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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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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예수, 대심문관: 이율배반과 논리적 구원의 불가능성 * 오리너구리, 『빵과 차(茶): 무의미 이후 김춘수의 문학과 정치』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나는 이 논문을 오래된 의문으로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떻게 순수시의 대가가 5공화국의 국회의원이 되었을까 하는, 다시 말해 「꽃」과 전두환 퇴임식 축시인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 퇴임식 영상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가관이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김춘수가 쓴 거의 모든 글과 김춘수가 읽었다고 쓴 거의 모든 글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찾아 읽었다. 그랬더니 이상한 점들이 점점 더 많이 발견되고 거기에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궁금함이 거의 수사기록에 가까운 논문을 쓰게 만든 것 같다. 그는 국회의원과 ..
읽어버린 사람 얻어맞기를 자청하는 자는 마땅히 맞아야 한다.-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모피를 입은 비너스」. 이제는 소위 ‘정동 이론’이라는 문화 연구의 한 장을 연, 스피노자의 정동(affect)에 대한 들뢰즈의 강의에는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욕구(appetite)”에 의한 사랑과 “진실한 사랑”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50쪽에 이르는 다소 긴 분량의 이 강의 녹취록은 블레이흔베르흐와 스피노자 사이에 오간 편지들에서 다루어진 본질의 순간성과 영원성에서 시작하여, 힘의 증대와 감소로서의 정동, 무엇보다도, 하나의 살아있는 이행이자 변이로서의 정동을 설명함으로써,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강조했던 기쁜-수동과 슬픈-수동의 색조를 음악이라든지, 연인 관계 같은 구체적인 ‘마주침’을 예로 들어 활력적으로 전달하..
우회 살들이 조각조각 난자되고 가 있다피가 번진 도마 위에 파란 눈을 뜨고 가 없어진 잉카 레스토랑에서뚱뚱보 여자들이 배를 들고 나온다피망 유령처럼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가 식탁에와 정반대의 상황으로 놓여 있다피가 번지는 도마는 계속 피가 흡수하는 도마 탐정 요리사가 빛과 그림자로 도마를 조사한다도마는 깨끗하다조사의 순서와 순환을 역조사한다도마에 깊고 긴 칼자국 문장들이 음각으로 새겨진다 도마가 아가리를 벌린다도마가 그를 삼켜 그를 가둔 도그마로 변한다 가 사라진 식탁에가 밤과 낮으로 마주 앉아 오래도록 응시한다―함기석, 「요리사를 요리하는 요리사」 전문(『뽈랑 공원』,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1. 서양철학의 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존재론과, 그 연장선상에서 정신분석학에서 출몰하는 ‘그것(it)’의..
양심의 즙: 이념을 요청한다 1. 이 글은 애초에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대중 감정의 장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기획된 것이다. 이 감정 장에는 일종의 거대한 싱크홀이 생겼는데, 그것을 우리는 무저갱, 즉, 바닥없음(발 디딜 토대, 즉 실존의 근거 없음, 발이 닿지 않음)의 압도적인 추체험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직간접적인 체험의 이미지(가라앉는 대규모의 여객선 내부에 있는 자기를 상상하는 일)가 초래한 정신적 외상은 긴급한 구호와 치료를 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방치된 저혈성 쇼크 환자처럼 제 몸 안에 늘어나는 부재를 스스로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 주체들로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직접적인 피해자들은 입법적 조치를 요구하는 상징적 제스처를 통해 현실적인 정치 행동으로 이 구..
운동의 윤리와 캠페인의 모럴-'시와 정치' 논쟁에 부치는 프래그머틱한 부기 동경백색집단 어느 날 저녁, 평소와 같이 저녁을 먹고 TV를 켜자 다음과 같은 뉴스가 흘러나왔다. ● 앵커: 요즘 일본은 온몸을 흰 천으로 감싸고 유랑생활을 하는 백색집단 때문에 시끄럽습니다.종말론을 내세우며 집단생활을 하는 백색집단이 자칫 큰 사고를 내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합니다.도쿄 김동섭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기자: 이 백색집단은 자신들의 몸은 물론이고 이동용 차량까지 온통 흰 천으로 감싼 특이한 외향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흰색이 전자파를 차단한다는 희한한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이들은 전자파가 적은 곳을 찾아다닌다며 산간지방 도로를 점거한 채 집단생활을 계속해 현지 주민들과 마찰을 빚다 결국 본거지로 돌아갔습니다.● 일본 야마나시현 주민: 일단 기분 나쁘고 관광에도 영향이 있다.● 기..
2011 아시아 시 페스티벌 발제문) 아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인류는 이제 단일재배를 개시하려 하고 있다. 인류는 마치 사탕무를 재배해내듯 문명을 대량생산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인류의 식탁에는 오직 그 요리뿐이리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힘의 탐구」, 슬픈 열대 아시아 시 교류 심포지움의 발제문을 청탁받은 후 저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권역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중동 아시아와 서남 아시아, 중앙 아시아, 동남 아시아, 동북 아시아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는 건너뛸 수 없을 만큼 넓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륙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유럽과 아시아가 어디에서 나누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시아’라는 말은 대충 ‘비(非)서구’를 가리키는 말이 ..
유토피아에서 아나키로 기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시인에게 시 쓰기 자체가 실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개성이 다양한 만큼 실천의 모습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 이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를 여러 평론가와 시인의 시각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기획의도에 대한 나의 해석이 이 글의 성격을 규정지을 것이었다. 1. ‘실천’은 무슨 뜻인가? 2. 1.의 의미와 관련하여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2의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성립 가능한 구문이라면, 그것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은 가능한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라는 의문은 타당한..
할례 전야, 유-토피아의 말문 앞에서 : 뷔히너, 첼란, 데리다의 유령 회합 (일전에 어느 모임을 갔더니 B, C, D라는 세 사람이 모여 앉아 무슨 이야기인가를 하고 있었다. 보아 하니 앞서 두 사람은 이미 이야기를 끝냈고, 세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의 말을 이어받아 골똘한 얼굴로 떠듬 떠듬 이어가고 있었는데, 도무지 만연체의 문장을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이 사람은 이렇게 울듯한 표정이 되어 눌변을 힘겹게 이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그가 좀처럼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기에 나는 한 사람씩 찾아가 따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였다. 이제 내가 듣고 생각한 바를 여러분에게 전한다.) 1. B씨의 시계와 달력 : 유토피아? 레옹스 : 그럼 우리 시계란 시계는 모두 때려 부수고 달력은 금지합시다. 시간 가는 거와 달 가는 걸 꽃 시계에 맞춰 세어보자고. 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