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시가 너무 명백할까봐 걱정하고, 또 너무 모호할까봐 걱정한다. 어떻게 하면 잘 숨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머리카락이 보이게 숨을 수 있을까. 어떤 시인들은 시가 재현하려는 대상의 전체가 지닌 뚜렷한 윤곽, 황금비율, 색채, 의미의 완전한 전달에 골몰하고, 또 어떤 시인들은 아직 드러난 적 없지만 (그래서 공상이나 망상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도 있을) 세계에 편재하는 ‘무엇’의 손가락, 휙 돌아서 막 달아나며 사라진 실루엣에 불과한 뒷모습, 바람에 흔들린 옷깃 같은 단서들(만)을 독자에게 인색하게 제공한다. 이 기술들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이제까지 제출된 모든 시론들을 다 읽어도 그 다양성과 경우의 수들을 다 서술하기 힘들 것이다. 이 방식들의 고유성이 두드러질 때 우리는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어떤 시가 누가 쓴 시인지 알아챈다.
이제니 시의 특징들 중 뚜렷한 몇 가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고 싶다. 1. 시의 진행이 자유연상에 크게 빚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꿈-작업과 유사한 형태로 드러난다는 점, 2. 반복을 통한 의미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의 고양, 3. 낯선 이름들의 천연덕스러운 사용(이 낯선 이름들은 마치 본래 있었던 것처럼 시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호명되고, 돌아다니고, 화자와 관계를 맺는다). 이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들은 사실 각각 따로따로 강화되어온 특질들이라기보다는 이제니 식 몽상이 가진 전체론적인(holistic) 의미 세계에서는 분리하기 힘든 성질들로 보인다. 꿈-작업에서 종종 그렇듯이, 시에서 명명된 하나의 이름(이나 사물의 형상)이 현실에 대응하는 지시체를 반영하는지, 단순히 그 지시체의 현현인지 또는 그것의 매우 사적인 의미인지, 혹은 어떤 다른 지시체의 왜곡된 결과인지는 언제나 개별 사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개별 사례에 대한 꼼꼼한 이해에는 공이 많이 들기 때문에 독자는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종종 두 가지 독법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시에 등장하는 이름들과 시의 진행이 순전히 자의적인 즉흥 연주에 가까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하고 읽는 것이고(이때 반복은 이 음악적 특질에 복무한다), 또 하나는 이 이름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모종의 지시체나 혹은 지시체의 시인에 의해 왜곡된 결과를 ‘실제로 지칭’하며, 시의 진행은 시인의 직간접적인 현실 경험과 관념의 논리를 따른다 가정하고 가능한 한 의미를 추정하며 읽는 것이다(이때 반복은 이 ‘의미’를 강화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각각의 방식을 실행해보았을 때, 우리는 이 두 가지 방식이, 혹은 시인의 (무의식적인) 의도가 종종 혼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이제니 시의 낯선 이름들이 가진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기술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이 수많은 낯선 이름들이 ‘언제나’ 현실에 대응하는 지시체를 가진다거나 ‘언제나’ 자의적이고 무의미한 허명(虛名)들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전자를 가정하고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이름들의 기원을 찾다 보면 우리는 낯선 이름들이 가진 여러 겹의 의미들과 마주쳐 이 중의성들의 빛나는 합창을 듣는다. 하지만 이 이름들에 별다른 각주가 달리지 않은 것을 보면 후자로 읽어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더, 시인은 자신이 명백해지는 것에 완고하게 저항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여전히 이 낯선 이름들에 어떤 가공 과정이 있었다고 가정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그러면 ‘당신은 시대에 안 맞게도 여전히 의미주의자시군요’라는 조롱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령, 이 시집의 어떤 시들은 이 이름들에 관한 한, 사전 지식을 요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자니마와 모리씨」의 표제인 ‘자니 마Johnny Maher’와 ‘모리씨Morrissey’는 1987년 이전까지 그룹 스미스The Smiths의 멤버들이었고, 시집에 두 번 이상 등장하는 ‘갈색의 책’은 동명의 표제작 「갈색의 책」의 마지막 연,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가 떠올리는바, 비트겐슈타인의 <갈색의 책>과의 영향관계를 짐작케 한다. 아마도 「고아의 말」의 ‘고아’는 ‘孤兒’와 여행지로 잘 알려진 인도 서남부의 해안 지역 ‘Goa’를 둘 다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모호한 경우들은? 「녹색 정원 금발령」의 ‘금발령’은 정말 내가 떠올리는 것처럼 왕가위의 영화 <타락천사>에서 하지무(금성무)를 졸라 미스 양이 밤새 찾아다니던,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는 그녀 애인의 약혼녀 ‘금발령’이 맞는 걸까?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사람이라면, 구체적인 대응관계가 보이지 않는데도 이 시를 읽으며 이 영화를 떠올리지 않기도 힘들 것 같다. 후렴처럼 되풀이되는 ‘무무-무무-무무-무무-’가 ‘無無-無無-無無-無無-’처럼 들릴 때, 마지막 구절 “녹색 정원이 사라지는 사이 나는 훌쩍 금발이 되어버렸다”를 읽는 순간 <타락천사>에서 결국 ‘금발령’을 찾지 못하고 영화가 끝날 무렵 자기 자신 금발이 되어버린 하지무를 떠올리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 「곤충 소년이 전진한다」의 ‘곤충 소년’은 제프리 디버의 추리소설 <곤충 소년>의 그 ‘곤충 소년’에서 촉발되었을까? 「들판의 홀리」의 ‘홀리’는 사람 이름 ‘Holly’일까, ‘holy’일까, ‘wholly’일까, 그도 아니라면 우리말 서술어 ‘홀리다’의 어간일까? (시에 등장하는 상자와 상자 속의 홀리는 <어린 왕자>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해서, 이때 ‘홀리’는 양의 이미지를 잔상으로 남긴다.) 「사몽의 숲으로」의 ‘사몽’은 어떤가? 그것은 ‘비몽사몽(非夢似夢)’의 ‘似夢’인가, 생각하는 꿈 ‘思夢’인가? 방랑하는 몽상 속의 ‘나’의 모습은 꿈과 비슷하되, ‘명백함’을 요구하는 요구, 온갖 요구를 들려주는 목소리, (시의 형태와 동일하게) 반복적인 식별하는 사고에의 강박 등을 생각하면 그것은 ‘思夢’에 가까울 것이지만, “사몽은 나아가고 사몽은 되돌아오고” 같은 구절에서 그것은 혹시 연어salmon의 일본 식 발음이 아닐까 싶기도 한 것이다.
보다 익숙한 중의법에 의거한 「나의 귀에 너의 사과가」의 ‘사과’가 apple로 apology를 비유한 말놀이pun일 거라는 건 비교적 확신에 가깝지만 「요롱이는 말한다」의 ‘요롱이’를 90년대 중반에 방영하던 TV 에니메이션 <꾸러기 수비대>의 12간지 등장인물 중 하나인 뱀 ‘요롱이’(일본 이름 ‘요로리’)와 겹쳐 읽는 게 정말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요롱이’는 12간지 중 유일하게 ‘지적인’ 캐릭터로, 박사모를 쓰고 말끝마다 ‘요로리~’라는 뜻 없는 말을 힘없이 외쳤다. 내 생각이지만, 이 등장인물은 진짜 ‘요롱요롱’하다.)
물론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나는 이 이름들에 아무런 각주가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시인은 이 이름들이 떠올릴지도 모르는 콘텍스트들을 그저 자유로이 부유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명상의 기초적인 단계가 생각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생각들을 흐르게 내버려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듯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집의 시들이 가지고 있는 몽상적인 특성들이 어째서 앎과 꿈의 모호한 경계들을 드나들고 있는지 훨씬 더 선명해진다. 이 시집에 수없이 등장하는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그것은 때때로 명백함에 대한 요구, 백지와 글자 같은 ‘앎’의 강박과 관련되어 있는데, 불면의 밤과 밤을 밝히는 불빛, 또는 잠들지 않는 환한 정신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리고 또 비슷하게 자주 등장하는 녹색(green이면서 rusty인 綠色)(이것은 때때로 수풀처럼 저절로 우거지는 사색이나 회억으로부터 일어나는 감정과 관련되어 있는데, 불이 켜지거나 꺼진 불면의 밤에 감은 눈꺼풀 속에서 보는 빛깔이기도 하다)의 두 영역이 겹쳐지고 분리되는 곳에 ‘편지광 유우’(You-? 희랍어의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사 U-? 아무래도 ‘아오이 유우’는 아닐 것이다)나 「아마도 아프리카」의 호랑이가 살고 있다. (호랑이는 “코끼리 사자 기린 얼룩말”과 달리 지리상의 아프리카에 살지 않고 ‘아마도’에 산다. 이 “아주 조금”의 세계에.) 「아마도 아프리카」, 「불면의 라이라」, 「나무 구름 바람」, 「단 하나의 이름」, 「밋딤」, 「사몽의 숲으로」, 「그림자 정원사」 등 이 평행 현실의 마주침을 증거하는 시들은 이 시집에 가득하다. 사실 나는 그 모든 알쏭달쏭한 시구와 문장의 유의미성의 단서나 무의미 시에 가까운 특질들을 떠나서, 이 시집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아마도 ‘둘’의 존재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의 대다수는 ‘생각하고 꿈꾸는 나’와 (그 이름이 무엇이든) 생각되고 꿈꾸어지는 ‘또 다른 나’alter ego를 중심으로 한다. 「카리포니아」의 누이도, ‘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도, 그리고 무수히 등장하는 ‘너’도 이 ‘또 다른 나’의 도플갱어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원의 두이」가, 이 세계를 악보 위의 코다와 코다 사이 같은 ‘증식하는 공원들’로 인식하는 이 시집의 세계관과, 불면증의 밤을 뜬눈으로 꿈꾸며 지나는 ‘나’의 ‘또 다른 나’와의 교섭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시라고 생각한다. ‘두이’라는 이름 역시 여러 가지 추정들을 가능케 하는데, 처음에 ‘두이’는 어떤 동물(길고양이라든가 개라든가 청솔모 같은)의 자의적인 이름(Dewy?)으로 읽히다가 3연에 이르러 “두이의 벤치에서 두이가 바라봤던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앉아 있었다”는 구절을 지나 “인생이란 결국 두 개의 의자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일.(...)네 목소리 위에 내 목소리를, 내 목소리 위에 네 목소리를 덧입혀보는 일.”이라는 시구로 가면 ‘두 이(二)’로 읽힌다. 그러다 마지막 연에서 증식하는 공원들에 관한 진술이 이어지고 “닿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두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마지막 시구에 이르면 ‘두이’는 급기야 ‘뒤’로 읽히는 것이다. “닿을 수 없는 그 모든” ‘뒤’, ‘포스트post-’들. ‘편지광 유우’가 도시 처처에 붙이고 다니는 ‘내’ 눈에만 (그러나 ‘내’ 눈에는 너무나 명백하게) 보이는 메모처럼, ‘이것 이후’, 혹은 ‘이것을 남기세요’--'post it'. 이것을 시인은 의도했을까?
추리소설처럼 주어진 단서의 의도를 최대한 따라가려는 독법을, 애초에 모호함을 표지로 하고 있는 시 작품에 적용할 때는 ‘의도’에 적중시키려는 욕심을 진즉에 포기해야 응당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수풀처럼 우거지는 추정들 속을 헤매며 각각의 추정들의 결을 쓰다듬고 실컷 몰입해보라고 권유하는 듯하다. 이 숲속을 돌아다니고 있으면 ‘현실에 대응항이 없더라도 허구적 이름들은, 적어도 이 이름들의 수만큼 세계를 늘린다’던 언어철학자 마이농의 주장이 철학적으로는 오류일지 몰라도 어떤 종류의 시적 몽상의 논리에서만큼은 참인 듯하다. 머리카락처럼 생각과 몽상이 마구 자라는 이 시집에서 길을 잃으면, 통상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반성(인식)과 꿈이 「페루」에서의 머리 땋기나 색색의 페루 전통 직물처럼 재차 되풀이 직조되고, 이 인식과 꿈의 직조는 종국에는 현실적으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하룻밤만의 공상 속 원행(遠行)이 된다. 그 여행지로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무의미성은 ‘누구든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죽음처럼 공평하고, 한 무더기의 수고를 거친 다음에 깨닫는다는 점에서 또한 죽음처럼 아름답다. 의미와 의미 없음의, ‘둘’의 길항이 없다면, 이 공평한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 나는 단번에 주어지지 않을 이 구원을 위해서 ‘흑백의 밤, 인식의 피로’와 ‘녹색의 불면증, 뜬 눈으로 꾸는 꿈의 파도’와, 이 피로와 파도의 반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시인의 자세가 어떤 종류의 명상 연습처럼 여겨진다(특히 「초현실의 책받침」을 읽고 있노라면).
이 명상에 숙달되면 시인은 인식의 문으로 들어갈까, 아니면 꿈의 세계로 침잠할까?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페루」)는 전언이 한쪽에, “나를 달리게 하는 것은/들판이 아니라 들판에 대한 상상”(「처음의 들판」)이라는 전언이 또 한쪽에. 인식과 상상은 앞 다투어 무성해지다가 구분하기 힘든 숲을 이루는데, 이 무성함의 열도(熱度)에 미루어보건대, 이 명상에 숙달되어 초월해버리는 것은 시인의 목적과는 정반대일 것 같다. “뾰족한 것들이 나를 위무한다”(「고아의 말」)고 말하는 사람이 숙달된 명상 속에서 안온해질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