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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흑백의 밤 녹색의 불면증



아마도아프리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제니 (창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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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시가 너무 명백할까봐 걱정하고, 또 너무 모호할까봐 걱정한다. 어떻게 하면 잘 숨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머리카락이 보이게 숨을 수 있을까. 어떤 시인들은 시가 재현하려는 대상의 전체가 지닌 뚜렷한 윤곽, 황금비율, 색채, 의미의 완전한 전달에 골몰하고, 또 어떤 시인들은 아직 드러난 적 없지만 (그래서 공상이나 망상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도 있을) 세계에 편재하는 ‘무엇’의 손가락, 휙 돌아서 막 달아나며 사라진 실루엣에 불과한 뒷모습, 바람에 흔들린 옷깃 같은 단서들(만)을 독자에게 인색하게 제공한다. 이 기술들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이제까지 제출된 모든 시론들을 다 읽어도 그 다양성과 경우의 수들을 다 서술하기 힘들 것이다. 이 방식들의 고유성이 두드러질 때 우리는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어떤 시가 누가 쓴 시인지 알아챈다.


이제니 시의 특징들 중 뚜렷한 몇 가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고 싶다. 1. 시의 진행이 자유연상에 크게 빚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꿈-작업과 유사한 형태로 드러난다는 점, 2. 반복을 통한 의미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의 고양, 3. 낯선 이름들의 천연덕스러운 사용(이 낯선 이름들은 마치 본래 있었던 것처럼 시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호명되고, 돌아다니고, 화자와 관계를 맺는다). 이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들은 사실 각각 따로따로 강화되어온 특질들이라기보다는 이제니 식 몽상이 가진 전체론적인(holistic) 의미 세계에서는 분리하기 힘든 성질들로 보인다. 꿈-작업에서 종종 그렇듯이, 시에서 명명된 하나의 이름(이나 사물의 형상)이 현실에 대응하는 지시체를 반영하는지, 단순히 그 지시체의 현현인지 또는 그것의 매우 사적인 의미인지, 혹은 어떤 다른 지시체의 왜곡된 결과인지는 언제나 개별 사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