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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시인론

고통은 비명처럼 무조(無調)라서: 김혜순론을 쓰기 위하여

않아에 관해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부끄럼 많은 요나 부크롬 씨는 한동안 심하게 망설였다. 고민하던 나머지 친구 병조림 인간에게 상의하고 싶었지만 그는 냉가슴이라는 돌림병을 여직 앓고 있어 말을 걸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맨홀 뚜껑 아래 시궁창에서 쥐 죽은 듯 지내던 크루소 씨에게 물어보았다. 않아는 40여 년 간 글을 써온 사람입니다. 저는 그의 글을 10대 시절부터 읽어왔지만 한꺼번에 몰아서 읽은 적은 없었어요. 않아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않아의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는 시집 열다섯 권과 산문 세 권과 그밖에 그와 대담을 나눈 여러 사람들의 기록과 그에 관한 수많은 논문과 평론을 읽고 그것으로 그의 인생 40여 년을 가늠하여 종합한 뒤 마치 그것이 그에 관한 모든 것이라 이해하는 척하며 40여 매의 글로 정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지요? 불가능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게다가 않아가 가장 최근에 낸 시집은 엄마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그 주제를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지요? 내가 만일 이 글을 쓰게 된다면, 나는 나의 가장 어려운 주제와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크루소 씨도 망설였다. 크루소 씨는 단어 하나하나를 말 그대로 생각했다가 (자신은 거의 전혀 동의하지 않는) 사회적 코드를 추정적으로 적용해서 해석해본 다음 다시 사전을 뒤지는 짓을 반복하는 좀 모자란 사람이었기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어떤 사람의 이름 뒤에 ‘론’이 붙는 것이 통상 그 사람이 쓴 것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구조물로 다듬는 것이라 이해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생각할수록 확신하기 힘들어졌다. 그는 잔소리를 좋아하는 앵무새에게 그 문제에 관해 상의해보았다. 앵무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나는 요구하지 않으면 영원히 쓸 수 없는 것을 바로 그 이유로 쓰지 않으려 하고 있어.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생각을 중단해야 해. 그걸 결단이라고 불러. 요나의 망설임은 바람직하지 않아. 그는 민담에 나오는 바다 속의 맷돌이 소금을 계속 만들어내듯이 행동하지 않을 이유를 만들어내고 있는 거야. 요나는 막연한 것을 열망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지리멸렬을 느끼면서 절대적인 불가능성에 매달리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니? 앵무새는 크루소 씨가 키운다고도, 안 키운다고도 할 수 없는 고양이에게 바통을 넘겼다. 고양이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오랫동안 고양이 세수를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쥐가 눈에 띌 때 나는 쫓을 수도 있고 안 쫓을 수도 있어. 늘 배가 고파서 쥐를 쫓는 건 아니야. 그럴 때 이유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어떤 쥐는 더 매혹적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 매혹적인 쥐는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는 쥐야. 앵무새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 크루소 씨에게 전달했다.

그냥 해. 크루소 씨는 부끄럼 많은 요나 부크롬 씨에게 말했다.

그냥 해. 요나 부크롬 씨는 그래서 40여 년간 않아가 쓴 시와 산문들을 읽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않아는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아니, 않아는 세계에 대한 여러 무대형식들을 고안해왔다. 아무리 고안해도 모자라 계속 고안해야만 했다. 요나는 생각한다. 그 많은 여러 무대형식은 세계가 풍요롭기 때문이 아니라 무한히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눈에 보이는 이름과 형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실제 세계만큼이나 지리멸렬하기 때문에 않아는 저 각질처럼 곧 떨어져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껍데기가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이라고도 부르는 상징적인 구조물들을 말소 하에 두지 않고는 무의식의 불균질한 거울 표면에 비추인 순간적인 진실들을 표현할 방도가 없는 것이라고. 않아는 그 적중할 리 없는 표현을 찾아내려 얼음공주가 되었다가 쥐가 되었다가 돼지가 되었다가 새가 되었다가 바리공주가 되었다가 행성티끌이 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돼지를 먹고 돼지를 죽이고 돼지를 미워하고 돼지를 애도하고 돼지를 받아들이는 돼지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 돼지야
그런데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 재미있는 돼지야
나는 이렇게 생긴 비밀이야 유머가 터질 듯해서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차고 놀 수 있는 오줌보야
- 「돼지라서 괜찮아」부분,『피어라 돼지』(2016)

 

아버지를 키우고 아버지를 품고 아버지에게 맞고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를 애도하고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아버지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는 자라서 아버지를 길렀다

당연히 빗자루로 쓰려고 

 

우리는 아버지를 들고 나가 마당을 쓸었다

가끔 눈도 치웠다

봉당 아래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

날마다 머리숱이 적어졌다

 

저 빗자루를 안에 들여놓아야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망측해라 거기 머리숱 적어진 내가

담배를 피우며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따뜻한 아궁이 속에다

아버지를 길렀다

당연히 잡아먹으려고

-「Delicatessen」, 『당신의 첫』(2008)

 

엄마에게 방기되고 엄마를 물려받고 엄마를 그만두고자 하고 엄마를 벗고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되었다가 그 딸의 딸의 딸의 딸이 되어 엄마를 애도하는 엄마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를 낳지 말란 말이야

내가 시간의 손깍지를 푼다

 

노을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내가 내 따귀를 갈긴다

 

결국 엄마는 나를 두 번 배신했다

첫 번째는 세상에 죽음을 낳아서

두 번째는 세상에 죽음을 두고 가버려서

 

(왜 신생아는 태어나서 새끼를 빼앗기고 온 어미 새처럼 울까?)

 

이윽고 나도 엄마를 두 번 배신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엄마 조심히 가 하고 죽은 엄마를 낳아서

두 번째는 나만 남아서

-「엄마란 무엇인가」 부분,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

 

어떻게 죽은 엄마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딸은 말했답니다

-「목젖과 클리토리스」 결구,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나는 이제 벌을 줄 사람이 없어졌다

-「엄마는 나의 프랑켄슈타인」 결구,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그 모든 명명이 이미 사로잡혀 있는 의미망을 뚫으려 끊임없이 달려간다고. 않아는 전력질주 같아.

않아는 달린다. 않아는 폭풍친다. 않아를 읽고 있으면 않아가 편재하는 세계에서 않아의 무소불위에 놀라게 된다.

요나는 또 다른 의미로 놀란다. 요나가 10대 시절에 읽은 않아는 발랄하고 발칙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의 어둠에 먹힐까봐 어둠의 표면을 슬쩍슬쩍 보여주고 달아나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달릴 거야. 아버지로부터. 이 별로부터. 정의(定意)하는 자들로부터. 판단하는 자들로부터. 사로잡으려는 자들로부터. 허위로부터. 논(論)하는 자들로부터. 학교로부터. 쓸개 빠진 놀이로부터. 요나는 않아가 이렇게까지 오래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거듭 놀란다. 게다가 점점 속도가 빨라진다니. 이 거침없는 달리기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 전위를 가꿔오셨나요?

않아는 대답했다.

그렇게 긴 시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했을 뿐이에요.

그러다보니 ‘이게 아닌데’가 아니면 시 같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했다.

- 「전위 시인」 부분,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2016)

 

않아의 시를 읽으면 삭신이 쑤신다. 하루에 한 권 이상 읽을 수 없다. 쉬지 않고 전력질주하는 느낌 때문이다. 않아의 시를 읽다가 요나는 않아의 몸살이 실제로 전염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않아는 자주 앓는 것처럼 보였는데, 않아가 앓으면서 달리고, 달리면서 앓는다는 사실에 계속 놀랐다. 요나는 않아의 시를 순서대로 아홉 권째 읽고 있을 때 전신에 두드러기가 나고 스테로이드와 항히스타민 주사를 이틀 동안 맞아야 했다. 요나는 크루소 씨와 그의 건방진 앵무새와 무책임한 고양이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요나는 편안하지 않았다. 요나는 않아에게 전염된 것이다. 그리고 않아가 열 번째 시집에 실릴 시를 쓰던 즈음에 어떤 스위치가 터보 모드로 켜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떠난 세상에 귀 하나가 떨어져 내가 살던 세상을 듣는다.

 

귀는 박멸의 기관. 침묵의 입술. 귀가 말하면 세상은 파동이란 이름의 부재로 가득 찬다, 그러므로 귀로 말하기는 언어의 뒤편, 목소리와 이름이 사라진 그 뒷면의 격류로 말하기. 마치 외계인과 만났을 때처럼, 성대 없이 통해야 하는 것처럼. 거울 속에 수장된 여자가 귀로 말한다.

-『슬픔치약 거울크림』(2011)의 표4

 

이것은 영매의 언어다. 요나는 생각한다. 시인-영매는 너무 진부한 은유 아닌가? 군중에 둘러싸인 호메로스에게 질투가 나서 소크라테스가 호메로스의 무지를 폭로하려 붙인 굴욕적인 이름이 아닌가? ‘뭘 모르면서 사람들 홀릴 말을 잘도 떠벌이는 자’라는 명칭을 멋지게 윤색한 호칭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하는 오해와 달리 영매는 무사이 여신이나 죽은 사람의 혼과 교류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온갖 고통과 교류한다. 때로는 죽음 자체와 교류한다. 고통을 느낄 줄 아는 능력. 그것이 시인의 진짜 이름이다. 게을러터지고 쓸모없는 작자처럼 보이는 현대의 시인이, 대속할 수도 없는 세계의 고통을 육감(六感)을 포함한 갖가지 감각으로 느끼고 죽을듯한 괴로움에 시달린다고 말해봤자 빈축만 살 게 틀림없을 테지만. 죽음의 뉘앙스인 고통의 전류는 불안이라는 전해질(電解質)을 통해 온다.

 

고통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저 나무는 나를 모른다. 저 돌은 나를 모른다.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 너도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른다. 나는 죽기 전에 죽고 싶었다.

-「시인의 말」, 『죽음의 자서전』(2016)

 

불안을 무한 가속기에 넣고 시작 단추를 누르면 않아의 내부에서부터 감정의 행성이 팽창합니다. 그러면 않아의 책상, 않아의 책, 않아의 몸이 회오리 속으로 소용돌이쳐 들어갑니다.

꿈에서 사건이 벌어질 때처럼 어떤 의지도 없이 현기증으로 위태로운 우주가 팽창합니다.

무한창공, 광대무변, 팽창하는 우주. 불안 별들이 반짝이며 켜집니다.

 

신의 불안과 않아의 불안이 조우합니다.

-「불안 우주 무한 가속기」,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벌거벗은 고통의 말은 전방위적이어서, 이것이 시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 단순한 사람들은 이것이 명예훼손이나 모독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피아노 속에 숨어 듣는 소리

미친놈의 잠꼬대, 무슨 개수작이냐, 죽여야 해*

이걸 왜 하느냐고 이 피아노 줄을 끊겠다고

왜 이런 거냐고 이런 건 음악이 아니라고

 

그렇지만 설마 모른 척하시진 않겠지요?

당신 몸속엔 당신보다 훨씬 어려운 음악이 들어 있다는 것

 

나는 당신들에게 사랑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사실 절망의 패턴을 만든 것뿐입니다

-「불쌍한 이상(李箱)에게 또 물어봐」 부분, 『날개 환상통』(2019)

* 이상이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할 때 들은 욕설 중 일부.(원주)

 

요나는 않아가 짐짓 천연덕스럽게 유머를 발명해야만 했던 마음의 내력을 생각한다. 유머의 옷을 입고 있어도 고통은 비명처럼 무조(無調)라서 귀에 착착 감기지 않는다.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리 없는 것이다. 안전한 유머는 공영방송에서 방영된다. 모두 함께 웃을 수 있다. 현실을 잠깐 잊을 수 있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통을 이명처럼 앓는 이가 안간힘을 써서 발명하는 유머에는 쇳소리가 섞인다. 그러나 이것이, 차라리 자기를 죽임으로써 누적된 분노를 처리하는 최소한의 품위 유지 방식이라는 것에 정말 설명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돼지

노출증 환자 돼지

 

나는 내 오물을 나의 독자들에게 나눈다

 

만져봐 이보다 더 부드러울 수는 없어

 

내가 쓴 것을 돼지처럼 공중에 매달아주세요

 

뚱뚱보 독재자를 광장에 매달 듯이

-「돼지라서 괜찮아」부분, 『피어라 돼지』

 

 

않아는 최근에 고아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증대된 능력으로 온몸의 신경이 팽팽한 않아는 비명의 음표처럼 어떤 조성 안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흩어진다. 않아는 슬퍼서 모래인이 된다. 엄마에 대한 애도는 않아 자신과 인류와 지구와 영원에 대한 애도로 확장된다.

 

내담자 H: 모래인은 엄마를 부르며 자기 몸을 끌어안는다

(중략)
내담자 H: 아빠가 죽으면 아빠가 오고, 영원히 아빠가

오고

엄마가 죽으면 엄마가 오고, 영원히 엄마가

온다

-「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부분,『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그리하여 이 시집은 엄마 아빠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상담실을 지나 내담자와 상담자의 뒤바뀐 역할로 끝난다.

 

내 시는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엄마도 마찬가지. 비밀스럽고 다급한 느낌이다.(...중략...) 나는 흩어지는 걸 참는다. 나는 너무 많이 본다. 너무 많이 듣는다.(...중략...)

 

상담자 F: 나는 무한이 무서워요.

영원이 무서워요.

내담자 H: 그 무서움을 나에게 주세요.

내가 간직할게요.

상담자 F: 나는 이 우주에서 붙잡을 데가 없어요.

디딜 데가 없어요.

내담자 H: 나를 붙잡으세요.

나를 디디세요.

- 「지하철 쇠 의자에 온기를 남기고 일어설 때, 나는 왜 부끄럽지?-사막상담실」

 

 

요나는 않아가 남긴 마지막 문장을 읽고 침묵한다. “내가 사라진 첫 아침”, “마지막으로 엄마의 뺨을 때리고”(같은 시) 마지막 상담을 끝내며 카우치에서 일어나는 않아. 세션이 끝나면 상담자는 마침내 내담자와 동등해지고. 자기의 무서움을 고백할 수 있다. 애도는 착종된 감정을 에누리 없이 겪고 자기 자신에게로 도착하는 여정. “나를 디디세요.”라는 말은 않아가 더 이상 모래인이 아니게 되었다는 뜻일까, 불안한 모래 위라도 디딜 수밖에 없을 거라는 뜻일까, 또는 “지하철 쇠 의자에 온기를 남기고” 일어선 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느낄 자기의 온기에 책임을 다하려는 예의일까. 전이된 감정에 대한 전이시킨 이의 안타까움. 이것은 독자와 시인의 관계 같고, 않아와 엄마 같고, 엄마와 않아 같고, 않아와 요나 같고, 않아를 따라온 요나는 여전히 슬프고 아직 삭신이 쑤시지만, 어쩐지 한결 마음의 짐을 슬며시 덜어주는 않아의 마지막 말에 오래 머문다.

않아에 관해 글을 쓰는 일은 않아의 40여 년 인생을 종합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구나. 그것은 요나가 10대에는, 20대에는, 30대에는, 그 시집들의 출간 당시에는, 아직 미래였던 시간 속에서 만나지 못한 과거의 현재와 만난 자기 자신과 새삼 다시 곧 과거가 될 현재의 자기를 마주 세워 화해시키는 일이었는지도. 않아를 빌려 끝없이 달리고 있었던 것은 요나 자신이었을지도. 불안의 전해질을 타고 고통을 앓는 않아의 슬픈 전력질주가 마침내 (잠시) 멈춘다. 않아의 “내가 사라진 첫 아침” 이후 이제 앞으로의 달리기는 이제까지의 않아의 달리기가 아니게 된다.

지구가 죽자 달은 위성이기를 멈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