내를 잘 내는 “황씨 부인” 같은 인물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몇몇 인물을 혼합한 것처럼 보인다. 공교롭게도 영화 <천문>과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모두 한석규가 분한 세종은 마치 동일 인물처럼 비슷한 성격을 보여주는데, 이 소설의 세종은 이 두 작품의 세종의 성격을 많이 참고한 듯하다. 조 메노스키는 이 작품을 쓰기 전에 세종과 한글 창제에 관한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섭렵했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작품들은 실제로 세종을 소설화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두 번째 흥미로운 가설은 결국 신료들의 반대로 공식 문자로 인정받지 못한 훈민정음은 단지 조선에서 조용히 묻힌 게 아니라 창제 당시부터 대륙과 일본에 전파되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며, 아주 의외의 방법으로—즉 조선의 마지막 네스토리우스교 사제에 의해 대륙으로, 그리고 당시 통신사로 일본을 오가던 언어의 귀재 신숙주에 의해 일본으로 위기의 순간들을 통과해 해례본 사본들이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대담한 가설이지만 이 가설 덕택에 이 소설의 ‘국제 스릴러’다운 면모가 살아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은 “훈민정음”이 “文”이나 “字”가 아니라 명백히 “音”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해례본에 씌어 있는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이 글자를 가지고 적을 수 있다”라는 정인지의 서문은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말소리’를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한글 체계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에서의 신숙주의 모험을 그리고 있는 부분에서 뱃사공의 말 못 하는 아들에게 손바닥에 한글을 가르쳐주자 아들이 ‘엄마’, ‘분홍색’, ‘눈’이라는 일본어의 한글 음차를 써서 신숙주가 아버지에게 전달해주는 삽화는 이런 훈민정음의 본래 목적을 아주 잘 보여준다. 한자/한문이 이미지를 통한 의미 구성에 소리가 수반되는 것과 달리 한글은 소리가 모여 의미를 구성하는 ‘경험’으로서의 말하기를 모방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한국어에 유독 의성어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중심의 한자/한문과 달리 한글은 인간의 명백한 경험 행위로서의 ‘말하기’의 조건으로서 시간성과 시간의 경과 속에서 그 행위를 완성해가는 ‘구성 과정’을 그대로 재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한글이 ‘표음문자’임을 표시하는 데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은, 어떤 문자 체계가 ‘표음문자’라는 점은 단지 표기 대상이 소리라는 점을 일러주는 것 이상의 인식론적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사고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의 차이를 넘어서 사고 형성 과정 자체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물론 (여러 순음이 사라진 현대 한국어/한글은 차치하고) 이토록 ‘받아쓰기’에 탁월한 훈민정음으로도 정말로 ‘개 짖는 소리’와 ‘바람 소리’를 정확하게 모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신기하고 신나는 일일까. 사랑하고 미워하고 애틋하고 정겨운 사람의 숨소리 목소리 웃음소리 빗소리 문소리 발소리와 그에 서린 짙고 옅은 음영을 모두 적을 수만 있다면야. 그것은 시인의 꿈일진대, 그런 문자를 발명하려 했고 비교적 성공에 가까이 갔었던, 시인의 꿈을 가진 사람이 역사에 존재했고, 또 다행히 그가 왕이기도 해서 그가 만든 체계적인 꿈이 500년 만에라도 공식적으로 되살아났다는 것은, 그래서 내가 이런 백일몽 같은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받아쓰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운일 테다.(끝)

-<독서In> 독서칼럼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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