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이제 단일재배를 개시하려 하고 있다. 인류는 마치 사탕무를 재배해내듯 문명을 대량생산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인류의 식탁에는 오직 그 요리뿐이리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힘의 탐구」, 슬픈 열대
아시아 시 교류 심포지움의 발제문을 청탁받은 후 저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권역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중동 아시아와 서남 아시아, 중앙 아시아, 동남 아시아, 동북 아시아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는 건너뛸 수 없을 만큼 넓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륙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유럽과 아시아가 어디에서 나누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시아’라는 말은 대충 ‘비(非)서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강독하기 위해 재독하고 있던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발견했습니다(그라마톨로지의 2부는 슬픈 열대에 관한 탐구로 시작합니다).
제일 오래된 구세계는 나이 어렸을 때 이미 신세계의 밑그림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표면적인 대조나 외면상의 특이성을 경계한다. 그런 것은 단시간 동안밖에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국정서라고 이름하는 것은 고르지 못한 리듬을 말하는 것으로 몇 세기 동안은 의미가 있어서 서로가 함께 나누어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같은 하나의 운명을 가리어 덮어버리는 것이다.
-「마법 융단」, 슬픈 열대(박옥줄 옮김, 한길사, 1998), 278-9쪽.
이 인용문은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 고이아니아의 호텔에 체류하던 추억을 서술하다가 단번에 파키스탄의 카라치를 떠올리고 또 이 카라치의 추억으로부터 인도의 캘커타 여행에서 그가 목격한 ‘비참한’ 동양의 모습을 회상한 뒤, ‘구세계’인 인더스 문명의 ‘마지막 모습’을 ‘신세계’인 남미 대륙의 고이아니아와 연결 짓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이 일련의 연상 과정 속에서 “불쌍한 동양이여!”라고 부르짖으며 ‘천일야화’의 문명이 다다르게 된 말로(末路)를 보고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지구상 어디에 살든 일종의 보편사적 시간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새벽 두 시를, 또 어떤 이들은 밤 열 시를 산다는 식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구조주의자인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뒤쪽으로 120여 쪽을 넘어가면 그는 또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이 부분(인도)을 가리키기 위해 저쪽 대륙에서 그렇게도 자주 사용하는 '아대륙(亞大陸)'이라는 말은 이제 새로운 뜻을 갖게 되었다. 이 표현은 이제 단순히 아시아 대륙의 일부분이라는 뜻을 갖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대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떤 한 대륙을 가리키는 데 쓰이게 되어버렸다. 그만큼 한 순환 과정의 극한점까지 추진된 해체작용이, 종전에는 수억의 인간을 조직된 틀 속에 수용하고 있던 그 구조를 파괴해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에 와서는 이들 인간은 역사가 생성한 허공 속에 버려져서 공포, 고통, 굶주림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동기에 의해서 좌충우돌 사방팔방으로 내몰리고 있다.
-「장터」, 위의 책, 300쪽.
그가 추억하는 인도는 문명의 폐허, 언젠가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제는 그 윤곽과 재만 남은 유적지 위에 끔찍한 잔여물들이 펼쳐져 있는 거대한 폐기물 처리장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아대륙”의 대리표상인 인도는 자기 문명에 주어진 24시간을 모두 살고 난 뒤 자정 너머의 빈 허공 속에 체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인도의 ‘현재’는 그러하되, 인도-아대륙의 ‘역사’는 이미 다 쓰인 해지고 낡아빠진 참고도서처럼, 남미 대륙이라는 눈앞에 펼쳐진 낯선 세계와, 탐사를 위해 떠나온 자신의 유럽 문명 양자 모두의 수수께끼를 이해하려 할 때마다 어떤 유사성을 드러냅니다.
이 인용문은 자세히 읽으면 매우 혼란스러운데, 그것은 인도가 다른 종류의 보편적 역사 시간 속에서는 아직 ‘대륙조차도 아닌 어떤 곳’으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는 이 ‘문명 일반의 운명적인 보편 시간’ 이외에 또 다른 ‘보편사적 시간’을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헤겔에 의해 정식화된, ‘문명은 동쪽에서 시작되어 서쪽에서 완성된다’는 서구 중심적 문명사관과,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발전사관이 결합한 이 시계는, 근대 이전의 각 문명의 시계를 부수어버리고 모든 지역의 자본주의 산업 발달의 정도에 따라 편향적으로 각 지역을 명명하기 시작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시간을 의식한 데서 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탕무처럼 대량 재배되는 단일종의 문명’은 이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대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떤 한 대륙”으로서의 아시아는 이제 이 새로운 시계 침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뒤늦게 뛰어가고,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질서 이전의 ‘개별 문명’은 과거 속에 남겨진다는 점에서 레비-스트로스에게 열대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는 비애감을 자아냈을 것입니다. 당시 이 레이스를 따라잡는 것마저 포기한 것처럼 보였던 인도에 대한 연민과 비애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이 책 전반에 걸쳐 그가 보여주고 있는 ‘다른 문명’의 가능성이라는 ‘차이에 대한 존중’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실, 이러한 비애감은 어떤 문명도 영원할 수 없으며, 각 문명에는 흥망성쇠의 기승전결이 있다는 뿌리 깊은 운명론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아니, 우리는 이것을 역사적 인식이 언제나 그 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비관주의라 불러야 할까요. 역사는 언제나 시공간적 유한성으로 귀결되는 사건들의 무한회귀처럼 보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귀납적이고 운명론적인 역사적 사유의 특징은 군집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이기적이고 잔혹한 본성이 없다면 성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의 사회는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그 사상가들이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예속(隸屬)을 분비해가면서가 아니면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그 지리적`사회적`지적 공간 안에서 답답해졌을 때는 한 가지 간단한 해결책이 그를 유혹할 우려가 있다. 그 해결책이란 인간이라는 종(種)의 일부에 대해서 인간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 아시아에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아시아가 미리 보여주는 우리의 미래상이다.
- 위의 글, 310-311쪽.
그는 카스트제도가 인구 과밀에서 비롯된, “예속을 분비”하면서 사회를 존속시키는 필요악이며, 위계질서를 통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처리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에게 이 글을 쓰던 무렵 벌어지고 있었던 나치 독일의 인종말살 작업의 오래된 거울상으로 여겨졌던 듯합니다. 이 거울 위의 먼지를 털어내면, 빽빽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이 제도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만들어내고 온갖 합리화와 정당화를 거쳐, 인간이라는 동종(同種) 내의 작은 차이들을 이유로 조금쯤 다른 사람들을 솎아내고 있는 끔찍한 그림이 나타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책의 후반부에서 “만약 서구가 민족학자들을 만들어내었다면, 그것은 서구가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를 다른 사회의 이미지와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럼주 한 잔」, 같은 책, 698쪽)라고 쓰고 있는 것이지요.
대량생산 중인 단일 문명에 관해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자신도 일상적으로는 때때로 이 단일 문명의 시계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의 위치를 끝없이 정위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해나가기를 독려하며 매년 경제 성장률을 체크하고 기획하는 각국의 정책과 홍보 속에서 말입니다.
저에게 레비-스트로스가 뉘앙스로만 모호하게 가정한 두 개의 시계는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문제적인 두 축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나의 시계는 종족/민족/국가의 일정한 단위를 가정하는 개별 문명의 시간을, 또 하나의 시계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하에서 이들 종족/민족/국가의 계급적 시간을 재고 있었던 것으로 말입니다. ‘과거 모든 문명’의 운명과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자본주의 질서’라는 두 개의 시계는 언제나 특정 지역을 중층 결정하는 두 개의 패러다임으로 기능합니다. 지금, 저 인용문들 속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각기 다른 시간 속에 병존하던 지역 문명들의 시간이 (서구에 의한) 전 지구적 질서의 시계에 의해 대체되고 있음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구에서 태어나 전 세계로 퍼져 유형 무형의 전투들에서 무수한 승전보를 울린 전 지구적 자본주의 문명--우리는 이것을 모더니티라고 부릅니다. 민족학과 마찬가지로 많은 지역학 연구가 이것의 필요에 따라 생겨났고, 모더니티를 주제로 펼쳐졌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비감은 보편화되는 모더니티 질서에 의해 사라지고 있는 크고 작은 지역 문명들의 죽음과, 모더니티 역시 이전의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파국을 맞을 거라는 운명론적인 비관, 즉, 모더니티 앞뒤의 지나간 죽음과 다가올 죽음 양방향에서 비롯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눈앞에 있는 ‘아주 오래된 듯 낡아 보이는 신세계’의 비감을 느끼는 주체로서는 매우 시적이고 직관적인 어조로, 하지만 이들 낯선 동종의 인간들에 대한 탐사자인 외부인으로서는 상당히 객관적인 포즈를 취하면서, 혼란스럽고 아름다운 에세이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저는 또 한국 시인 김지하가 독재 정권 하에 있었던 1970년에 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80년대 이후 그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자기 사상을 펼쳐가고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무모하리만치 용감했던 70년대의 김지하를 떠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동양의 비참’, 즉 모더니티를 주제로 한 지역 분할 내에서 제3세계라고 불리우는, 세계의 주변부에 거주하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열정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 자기 표현들 속에는 7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이데올로기 범주를 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모티프들이 현저히 드러나고 있었지요.
민족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70년대 초반 한국 현대문학사의 한 중요한 결절에서 그의 시가 수행한 역할은 이것을 우선 외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후 전개되는 소위 리얼리즘 문학에 있어 그가 하나의 프로토타입인 것은, 70년대 김지하의 민족과 계급이 우리가 지금 그리고 있는 분할된 지형들의 분명한 지점에 아직 속하고 있지 않은 다소 단순한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단순성이야말로 그 안에 많은 뉘앙스들을 간직할 수 있게 했다면 과언일까요. 김지하의 계급과 민족은 아직 아무런 ‘-이즘’의 형태가 아니었을 뿐더러, 식민 경험을 가진 많은 신생 독립국가들과 유사성을 가질 어떤 감정의 이름에 가까워 보입니다.
네, 이것을 ‘제3세계 시민 감정’이라고 이름 붙여보면 어떨까요. 제3세계의 시민들은 지구적으로는 하층민에 속했으며, 역사적으로는 자기 고유의 관습과 전통을 모호하게, 그러나 고집스럽게 전승하기 ‘시작하고 있는’ 지난 문명의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고유성’에 대한 집착이 모더니티의 자극으로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많은 연구 자료들은 중층결정의 지점들을 방증합니다. 그들은 모더니티 앞뒤 부고(訃告)의 소문과 불안, 정치`경제`이데올로기 같은, 토대와 상부구조가 엉망진창으로 중층결정하는 혼융 상태 속에 꼼짝없이 끼여 있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70년대 김지하의 시들은 이 두 죽음 사이의 “불쌍한 동양”에서 단말마처럼 사람들을 깜짝 놀래켰습니다. 사람들이 우선 놀라기부터 한 것은 이 단말마가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이 공식적인 시공간에서는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분노와 비애의 고성방가, 그 음조와 음색을 매우 닮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건 물론 사후적으로 찾아온 생각일지도 모르지만요. 아무튼, 이 비참 속에서 터져나온 단말마는 우선, 놀라움과 쾌감을 주었습니다. 시인 자신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이야기해볼까요.
그는 “시는 일단 물신의 폭력 아래 여지없이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이 명백한 패배의 시간이야말로 시의 패배를 물신의 폭력에 대한 창조적 정신과 시의 승리로 뒤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한 것”이며, “폭력은 그 폭력의 피해자 속에서 비애로 전화”되는데, “이 무한한 비애 경험의 집합, 이 축적을 우리는 한(恨)이라고 부른다.”(「풍자냐 자살이냐」, 김지하 전집 제 3권, 실천문학사)고 썼습니다. 그리고 같은 글에서, 선배 시인인 김수영이 “추(醜)를 양성(釀成)시킨 점”을 높이 평가하며 “추야말로 철없는 자들의 말장난에 의해 꾸며지지 않은 비애의 참모습이며, 분 바르지 않은 한(恨)의 얼굴이다. 추야말로 폭력의 안이요 바깥이다. 추야말로 모순에 찬 현실의 적나라한 형상이다.”라고도 썼습니다.
이것은 더럽고 지저분하며 자비를 구걸하는 20세기 초반 인도의 모습을 ‘불쌍한 동양의 비참’으로 파악했던 레비-스트로스의 사유방식을 뒤집어 전유한 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김지하가 이야기하는 ‘민중의 추(醜)’는 한편으로는 일국의 피지배 계급의 현 상태에 대한 미학적 규정에 귀속되는 동시에, 또한 서구에 대하여 후발주자에 속하는 제3세계 전체의 계층적 개념으로서, 모더니티의 범주에서는 비서구에 대응하는 유비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봅니다. 말하자면, 김지하는 ‘추’를 중심으로 시화된 제3세계 민족감정이라 할 만한 것을,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 물신의 폭력에 대항할 핵심적인 에너지의 외화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민중의 추’에 대한 거침없는 묘사 때문에 노벨상 수상작가인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자신의 책 소설의 방법에서 「똥바다」를 비롯한 김지하의 담시(譚詩)를 러시아 형식주의자인 미하일 바흐친의 용어를 빌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명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김지하를 논하기에 앞서, 멕시코 민중 판화가인 호세 가다르페 포사다의 작품에서 자극을 받고 이 작품들에서 표현된 ‘기형적인 것’으로부터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표현을 발견합니다. 그는 “현대라는 이 시대가 멸망을 눈앞에 둔, 커다란 위기의 시대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현대의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변성 쪽에 속해야 한다. 중심 지향성에 속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표현은, 역시 주변성 쪽에서나 구조적인 열성(劣性) 쪽에서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가 없다.”(「주변에서 주변으로」, 소설의 방법, 177쪽)고 쓰고 있습니다. ‘구조적인 열성’, ‘기형적인 것’과 동일한 맥락 속에 있는 김지하의 ‘추’는 깨끗하고 완전하고 조화로운 것으로서의 근대적 이상과 반대편에 위치함과 동시에, 모더니티가 내장하고 있는 위기의 본질을 표현할 베이스캠프가 되는 것이지요. 다음의 인용문을 앞서 제시한 레비-스트로스의 브라질-인도의 연상 장면과 비교하며 읽어보고자 합니다.
멕시코 지식인들에게 유럽이나 북미의 사람들은 (...) 타인의 전형이다. 한편 멕시코 국내에 있는 인디오들은 지식인에게는 또 다른 타자이다. 그리고 멕시코 지식인들은 문화의 중심에 있는 유럽이나 북미의 인간들에게 타자이고, 멕시코라고 하는 주변적인 곳 내부에서도 주변적인 인디오들에게 타자인 것이다. 멕시코의 지식인들은 두 개의 층을 이루는, ‘존재의 본질적인 이질성’에 내동댕이쳐져 있다. 이러한 자각에 서 있는 그들은 이 비틀린 모습을 자신들 삶의 본연의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주변에서 주변으로」, 소설의 방법(노영희`명진숙 옮김, 小化, 1995), 186쪽.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의 풍경으로부터 ‘마법 융단’을 타고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 이집트로 날아갔던 것과 달리, 오에는 멕시코에 내재한, 이중적 의미에서 타자인 멕시코 지식인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본질적 이질성’을 알고 있는 자의 위치에 관해 쓰고 있는 것이지요. 주변 세계의 지식인, 글을 쓰는 자란, 바로 서구와 근대로부터 기형, 열성, 추로 우선 특징 지워진 ‘타자의 타자성을 알고 있는 이중적 타자’로서 어려운 자리에 놓입니다.
김지하의 「똥바다」(개제(改題) 전 일본어 제목은 「분씨물어(糞氏物語)」)에 등장하는 일본인 분씨(糞氏)는 “기형적인 일본인”으로서, 위생과 절제를 요구받는 집안에서 태어나 ‘조선’에 기생관광을 와서 그동안 참았던 똥을 서울 한복판 이순신 장군상 위에서 다 누고 ‘똥바다’를 만든 뒤, 새똥을 밟고 미끄러져 똥바다에 빠져 죽는 희극적인 인물입니다.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하여 첫 옥고를 치른 바 있는 김지하의 이 시는 판소리라는 잊혀져가는 전통 형식 속에 반(反)제국주의적 민족 감정을 싣는 한편, ‘똥바다’를 치우려 노력하는 학생들, “공순이 공돌이”, 농사꾼, 날품팔이, 그리고 이 속에 섞여 있는 “거지 시인”인 화자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민중의 곤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제반 하층민들의 에너지와 의지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드러냅니다.
또한, 바흐친이 라블레의 소설들에서 그로테스트의 미학을 발견할 때 그러했던 것처럼 오에 역시 ‘똥’이 주는 노골적인 풍자적 효과에서 민중의 힘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분씨 어머니가 분씨에게 행하는 (똥은 조선에서만 누어야 한다는) 배변 훈련과 분씨의 (이순신 장군 동상 위에서의) 배설 행위가, 다소 무의식적인 혼융의 방식으로 당시 민족 감정의 윤리와 자본주의 통화(通貨) 경제에 대한 불만 양자에 대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똥’은 정신분석에서도, 또 속담이나 꿈 풀이 등의 한국 민속 정서 속에서도 종종 돈을 의미하지요. 항문기의 배변 훈련은 성인이 된 이후의 돈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는 프로이트의 생각, 똥 꿈을 꾸면 재운이 좋다는 세간의 믿음은 사회화된 상징적 기호 체계 아래에서 기동하는 금기 없는 무의식의 반영입니다. 냄새 나고 더럽지만 또한 무의식적인 원관념 속에서는 자기의 첫 번째 생산물이며 선물로 기능하는 것, 제국주의적 주인공 분씨에 의해 천지사방에 깔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자본의 문제, 그리고 자기가 만든 똥바다에 빠져 죽는 분씨의 비극을 통해 민족 감정을 배설하는 쾌감을 안겨주는 두 가지 핵심 주제가 이 시에는 담겨 있었습니다.
오에는 이 시의 해석을 통해 그 자신이 앞서 인용한 독일계 서(西)사모아 작가 알버트 웬트의 자유의 나무에서 뛰어내린 여우에서 예수가 아니라 이스카리오테 유다가 재생했던 것처럼 분씨(糞氏)가 재생하기를 희망합니다. “기형적인 일본인” 분씨가 만일 재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관습의 실천을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그는 「똥바다」와 같은 ‘민중의 추’의 표현이 일본 문학사에서 배제되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것이 천황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반성은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 발언으로 나아갑니다. 오에는 ‘분씨를 대신하여’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외부에서 발견한 낯선 내부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비판 대상과 거리를 두면서도 스스로 그 일부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이중성의 발견으로부터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구성된 잠정적인 선/악의 주체, 혹은 박해자/박해받는 자라는 이항대립 구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우리가 타자와, 타자를 경유한 자기의 소통을 통한 자율적인 변화 가능성을 믿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구도 자체의 변화가 가능하려면 이 계속되는 경유의 모험은, 네, 실로 피곤한 일입니다만, 계속되어야 합니다.
실상 이 ‘본질적인 이중성’은 중심과 주변, 문명과 자연, 제1세계와 제3세계 등의 각종 대립적인 도식들 속에서 서로 중첩되어 있는 타자성(의 타자성의 타자성...)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타자의 타자는 물론, 완전무결한 동일자로서의 ‘나’가 아닐 것입니다.
앞서 서두에서 논의했던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발견되는 혼란한 이중적 서술들에서도 그 희미한 흔적이 발견됩니다. 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비판적으로 면밀히 독해하면서 레비-스트로스의 문명/순수한 야생이라는 대립항에 근거한 사유방식 속에서는 레비-스트로스라는 관찰자 자신이 바로 오염원이라는 모순을 지적하고, 사실은 그러한 명명백백한 이항대립이 환상이며 구조적으로 양자는 이미 서로 타자인 상대방을 오점으로서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지요. 그때, 우리는 명백한 대립의 선명한 정치적 지형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가 미국 학자인 마이클 하트와 함께 저술한 제국에서 미국과 같은 제1세계 안에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의 뉴올리언즈와 같은 제3세계를 포함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때, 저는 모더니티를 중심으로 한 민족/국가나 권역 중심의 담론들이 가진 맹점들을 우리들이 점점 더 분명히 인식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명성을 잃어버리고 보다 모호해질 수 있습니다. 외부로 자기의 오점들을 모두 투사해 넣고 미워해버릴 분명한 ‘적’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 무한한 자율적인 변화 가능성을 가진, 저 이웃처럼 친근하고 원수처럼 밉고 싫은 그의 눈에 비친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도 그를 ‘나’에게서 발견하기 바랍니다. 이 발견과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갈등으로 가득 찬 우리의 고민과 반성일 것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실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일 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3년 전 말레이시아에 갔던 경험이 생각납니다. 아시아 각국의 문화 학술 교류를 목적으로 한 대회에 저는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여 5일간 말레이시아 피낭에 체류하였는데, 한국이 아닌 다른 아시아 나라에 가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지요. 이 열대의 이방에서 ‘KFC’나 ‘BBQ’ 같은 익숙한 간판에서 무심코 안도감을 느끼는 저 자신을 발견했을 때, 저는 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프랜차이즈들의 이름으로 서로 다른 두 공간을 묶고 있다는 데서 무언가 가공할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이 간판들이 이방들을 엮어주는 보편인양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사유의 보편을 발견했지요. 제가 참관한 컨퍼런스의 기조 강연을 맡았던 패리쉬 누어(Farish A. Noor) 박사는 힌두, 이슬람, 유교의 다문화 국가에서 중국과 이슬람, 그리고 힌두 혈통을 모두 물려받은 자신의 혼종적 정체성이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이 ‘사이’의 문제들에 몰두하도록 추동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 모든 정체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도대체 선명성을 결여하고 있는 그 ‘정체불명성’이, 명백하다고 간주되는 경계들을 초과하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만일 읽고 쓰는 자들이 그 자신 하나의 ‘구조적 열성’이자 비유적인 의미에서 제3세계의 기능을 맡고 있을 때, 그래서 하나의 완결된 구조처럼 보이는 어떤 공동체 속에서 명명할 수 없는 빈 공간, 일종의 얼룩처럼 존재하고 있을 때, 그는 그 자신이 당분간 귀속해 있는 그 범주들을 지탱하고 있는 대립적인 개념들의 ‘사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사이’들은 어디에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보편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우리가 타자와 함께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어떤 공간이 있다면 그것은 이 사이로부터 가능하지 않을까요?
루마니아 태생이면서 고집스럽게 독일어로 시를 썼던 파울 첼란은 아도르노와의 가상의 대화록에서 “모든 시인은 유대인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지요. 물론 이 말은 그보다 먼저 러시아 시인 마리아 츠베타예바가 한 말입니다만, 강제수용소 출신의 첼란이 이 말을 썼을 때, 저는 ‘유대인’이라는 말을 고향도, 돌아갈 곳도 없는 사람, 그래서 자기가 발붙이고 있는 곳에서 고향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 고향을 미래에 둔 사람, 폭력을 기억하면서 그 비애와 함께 그것을 넘어서야 할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전통적인 서정 시인이 타자와 자신을 동일화시켜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을 지향했다고 한다면, 현대의 시인은 자기와 가장 익숙한 주변 환경조차도 낯선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방화(異邦化)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고요. 나치 독일이 제거하고자 했던 것은, 이 불분명하고 편치 않은 정체불명의 오점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왜 ‘아시아’를 찾기 위해 프랑스 민속학자인 레비-스트로스의 글로 이 발표를 시작했는지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남미 원주민들을 찾아 서구의 잃어버린 꿈을 목격하고자 했던 그는 실은 유대인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글 속에 새겨진 자기 자신도 모르는 이중성을 문자에 대한 물음을 통해 밝히고 있는 데리다 역시, 무슬림 어머니와 유대인 아버지를 둔 유럽 속의 아시아, 서구 정신사 속에 비서구로 자리하면서 자기 동일성의 환상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던 얼룩이지요. 저에게는 이러한 사실들 자체가 훨씬 이전부터 경계들을 초과하여 방랑하고 있었던 시적인 메타포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이 글에 대한 청탁서에 첨부되어 있었던 중국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저는 ‘중국’을 발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계의 균열로서 저와 동시적으로 다른 공간을 살아내고 있는 ‘시적인 것’들을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연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우리의 태생적인 물질 조건들과 삶을 구성하는 상징계 속에 그 상징들로 엮인 거대한 밀도의 모래알들을 던지고 있는 이 ‘시적인 것’, 저 존재하는 얼룩들의 보편성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아시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모든 시인은 유대인이다”라는 첼란의 명제처럼, 모든 시인은 또한 정체불명의 정체를 가진 아시아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몇 개의 문명을 지나 신세계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시인들은, 저 오래된 미래의 기억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아시아는, 이미 미래에 있지 않을까요? 그 미래의 조짐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지 않은가요? 아시아는,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지만, 가장 익숙한 오늘의 이 거리, 이 일상에서 끊임없이 이방을 발견하고 있는 우리의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시적인 것’으로 있지 않을까요? 서로의 얼굴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이 거대한 이방에서, 우리는 우리를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요?
‘단일 재배된 문명의 재료로 차려진 유일한 요리’를 먹어야 하는 지구의 이 슬픈 식탁에서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