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25

마음의 육체와 공석(空席)인 하느님

김기택의 시집과 황인찬의 시집을 연달아 읽고 있으면 처음에는 육식 동물이었다가 그 다음에 갑자기 초식 동물이 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빠지게 된다. 이 두 시집은 마치 카인과 아벨의 전혀 다른 유일신 숭배 스타일처럼(농부인 카인은 신에게 곡물을, 목동인 아벨은 짐승의 살과 피를 바쳤다) 전혀 다른 존재감의 농후한 냄새를 풍긴다. 이런 비유를 곧장 떠올리는 것은 두 시인 모두 어떤 유형의 신(보편자)적인 것을 암시하거나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음의 유물론: 김기택, 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 갈라진다 갈라진다 저자 김기택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2-10-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진 우리의 현실에서 진정한 삶이 희망과 ... 김기택의 시는 줄곧..

지난 글/review 2013.02.24

논리와 착란

서평) 함기석, 오렌지 기하학, 문학동네, 2012 논리와 착란 과학적 공리의 성립은 종종 개념의 비약에 따라 출현한다. 줄리언 제인스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이 완성한 현대 물리학 공리들의 단초들은 대개 그가 아침에 면도하는 동안 떠올린 것인데, 그런 일이 왕왕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갑작스런 아이디어의 출현에 놀라 베이지 않도록 면도날을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새뮤얼 구테풀란과 마틴 탬니는 그들이 공동 저술한 논리학 서론에 논리규칙을 건너뛰는 개념의 비약에 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어느 날 아침 E(아인슈타인) 교수는 우유(milk)를 정사각형(squere)의 시리얼(cereal) 그릇에 따르다가 문득 E=mc²이 떠올랐다. 실제 사유의 ‘흐름’은 아마 ‘우유(milk)하고...

지난 글/review 2012.09.10

도리 없이

허연,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서평 도리 없이 정한아 첫 번째 시집 불온한 검은 피가 나왔을 때 그는 삶의 배경에 드리워진 죽음의 냄새를 쫓으며 실존철학을 읽고 있는 ‘젊은 시인’이었고,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상자했을 때, 그는 삶을 위해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용서할 길 없어 밤에 마주친 도둑 고양이의 두 눈을 보며 추하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새기고 있는 ‘범인(凡人)’이 되어 있었으되 하나의 ‘법’이 되고자 했다. 세 번째 시집은 이 ‘범인’의, 잃어버렸으나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지층을 계속 곱씹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장기는 후회다. “혼자 아프니까 서럽다”는 낡은 문자를 받고, 남은 술을 벌컥이다가 덜 자란 개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추적추적한 거..

지난 글/review 2012.09.01

문학 주체를 구원하기 위하여—작품이 되고자 한 비평의 욕망

서평) 해럴드 블룸, 영향에 대한 불안(양석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마크 에드먼드슨이 1995년에 출간한 철학에 반대하는 문학, 플라톤에서 데리다까지(Literature against Philosophy, Plato to Derrida)는 (시에 대한 심미적 향유가 줄어들고 사회적인 담론에 시가 시달릴 때마다 여러 번 출현했던) ‘시에 대한 옹호(A Defence of Poetry)’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은1960년대 이후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는 갖가지 사회 이론과 신역사주의에 잠식당하기에 이른 미국 문학 비평계의 현황을 이른바 ‘문학주의자’의 시각에서 비판하면서 실낱 같은 희망의 한 가닥으로 마지막 장에 해럴드 블룸의 견해를 배치하였다. 그의 책에 인용된 블룸의 1987년 인터뷰의 한..

지난 글/review 2012.08.17

서평) 고등어 소년은 어떻게 리틀보이가 되었는가

조인호 시집, 방독면(문학동네, 2011) 아이는 무서웠다. 첫 번째 무서움은 어머니로부터. “만삭의 어머니가 생선을 굽던 비릿한 어느 저녁, 프라이팬 밖으로 튕겨오르던 기름방울처럼 지글지글 나는 태어났지 아기야,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어머니는 나무 도마에 흥건히 젖은 피를 닦으며 말하셨지 그날 이후로 나는 똑똑한 생선 한 마리”(「고등어 나르시시즘」). 고등어가 된 아이는 어머니와 유치원 선생님과 친구들과 첫사랑으로부터 조롱당하고 명령 받고 버림받고, “물 좋은 직장 하나 만나지 못하고 퀭한 생선 눈깔을 지닌 실업자”가 되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랩으로 포장된 고등어 한 마리로 태어나” “얘야, 어머니 같은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여전히 같은 말만 하”..

지난 글/review 2011.09.08

세계를 늘릴 것인가, '나'를 늘일 것인가

아메바(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최승호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증식하는 유령들; 최승호, 아메바(문학동네, 2011) 등단 이후 꾸준히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최승호의 이번 시집은 자기 자신의 말들로부터 뻗어나간 실뿌리 같은 상상의 편린들을 그 원천들과 함께 수록하고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인터뷰들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충분한 기획 의도를 가지고 수행된 것으로, 이번 시집의 출간이 시인 자신에게는 등단 이후 30여 년간의 자신의 詩作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것을 ‘실험’이며 ‘일종의 문체연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연습은 ‘완성된 한 편의 시’라는 관념을 잠시 괄호 속에 넣고 ..

지난 글/review 2011.05.25

흑백의 밤 녹색의 불면증

 아마도아프리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제니 (창비, 2010년) 상세보기 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시가 너무 명백할까봐 걱정하고, 또 너무 모호할까봐 걱정한다. 어떻게 하면 잘 숨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머리카락이 보이게 숨을 수 있을까. 어떤 시인들은 시가 재현하려는 대상의 전체가 지닌 뚜렷한 윤곽, 황금비율, 색채, 의미의 완전한 전달에 골몰하고, 또 어떤 시인들은 아직 드러난 적 없지만 (그래서 공상이나 망상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도 있을) 세계에 편재하는 ‘무엇’의 손가락, 휙 돌아서 막 달아나며 사라진 실루엣에 불과한 뒷모습, 바람에 흔들린 옷깃 같은 단서들(만)을 독자에게 인색하게 제공한다. 이 기술들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이제까지 제출된 모든 시론들을 다..

지난 글/review 2011.04.09

우리가 만일 아무짝에도 쓸모없대도

 어깨위로떨어지는편지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기인 (창비, 2010년) 상세보기 이기인 두 번째 시집의 주인공은 얼핏 농부,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 공장 노동자, 노숙자로 나타나지만 실은 사물들, 도구적 사물들인 것 같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는 인색했던, 경험 주체의 순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신산한 삶을 고백하는 한편, 관찰자적인 묘사를 적극 활용하여 사물-주체/대상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존재론적인 시선을 심화시키고 있다. 가령, 시집에서 드물지만 매우 고백적인 시 「쌀자루」의 한 구절에서 “돈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미발표 시의 제목을 바꾸는” 가난한 1인칭 시인 화자의 쓰디쓴 고백(“아이들 것은 그렇다 치고 저 잘난 나의 수저는 왜 이토록 입이 큰가”)에는 얼마간 수줍음이 서려..

지난 글/review 2010.08.05

고전주의자의 도데카포니

 천문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조연호 (창비, 2010년) 상세보기 성숙한 음악은 실제로 들리는 것 자체에 대한 의심을 만들어낸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아르놀트 쇤베르크」 조연호의 시를 찬찬히 읽고 있으면 어느새 우리의 관습어법이 처음 보는 이방의 관습어법과 함께 뒤섞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낱낱의 단어만 새로워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새로움은 숙어 형태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다른 문법의 형태로 틈입한다. 즉, 조연호의 시가 새롭다면 그것은 그의 시가 실험실에서 기존에 있는 생물들의 팔다리를 방금 막 이어 붙인 프랑켄슈타인이어서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대륙에서 개별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생태를 이미 갖추고 있는 곳에서 생물들은 가장 말초적인 신경까지 유기적으..

지난 글/review 2010.08.05

저 거대한 눈이 쏘아 보내는 가시광선

 생의빛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조은 (문학과지성사, 2010년) 상세보기 ‘생의 빛살’이라는 제목은 얼핏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에 찬 주광성(走光性)의 노래들을 담고 있을 것 같지만, 이 시집의 시들은 민감한 동공을 가진 자의 통증에 관한 노래다. 그는 빛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종종 서늘한 그늘로 들어가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찌르는 듯한 이미지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눈을 감아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얼핏 조은은 삶과 죽음, 빛과 어둠 같은 대립적인 언어들 사이에서 편향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이 대립항들은, 대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모순으로 가득 찬 삶에 동력을 부여하는 톱니바퀴들이다. 그렇지만 이 모순조화의..

지난 글/review 2010.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