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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우리가 만일 아무짝에도 쓸모없대도


어깨위로떨어지는편지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기인 (창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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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인 두 번째 시집의 주인공은 얼핏 농부,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 공장 노동자, 노숙자로 나타나지만 실은 사물들, 도구적 사물들인 것 같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는 인색했던, 경험 주체의 순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신산한 삶을 고백하는 한편, 관찰자적인 묘사를 적극 활용하여 사물-주체/대상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존재론적인 시선을 심화시키고 있다. 가령, 시집에서 드물지만 매우 고백적인 시 「쌀자루」의 한 구절에서 “돈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미발표 시의 제목을 바꾸는” 가난한 1인칭 시인 화자의 쓰디쓴 고백(“아이들 것은 그렇다 치고 저 잘난 나의 수저는 왜 이토록 입이 큰가”)에는 얼마간 수줍음이 서려 있어 그 진솔함을 방증하고, 여전히 먼지가 앉거나 가시투성이이긴 해도 화자와 정서적으로 친밀한 가족이나 지인들은 “할미꽃”, “소금꽃”, “엄마꽃”, ‘선인장(꽃)’ 등 애잔한 이름을 부여받는다. 반면, 주로 3인칭으로 쓰인 시들은 의도가 명확한 다큐멘터리의 카메라처럼 대상을 집요하게 시선 안에 붙들어 맨다. 이런 유형의 시들에서 드러나는 주된 관찰 대상은 대개 풍경의 주변으로부터 점점 도드라져 전경화되는 특징을 보이는데, 배경과 소재 모두 황폐하고 낡고 무너지기 직전의 이미지를 일관적으로 고수하고 있다. 장시간에 걸쳐 실시간 영상을 담는 롱테이크 기법에 비견할 이런 종류의 묘사는 종종 매우 세부적이고 정적인 경향을 띠면서 곧 전경화될 대상의 무용성(無用性)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데 동원된다. 이 세밀한 묘사, 시어의 음가(音價) 그리고 이미지가 성공적으로 만나는 현장에서 황폐한 풍경은 그럴 수 없는 사실성을 획득한다. 예컨대, 시 「공가(空家)」는 철거 직전의 풍경을 건조한 어조로 스케치하는데, “공가”를 새들이 빈집 지붕을 쪼는 의태어로 사용하거나 결구에서 굴삭기가 “조용한 노인의 잠을 파먹기 위해 아악 입을 벌리고 있”는 장면은 와락 공포를 느끼게 할 만큼 사실적이다. 시인은 이러한 부류의 황폐한 실감을 담담한 어조로 폭로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황폐함은 아마 ‘세계는 폭력적으로 지리멸렬해지고 말았다’는 시인 자신의 강고한 경험적 판단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이 판단은 시(인)의 얼굴에서 웃음을 싹 지워버렸다. 지리멸렬한 세계 속에 남겨진 것들의 처연함은 첫 시집에 등장했던 ‘담장에 기대어 울고 있던 녹슨 오토바이’(「담에 기대어 울다」)에서 출발해 두 번째 시집에 수없이 등장하는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떨어뜨리거나’ 겨우 ‘담장에 기대거나’ ‘바닥에 쓰러진’ 온갖 존재들로 확산된다. 그들은 아직 스러져 삭지 않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럴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조용히 닳아 없어진 삶의 유혹”(「실내화」), “만성피부염을 앓으며 공장을 돌아다닌 신발”(「거품」), “늘어진 파업을 등에 업은 돌멩이”와 “쇠파이프”(「내일은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무릎이 다 닳은 빗자루”(「빗자루 이력서」), ‘강아지처럼 끄응끄응 앓는 고무신 두 짝과 오래된 관절처럼 걸어가는 지팡이’(「오늘은 아무도 순종하지 않아」), 이밖에 호미, 삽, 행주, 때수건 등 수많은 연장들이 그 주인들과 마찬가지로 용도 폐기 직전이다. 이 시집의 주요 대상들은 도구적 유용성을 다했다는 데 방점이 찍힌 채 다소 무력감에 빠져 있다(그래서 ‘주체’라 명명하기 망설여진다). 이 유용성을 다한 도구적 존재들은 얼핏 고흐의 신발 그림을 닮았다. 하지만, 고흐의 신발 그림을 보고 그 주인이 고단한 농사를 잠시 쉬고 한숨 자고 있을 거라 상상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이기인의 연장과 신발 주인들은 죽거나 죽어가거나 지리멸렬에 몸서리치고 있다. 이 사물들은 연일 초과 근무에 시달린 후의 일꾼처럼 “땅으로 내려와 쉬고 싶어 죽겠”거나(「줄기가 자라는 시간」 결구), “벽에 기대고 싶”거나 “마당 쪽으로 툭 쓰러지고 싶”고(「빗자루 이력서」 결구), “가슴이 파닥거리고 싶”기도(「시래기」 결구), “길바닥을 환하게 다시 보고 싶어하”기도 하지만(「느린 노래가 지나가는 길」 결구), 안타깝게도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어째서 그의 시는 폐기 직전의 도구적 존재들로 가득 차게 되었을까?


 하나의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가 있는데, 그것은 이 시집의 대상(주체?)들이 처한 무력하고 피곤한 현실이 이들의 도구성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이든 연장이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한 자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소멸되어가는 자들이 시집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일-쓸모를 다하기’과 ‘삶’은 거의 등식 관계다.)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폐기 직전의 무용한 존재들이 독하게 반발하거나, ‘일’과 ‘용도’의 세계 바깥으로 나가야만 하리라. 곧, 분노를 터뜨리든가, ‘쓸모’와 삶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존재자들(를 보는 눈)을 재편하든가.


 아마도 전자의 방식은 「넌 커서 개가 될 거야」의 어린 유기견처럼 독한 혼잣말(“커서 개가 될 거야”)이 보여주는 열린 결말의 희망적인 한 쪽 길로부터, 후자의 방식은 「가래나무 아래서」나 「각형큰사발」에서 보여주는 시선 전환에서 그 조짐이 보이는 것 같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래들(“네놈들은 어디에 쓰일까?”)이 “우글우글 한나절 아이들과 동무처럼 친하게 지낼”(「가래나무 아래서」) 때, “용도를 알 수 없는 그릇”이지만, “용도를 몰라도 이쪽이 저쪽을 초라하게 하지 않는 삶이 있으리라”고 나직하게 읊조릴 때(「각형큰사발」), 어슴푸레 눈뜨는 그 세계는, 용도 따위는 중요치 않은 선물,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면 어떠냐는 식의 발화 행위—그리하여 예술이나 시 그 자체를 닮아있지 않을까. 아, 이건 혹 미욱한 ‘삶의 미학화’일까, 배부른 소리일까. 쓸모로 압도해버리고 마는 세계가 우리 주관과 별개로 사실이면 어떻게 하나. 시선만 바꾼다는 것은 기만이 될 텐데.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정말 쓸모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그 세계의 조직 방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으로, 우리에겐 가끔 선물 같은 거짓말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희망은, 항상 증거 없는 믿음이 아닐까. 전전반측(輾轉反側), 어깨 위로 떨어진 편지 생각에 마음은 영영 용처(用處)를 모르고 잠을 잃는다.

-<문학과 사회> 2010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