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글/시인론

뱀의 혀: 김정환, <황색예수2> 해설

400 쪽에 달하는 그의 이번 시집 원고에 꽂아둔 포스트잇 인덱스들이 빛나는 밤이다. 원고 최종 마감일을 여러 번 갱신한 밤이다. 나는 저 인덱스들을 어떻게 종합해야 할 것인가. 종합은 가능한 것인가. 종합이 그의 시를 이해하는 가장 유의미한 방법이라고 나는 나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우선 회상의 문으로 들어간다.

 

  시차 적응: 1985년 시집을 1991년에 읽고 2023년에 다시 읽으면

 

  언젠가 다른 지면에 몇 번 고백한 적도 있지만, 나는 10대 후반에 지나치게 80년대 문학에 몰입했던 탓에 시대에 맞지 않는 세계 해석에 오랫동안 사로잡힌 적이 있었고, 지금도 거기서 다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것이 나에게는 오랜 숙제였는데, 내가 80년대 문학에 몰입했던 10대 후반은, 이미 90년대가 시작된 후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에게는 몇 년 안 된 최신의문학이었지만,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만 하는 세계였다. 소련은 이미 망해 있었고, 민주화는 이제 막 미완의 형식으로나마 도래한 이후였다.

이런 이유로 나에게 80년대 시인들은 오랫동안 ‘사랑하지만 원망스러운 삼촌과 이모들’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자신의 세계 해석을 온힘을 다해 종이 위에 쏟아놓았을 뿐이고, 당대 현실에 충실했을 뿐이었겠으나, 얼마 안 가 그들이 남겨놓은 따끈따끈한 유산은 곧바로 (믿음을 잃고 설립된 만신전에!) 안치되어야 할 것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많은 삼촌과 이모들이 펜을 꺾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전향하고, 이전의 자기 자신을 고발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동안, 완강하게 서점을 점령하고 있었던 근과거의 시집들은 여전히 나에게 ‘적대의 정서’라는 거대한 유산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20여 년이 지나자 그들 중 ‘안전한’ 시들은 교과서와 수학능력시험 지문으로 살아남았다.

나는 그 후로 얼마나 오랫동안 80년대 시인들을 원망했던가. ‘이 작자들이 나를 속였어! 세계는 균질화되기 시작했고,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적들은 사라지고, 나는 상냥한 적의 품안에서 단물을 빨고 있는데, 목숨이라도 걸어야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처럼 광장과 골방과 거리에서 목에 피가 맺히도록 내 혼을 쏙 빼놓고 죄악감에 시달리게 만든 저 삼촌과 이모들을, 나는, 용서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저 혼자 감응해놓고 뭘 원망한다는 거지? 누가 그렇게 몰입하라고 시켰던가?’

그러니까, 종국에는, 내 탓이다. 사실 삼촌과 이모들의 시집을 읽고 있는 동안 나는 이미 브릿팝과 그런지락과 테크노메탈 밴드들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전지구적인 우울과 불안한 외침과 혁명적인 형식의 절망이 내지르는 소음을. 내가 탐닉하는 문자와 음악 사이에 뭔가 평화롭게 할당할 수 없는 범주의 유격이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기는 했다. 삼촌과 이모들은 “가난한 운동가요”(“후배는 아직 하드록 카페에 있다/(...)/하드록을 하면서 사회주의를 논하는 그에게/가난한 운동가요로 그냥 밀려온/나는 무엇으로 선배인가”, 김정환, 「후배」, 『희망의 나이』, 창작과비평사, 1992)로 자신을 표상하고 김추자나 펄시스터즈의 문화사적인 맥락 속에서 자신의 청춘의 정서를 정위시켰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사적인 취향과 공적인 신념의 일치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오늘날의 독자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불쌍한 삼촌과 이모들의 80년대는 낭만주의의 특질인 이항대립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이항대립을 추체험 속의 관념으로 물려받았다. 이 삼촌들 사이에 김정환이 있다. 삼촌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눅이는 삼촌이다.

나에게 김정환은 1991년 가을, 컴컴한 고등학교 문예반실 책장에서 시작된다. 나는 거기서 졸업한 선배들 중 누군가 놓고 간 그의 시집 『좋은 꽃』을 발견하고는 내 맘대로 가방에 넣고 가져와 표지 뒤 간지에 이 시집을 ‘슬쩍한’ 날짜와 내 이름을 적어놓았다. 책머리에 쓰인 “아름다움의 倫理에 대해 생각한다”는 말에 소심하게 밑줄을 쳐놓았다. 이 시집의 제목이 보들레르의 “악의 꽃(Les Fleures du Mal)”에 대한, 기획적이지는 않았겠지만 의식적인 비틀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어째서 이전의 번역자들은 “나쁜 꽃”이나 “병든 꽃”이나 “잘못된 꽃”이나 “좀 맛이 간 꽃”이라고 하지 않고 한결같이 “악의 꽃”으로 번역했던 것일까. 가령, “나쁜”은 공적인 판단과 사적인 감각 모두를 아우르기에 더 적절한 번역어였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악의 꽃’의 대비어로서 “좋은 꽃”의 “좋은”은 단지 윤리적인 의미의 ‘선’ 개념에 갇히지 않는다. ‘악의 꽃’을 액면 그대로 한 번만 비틀었다면 ‘선의 꽃’이라고 했을 것이다. 아무려나 ‘선(善)’은 영어의 good이나 그리스어의 칼로스(καλός)처럼 역시 그 본의 상 ‘좋다’는 뜻으로, 이 말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미추와 선악을 미와 윤리의 영역으로 자동으로 나누는 것과 달리 그 구분이 없이 쓰인다. ‘좋다’는 ‘기껍다’라는 주관적 심정과 ‘바랄만 하다, 바람직하다’는 대상의 특질을 의미하기도 하고 윤리적으로 ‘선하다’는 공적 판단과 기능적으로 잘 작동한다는 대상의 상태에 대한 진단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좋은’은 ‘나쁜’과 마찬가지로 판단과 감각을, 미학과 윤리학과 인지 상의 주관의 상태와 객관의 판단에 모두 쓰일 수 있는 말이다.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이라는 어휘는 감각과 심정과 물리적 상태를 분리하는 테두리를 들락날락한다.

동시대 동료 시인들보다 현저히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어휘들을 일상어에 섞어 사용하던 그의 시들은 감각과 언어 조탁이 시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분히 앙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감각과 정념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념과 힘과 인식의 총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김정환은 반감상주의에 대한 강력한 요청으로 도착했다.

 

“아름다움의 현재, 저질러진 기쁨이여”(1986)

 

『지울 수 없는 노래』를 비롯한 초기의 그 모든 헐림, 폐허, 몰락의 이미지들이 초기부터 넘쳐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연구자는 그의 80년대의 시쓰기를, 지우고 다시 쓰기를 거듭하여 여러 과거들이 겹쳐져 있는 파피루스 문서-팔림세스트 글쓰기라 명명하면서 『황색예수』를 “공사장이 된 텍스트”라고 불렀다) 직후에 전개되기 시작한 김정환 시의 특징을 나는 감상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격과 함께 깊숙한 낙관론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가 전하는 교훈은 흔치 않은 것이다. 단지 강력하기만 한 신념의 편에 있었다면 그는 많은 사람들이 허탈해진 90년대를,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 우울이나 착란 속의 은밀한 향락이나 좌절이 불러들이는 도피주의적 퇴폐나 ‘방향전환’이라는 말로 순화될 전향의 길로 급선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포용력은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끝끝내 현실의 편이다. 치밀어 오르는 울음과 눈에 아로새겨지는 화려한 패배를 함께 다 삼켜버리고 이전과 같은 속도로 다가오는 모든 길을 밟는 것. 보아라. 진짜로 현실주의자가 되기가 이렇게 어렵다.

이 철저한 현실 인식의 조짐은 그가 40여 년 전 연병장에서 눈 치울 때에도 보였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로 살아 남은 것은/우리의 앞이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다/무언가를 안했기 때문이 아니다”(「제설작업」 결구, 『좋은 꽃』) 이런 문장은 얼핏 읽었을 때는 순전히 논리적인 기술로만 들린다. 당대의 통상적인 시 독자들은 ‘우리의 앞’이 뭘 잘했고 잘못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위해 시가 그 단서를 제공해주기를 은밀히 기대했을 테지만, 김정환은 잘/잘못보다 실천/무위의 구도로 숨겨진 질문을 바꾸고 ‘살아남음’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그 질문의 전환은 그의 내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어째서 지금 여기는 이 모양 이 꼴인가’라는 첫 번째 질문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로 살아남았는가’로 전환하는 일은 그의 급진적인 현실주의와 깊숙한 낙관론의 결합을 통해 세계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주체의 발생에 관한 재서술로 사유를 전환시킨다. 1986년 『황색예수3』의 시인의 말에서 그는 자신의 말로 이런 인식을 정리한다.

 

이제 우리 문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진보적 관념과 복고적 서정 사이의 양자택일적 선택 혹은 혼합적 누림이 아니라, 관념과 서정의, 관념적 서정과 서정적 관념의 변증법적, 미래 지향적인 종합인 동시에 통일 정서의 한 예감이고 또 민중 지향 전통의 한 현대적 갈래일, 전투적, 비극적 서정성의 창출이다. 그것은 관념적 단어의 해방 실체화이자 일상적 단어의 혁명성으로의 고양이며,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딛고 일어서는 ‘투쟁과 구원의 종합’이며 이미 조건 자체를 해방 무기화하는 ‘치열한 너그러움’이다.(...)모든 것은 사랑과 싸움의 과정이며, 좀더 인간적이기 때문에 성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진보적이다.

 

오늘날 다소 생경해진 ‘변증법’, ‘해방’, ‘통일’, ‘혁명’ 같은 80년대의 ‘마지막 어휘(last vocabulary)’들을 뚫고 그의 시 속에서 여전히 살아 생동하는 것은 ‘치열한 너그러움’과 ‘투쟁과 구원의 종합’, 그리고 ‘인간적임과 성스러움과 진보성의 동시적인 인식’이다. 이런 현실인식이 소련이 망한 뒤에도 “오 나는/붙들 것이 현실밖에 없다(...)나는 안다 깊은 곳일수록/무너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튼튼하게 한다”(「첫눈」, 『희망의 나이』, 창작과비평사, 1992)라는 단언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고(물론 이 대목을 읽을 때 이를 악문 것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나 연결고리인 채/조금은 공허한 세대일 것이 나는 보인다”(「숫자」, 같은 책) 같은 언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세대 간 인식 차에 관한 고민은 30년 후에 이렇게 기술된다.

 

어느 세대나 자신의 고유한 불가능 수준을

최대한 복잡화하는 식으로 높였다 생각하고

어느 후대나 선대가 철 없어 보일 정도로

복잡화한 자신의 불가능 수준이 바로 선대

극복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계속된다, 아마도

불가능의 가장 복잡한 수준인 죽음의

육체에 달할 때까지.

- 「인간의 풍경」 부분

 

그러니까 그의 낙관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로부터 절망적이고 배반적인 국면들이 펼쳐질 때 단지 그 순간이 안겨주는 절망과 배반감에 멈춰 있지 않고 그 증대되는 물질적 현실과 인간의 상호 관계적 총체가 펼쳐갈 낯선 미래를 응시하도록 하는 용기에서 나온다. 이 용기는 지속적으로 발생 중인 주체의 포용력에 기인하기 때문에 회피나 부인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취하는 거짓 희망의 제스처와 완벽하게 구분된다. 이 낙관은 웃어넘기거나 ‘결국 모든 것은 좋을 것이다’ 같은 유용성중심주의의 낙관과 달리 자기 자신을 발생시키고 수정하기를 거듭하기 때문에 고통 없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Under (De/Re-)Construction

 

어떻게 어제까지의 세계 해석이 무효화된 것처럼 보일 때에도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사상이 죽은 것처럼 보일 때에도 충실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신이 죽은 이후에도 사도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김정환은 왜 아직도 예수를 시에 겹쳐놓는단 말인가?

1983년, 김정환이 『황색예수』 연작을 시작할 때 시인의 말에 밝힌 일련의 작업의 의미는 이러했다.

 

이 글은 우상화된 예수, 우상화된 개인적 고통에 대한 고발이며, 잘못된 성(聖)-속(俗)의 이분법적 개념 규정에 대한 수정 작업이며, 현세기복적 재벌 종교의 반민중성, 미래 지향적 구원 종교의 관제적 반역사성에 대한 규탄이다. 그리고 가난한 민중들의 공동체 속에서, 쫓겨난 오늘의 예수를 확인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어렴풋한 모형을 찾으려는 ‘의미 찾기’이다. 그것은 성서에 나타난 탄생, 사랑, 부활,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작업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나는 이것이 당대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한국 사회에서 신의 이름으로 부당한 월권을 행사하고 있는 자기모순에 대한 고발과 함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예수(들)로부터 발견하려는 근본적인 해석학적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40년 전의 의도는 오늘, 바로 그 해석학이라는 학문의 체계를 정립하게 한 중세 수도사들의 지난한 해석 작업의 섬세하고 치밀한 해석-강론-토론-논쟁의 과정과 취사선택을 통해 일정한 합의에 다다르고 무수한 주석을 거느리게 된 성서라는 보편화된 서사의 표본 텍스트와, 삶의 경험적 주체로서 ‘치열한 너그러움’을 통해 당장의 이해 가능성을 넘어서려는 자가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 속 자신의 삶이라는 텍스트를 겹침으로써 생산되는 균열과 이물감을 드러냄으로써, 이 균열과 이물감이야말로 사실상 믿음의 가능성을 떠받치는 핵심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데로 나아간다.

그런데, 지난 세기를 지나 오늘에 도착하는 동안 신은 두 번 죽었다. 한 번은 (민중신학과 변형된 기복신앙과 ‘죽은 신’이라는) 고정적 해석 속에서 이론에 이론을 덧칠한 담론화된 상징의 몸으로. 또 한 번은 완전한 망각에 의해서. 나는 이것이 90년대 초반 한국에 당도한 포스트모더니티의 소문이 지금은 우리 삶의 공기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는 빠짐없이 상품이 되어가는 초국가적 자본주의의 승리와 함께 우리가 당도한 공허하고 화려한 세계다. 이제 사람들은 ‘신’이라는 말을 비유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믿지도 않는 예수의 생일에 성탄목을 꾸미면서,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돌로 쳐 죽이는 관습법이 있었던 2천여 년 전 식민지 이스라엘에서 한 쌍의 커플이 기를 쓰고 남의 집 마굿간에서 장차 죽어도 다시 살아날 백수 정치범 사형수가 될 아이를 낳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이 날이 정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

‘죽은 신’을 기억하거나 잊으려 애쓴 것이 모더니즘의 일이었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를 다크 히어로로 다룬다. 지난 몇 년간, 미국 드라마는 부활의 문제를 좀비나 언데드와 마찬가지로 공포물의 주제로 다루어왔다. 이것은 세속화를 넘어 신성의 오락화를 방증한다. 사실 원리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어떤 이념도, 어떤 경전도 존경하지 않는다. 한쪽은 야만(the barbarian)이고, 한쪽은 원시(the savage)다. 한때 모든 해방 서사의 기본 골격이었던 기독교 서사는 완전히 엔터테인먼트에 녹아들었다. 나는 지금 제도로서의 기독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김정환이 제도로서의 기독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 세계의 이중적 적대의 상황을 알랭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보여준다.

 

‘문화’라는 말은 ‘예술’이란 이름을 폐색(閉塞)시킨다. ‘기술’이라는 말은 ‘과학’이란 말을 폐색시킨다. ‘경영’이란 말은 ‘정치’라는 말을 폐색시킨다. ‘성’이란 말은 ‘사랑’을 폐색시킨다. 시장에 동질적이라는 엄청난 장점을 갖고 있으며, 게다가 관련된 모든 항목이 하나의 상품 제시 난(欄)을 나타내는 ‘문화-기술-경영-성’이란 체계는 진리 공정들을 유형적으로 식별하는 ‘예술-과학-정치-사랑’이란 체계를 은폐한다.

 

이 은폐 관계를 종교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라는 말은 ‘신성’이란 말을 폐색시킨다. 신성은 실체적 신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라는 모호한 특질로 존경할 만한 우리 자신의 최상의 형상을 암시할 수도 있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그 가능한 최상의 인간 형상은 실재한다는 증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희망하기 때문에 요청되는 것이다. 이것이 끊임없는 경험과 텍스트의 해석학적 싸움에서 재상상된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김정환에게 물리적인 경험으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체적은 현재를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주체가 당연하게 지나온 과거의 ‘디자인’과 마주쳐 느끼는 생경함이 기억을 재규정한다.

 

종이신문이 세계관처럼 펼쳐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내가 나를 Search하는 나의 고독인데 내가

고독이라는 말을 모른다.

-「도자기 필통과 옥수수 속대 빨뿌리」 부분

 

내가 나의 총체를 찾아 돌아다니는

미로가 나의 총체이다.

(...)

나의 미로에 미혹되는 방식으로 내가 그 미로를

빠져 나오는 나의 총체다.

-「미로 활성과 동그라미 등식」 부분

 

‘나의 총체로서의 나’는 ‘나’의 밖에 빠져나와 ‘나’를 응시하는 또 다른 ‘나’만이 기술할 수 있다. ‘나’가 아무리 거듭 재서술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체험한 미로의 세부들을 누락하고 생략한 채 매끄러운 서사로, 직선으로 만들 수 없다. 이 빠뜨리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그는 체험하는 모든 것을 텍스트 속으로 가져온다. 이 텍스트는 무수한 다른 텍스트들로 직조된 현실로 건축/해체/재건축되어왔고, 끊임없이 건축/해체/재건축되어간다. 문학사와 정치사와 문화사와, 믿음과 배반의 반복과 함께 수정된 당분간의 신념 체계를 증거하는 자기 삶의 무수한 디테일과 함께. 종합은 가능한 것일까? 무엇이 예외이고 무엇이 보편인가? 누가 김정환이고, 누가 예수이며, 누가 인간 일반인가?

 

(...)

이것이 아담의 말이다:

대홍수보다 훨씬 더 지식의 사과 이후 생애가 죽음을 향한

생애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충격적인 체념이 있었다.

그것이 최초의 사실이고 사실의 충격을 신성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기적이 있었다.

(...)

이것이 캐럴 소리다:

(...)

나의 급사(急死)를 길게 생애로 늘이고 다시 너희와 함께

죽는 것이 위로가 된다면 위로하러 왔다.

(...)

예수 십자가 처형 이후 그것을 따르는 모방의 십자가 순교가

갈수록 그악스러워지며 모종의 질을 떨어뜨린다.

(...)

이것이 노새 회심곡이다:

내게는 은총도 혼종이었다.

태어난 것이 나인 것만 맞았다.

(...)

내게는 견딤도 혼종이었다.

(...)

뭔가 어떻게든 살려볼 생각이 전혀 없는 극좌와 가진 것 한 푼 내놓을 생각 없는

극우 사이에서...... 그 생각하고 살면 나머지가 모두 천당이지만 입장(入場)들만 있는

지루한 천당이지.

-「실낙원, 그 후의 그러나」 부분

 

25쪽에 달하여 전문 인용할 수 없는 위 시는 “이브의 말”과 “아담의 말”을 지나 “캐럴 소리”와 “노새 회심곡”을 거쳐 “실락원, 그 후의 그러나”를 지나 “산 자의 죽은 자 추모 형식”과 “최후 아니라 그 후의 구술(口述)”에 대한 선언적 언술로 꿰어져 이어진다. 그리하여 “이브의 말”에서 1400년 전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 간의 종교적 분쟁의 일화로 시작된 이 시는 “구술 이전”의 “창비 통합 시상식 및 망년회” 뒤풀이 장소인 “아미고”-“친구”로 끝난다. 창세기로 시작해서 망년회로 끝나는 이 시는 기나긴 지독한 농담인가?

기독교 해석의 역사와 그 폭력적인 분쟁의 역사와,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과 죽음과 부활의 ‘타이밍’에 대한 상념과, 관습화되고 신성을 잃어버린 현실에서 울려 퍼지는, 사은유가 되어버린 죽은 신의 탄생을 조건반사적으로 기뻐하도록 하는 노랫소리와, 새들의 세밀화가 도착한 자연다큐멘터리의 현재, 그리고 여기서 비롯하는 자연과 인간을 TV로 관조하고 있는 따뜻한 안방, 거기서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재구술. 끝과 시작이 물리는. “언제나 구약이 신약의 해석이고 표식 아니라 표지가 표음이다”를 거쳐가는.

고어(古語)-소리문자-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화자의 의식은, 자기가 직접 간접으로 겪은 인류사를 축조하고 허물고 다시 축조하면서 미로들을 다시 그린다. 이 속에서 화자는 이브이고, 아담이고, 무신론자고, 때늦은 캐럴 소리고, 아기 예수고, 불가의 (레위기에서 혼종이 금지된) 노새였다가, 예수였다가, 그러는 모든 순간, 의식의 내레이터인 ‘나’인데, 그 모든 목소리들을 갈아입는 동안, 동시에 ‘나’인 것을 알고 있는 ‘의식 그 자체인 목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다시 끝에서 처음으로 역진하면서 이 모든 것을 구술한다.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 성과 속, 영원과 유한, 삶과 죽음을, 문자 문화와 구술 문화를, 구술 이전의 소리와 음악을, 공연과 기록을, 그러니까, 유한한 피부로만 느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감촉과 그 감촉의 역사와, 그 역사의 정리와, 그 정리의 이론화와, 한 개인의 삶의 총체 안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정신사의 종족 발생은, 잘 분류된 서류철이나 적절한 분량의 소제목들을 정갈하게 달고 있는 깔끔한 연구서나 일정한 정서와 형식으로 질서 지워진 ‘완벽하게 퇴고가 완료된’ 제작품으로서의 작품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 신체 안에 응축되어 있다. 낙원이 끝나고 한 세계가 시작된, 종말의 신화가 연 유한한 인간의 역사 전체가. 예수의 죽음이라는 표본 속에. 거듭 살고 거듭 죽는 보편적 특수자의 비유 안에. 당신의 신체 안에, 그리고, 우리의 의식이 매순간 하고 있는 그 일.

그는 부러 ‘벌어지는’ 현실과 의식 사이의 간섭을 내버려두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그의 급진적인 현실주의는, 그의 피부와 의식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모방하면서, 이것이 정리 불가능하며, 구술이 간신히 그와 비슷할 뿐, 구술 이전의 소리와 닮기를 염원하나, 우리의 의식이 언어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그 직전까지 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보여주려고 한다.

히브리 정신은 그리스 정신과 달리 종합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귀 있는 자 들을진저, 히브리적 사유의 예외와 그리스적 사유의 종합은 부박하게 통합되지 않는다. 구술과 문자는 표음과 표의라서가 아니라 사유 형식이 달라서 녹아들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시대로서의 문자도 벗어버렸다. 월터 J. 옹이 벌써 40년쯤 전에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다시금 우리가 전자문화 안에서 구술적 사유로 회귀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전락과 수난을 또다시...?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게...? 하지만, “늦게라도 반드시 거쳐야 그 직후를/비로소 할 수 있는 것들이/여전히 있고 여전히 더 중요하다./예언의 시대가 예언자들 시대/이전에 끝났던 것이다.”(「미로 활성과 동그라미 등식」 결구)라는 말과 “비극이 지리멸렬해지는 것이/더 비극적 아냐?”(「첫 사랑—삼손과 데릴라」 부분)를 함께.

 

뱀의 말

 

나는 그리하여, 읽어버려서 감응해버리게 된 김정환의 말투를 빌려, 이것은 거듭 허물을 벗는 뱀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실낙원 이후, 뱀은 배로 기어야 하는 형벌을 받았으나, 죽을 때까지 성장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탈피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가 벗는 것은 구세계가 아니라 이전의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이 뱀은 의식적인 인간 주체만의 유비가 아니다. 세계도 뱀처럼 허물을 벗는다. 세계는 점진적으로 진보하지 않고, 진화처럼 돌연히 변이한다. 모든 양질전화는 뜻밖이다. 그 모든 진지한 실감을 지니고 변이하는 경험 주체로서 인간이, 그 모든 거시적, 미시적 역사의 체적을 가지고 변이하는 세계 속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허물을 벗는다.

플라톤에게 ‘문자pharmakon’가 독이자 약이었던 것처럼, 고대 히브리와 그리스에서 뱀은 악과 혼돈의 상징이자 지혜와 생명의 상징이다. 그의 혀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하나는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또 하나는 그것을 거듭 재해석하기 위해서. 그러나 바디우 식으로, 진리는 단일한 진리가 아니라 그 공정들을 의미하며, 카푸토 식으로, “우리의 가장 확고한 진리들조차도 해석의 문제이긴 하지만”, “어떤 해석들은 다른 해석들보다 더 좋다.” 이 진동하는 진리와 충실한 해석의 투쟁 속에서, 문자가 계보화해온 것을, 구술로 재해석하려는 어려운 일을, 허물을 벗으면서 한다. 거듭 벗으면서 한다.

 

400 쪽에 달하는 그의 이번 시집 원고에 꽂아둔 포스트잇 인덱스들이 빛나는 밤이다. 원고 최종 마감일을 또 갱신한 밤이다. 예상했다시피, 종합은 불가능했으며, 종합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을 종합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인덱스들이 말한다. Post-it. 이것을 게시하시오. 이것을 부치시오. 이것-이후.

나는 85년의 시를 읽던 91년을 기억하면서, 근대를 기억하는 포스트근대인으로서 말한다. 아직 잃어버린 세계가 없으므로 이제 막 마주친 세계를 함부로 규정할 수 있었던 그때는 얼마나 용감했던가. 그러나 어느 세대든, 우리는 이미 작동하고 있는 전승된 상황에서부터 출발한다. 갈라진 혀로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과거가 아니라 망각이다.

 

네가 나를 생각할 때 내가 부활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생각할 때 네가 부활하지 않는다.

너를 생각할 때 내가 부활한다. 그러나 어찌

전생과 내세의 에너지 보존 법칙 뿐이겠나?

네 생각이 내 부활의 증거인데 너의 증거의

결핍이 살 투성이이다. 혀, 몸의 미니멀.

-「혀」 전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