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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ard

양심의 즙: 이념을 요청한다

 

 

1.

이 글은 애초에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대중 감정의 장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기획된 것이다. 이 감정 장에는 일종의 거대한 싱크홀이 생겼는데, 그것을 우리는 무저갱, , 바닥없음(발 디딜 토대, 즉 실존의 근거 없음, 발이 닿지 않음)의 압도적인 추체험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직간접적인 체험의 이미지(가라앉는 대규모의 여객선 내부에 있는 자기를 상상하는 일)가 초래한 정신적 외상은 긴급한 구호와 치료를 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방치된 저혈성 쇼크 환자처럼 제 몸 안에 늘어나는 부재를 스스로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 주체들로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직접적인 피해자들은 입법적 조치를 요구하는 상징적 제스처를 통해 현실적인 정치 행동으로 이 구멍을 메워보려 하고 있지만, 거대한 상실감과 법제화 사이의 심한 탈구 현상은 어마어마한 말 막힘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계류되고 있다. 국가 안보와 시민 안전 사이에, 감정과 법 사이에, 참사와 일상 사이에 날카롭게 벌어진 틈과 그 은밀한 연속을 직시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 글은 근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어쩌면 역사적으로는 전혀 놀랍거나 새롭지 않되, 경험적으로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그래서는 안 되는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이 글은 단지 기획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2.

우선, 칸트를 따라 다음 질문을 던져보기로 하자. 인류는 사랑받을 만한가? , 역사적인 흐름을 통틀어 인류가 해온 일들을, 기록된 것들에 비추어 살펴볼 때, 이 질문의 발화 행위 주체로서의 우리를 포함하고 있는 인류는 사랑할 만한가? 이 질문을 진실로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은 신()이나 외계인들, 혹은 적어도 자연, 즉 인류의 타자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누구로부터의 사랑인가? 그것은 우리, 인류를 구성하고 있으면서 각자 그로부터 떨어져나가 인류 자체를 보편성에 비추어 사고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현실적으로 이 질문에 대해 주체로서 각자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입장이라고 할 만한 것을 철학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제출하기가 난감할 것이다. , 우리는 우리 종()에 대한 태도를 대체적으로라도 윤곽 짓지 않고서는 인간 주체의 대상과 장소이며 주체 구성의 본원적 환경을 이루고 있는 세계라든가, 세계와 관련하여 그의 여하한 행위의 당위와 방식을 설명하거나 한계 짓는 윤리라든가, 그러한 상황 속에 처한 주체의 정신적 생존과 섭생과 관련된 구원(의 유무와 자격) 문제 따위를 언급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의식이 언제나 보편적 타자로서의 시각을 포함하고 있을 때에만, , 전체를 조망하는 거대한 눈을 가정하고서야 비로소 의식이 가동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 질문의 배면에 깔려 있는 것은 인간의 한계에 관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역사에서 우리가 반복적으로 보아온 저 수많은 멍청한 짓들전쟁, 권력 투쟁, 차별, 학살,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무차별적 이윤 추구의 무수한 사례들, 고의적이거나 미필적 고의에 해당하는 직간접적인 모든 살인 행위들은 오로지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될 뿐인가, 다시 말해 인간은 라인홀드 니버의 비극적이고 우울한 진단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꽤 도덕적일 수 있으되, 집단을 이루는 순간 반드시 저열한 이기적 목적에 골몰하게 되는가, 혹은 니버가 (칸트와 그의 후예들을 포함하여) ‘비현실적이고 아둔한 도덕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생각하듯이 아주 느리더라도 나아질수 있는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더디디 더딘 과정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 같은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타자로서의 전체를 조망하는 거대한 눈을, 단지 가끔 출현하여 부분적으로 관심을 환기하는 일상인들의 일요일 아침 예배 시간의 고민을 넘어서, 시시때때로 방문을 그치지 않는 초자아로 환원한다면, 그 자신 철학사 내에서 초자아의 화신이라 소문난 칸트가 이 질문을 곧장 인류는 진보하는가?’로 이행하고, 또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정의가 그러하듯이, 인간 행위는 자연[본성, nature]의 개입에 의해 그러도록 강제되는 바, ‘그러지 않을 리가 없다고 결론 내린 일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는 속설에 대하여에서 인간을 1. 사인(私人, Privatmann)이면서 실무자(Geschäfstmann), 2. 정치인(Staatsmann), 3. 세계인(Weltmann)이라는 세 측면에서 그 각각에 부합하는 실천에 대한 이론의 관계를 도덕일반, 정치, 세계시민적 고찰이라는 세 개의 장으로 나누어 논하면서, 그 관계를 도덕Moral, 국가법Staatrecht, 국제법Völkerrecht으로 표현하고 있다.

 

4.

인간의 이 세 가지 측면을 실천에 대한 이론의 관계에 비추어 논하면서 그는 각각 자신의 견해에 반하는 세 개의 반론들에 반대하여쓰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기실 이처럼 그가 맞서 논하고 있는 그에 대한 (가능한) 반론들은 매우 현실적이고 오늘날에도 타당하게 여겨진다. 기본적으로는 행복의 개념과 의무로서의 윤리라는 개념이 대립적인 것은 아닌가, 즉 세계 내에서 인간 주체의 도덕적 삶과 행복의 총량은 제로섬 게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야말로, 1장에서 칸트가 반론해야 했던 가르베 교수의 칸트에 대한 비판의 토대였다. 플라톤의 이념과 실천론을 매우 충실하게 받아들인 칸트로서는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더할 수 없이 원리주의적으로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 “우리에게 이상이 되는 것이 플라톤에게는 신적 오성의 이념이었다”(순수이성비판국역본, 최재희 옮김, 박영사, 2004년 개정판, 427)는 그의 언급은 도덕철학에서도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자연’, 신성성의 섭리를 요청하는 그의 입장과 플라톤이 얼마나 그 토대에서부터 단단히 연합하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천론 상의 단언은 다음과 같다; “이상(Idea)은 플라톤의 그것처럼 창조력을 가지지는 않지만 실천력(통제적 원리)를 가진다.”(Ibid.) (이 말은 우리가 바란다면 그 바람에 의거하여,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서 사용한 어휘를 빌린다면 확신에 근거하여, 그것을 도래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원리와의 상동성에 의해 플라톤을 그리스인 모세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국가법을 논하면서 칸트가 국가형식으로는 왕정체[군주정체], 통치형식으로서 공화주의를 옹호할 때, 그는 소문이 무성했던 당시 프랑스 혁명에 관한 논란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는 동시에, 플라톤이 제시했던 네 개의 정치 체제철인왕 정체, 귀족적 과두정체, 민주 정체, 참주 정체들 중에서 아무래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철인 정체를 세밀화하기보다는 그것의 수정주의적 형태로서 왕정을, 또한 통치형식으로서는 대의적 정치 엘리트들을 포괄하는 과두정과 민주정체를 혼합한 형태를 옹호하고자 했던 바, 이성과 덕의 성실한 바탕을 가진 일하는 시민들의 국가 공동체를 구상했던 플라톤의 기본적인 기획을 (나름대로는) 현실적으로 수정하면서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5.

칸트와 플라톤의 엄밀한 이상은, 말하자면 행복과 도덕 사이의 대립을 행복 개념의 재구축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해결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리주의적이다. , 의무로서의 도덕을 견지하기 위해서 개인은 수반되는 불쾌나 불행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매우 타당한 의문은, (플라톤의) ‘훌륭하디 훌륭한 사람-철인(칸트의) ‘덕스러운 사람은 자신이 바랄만한 이상에 맞추어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제일의 행복으로 받아들인다는 대답으로 인해 인간 일반에게 도덕적 삶을 위한 점근선적 접근을 훈련하도록 하는 가혹한 훈육장으로서의 세계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즉 당대의 유행을 통해 특징지어지는 (주로 자신을 즐겁게 하는 데 편향된) 천편일률적인 행복의 개념으로부터 자신을 빼내어 이성적 원리와 보편적 법칙에 맞게 재구축해내는 것이야말로 극기에 찬 칸트적 덕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덕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자유롭게 행위했는데, 이것이 자연(본성 및 섭리)과 맞아떨어졌다! (이런 측면에서는 지젝도 물론, 도덕에 있어 원리주의자다. 그는 죽은 신을 위하여의 한 각주에 조그맣게 다음과 같이 쓴다; “은총과 유물론은 미덕과 행복 사이의 관계를 우연에 맡긴다.”) 물론 플라톤도, 칸트도 그 완성본이 현실 속에 실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반복하자면, 그것은 확신속에서 이루어가는것이다. 하여간 그러한 이념은 그 완성본을 약속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경향성을 만들어낸다. (“이상은 창조력은 가지지 않았지만 실천력을 가졌다.”) 칸트가, 믿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짐짓 불가능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던 듯한 국제연맹이, 그리고 뒤이어 국제연합이, 아무튼 그의 영구평화론에 의거하여 150년쯤 뒤에 만들어졌듯이.

어떻게 감각적 불쾌를 정신적 쾌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그러한 주체로 구성되어갈 것인가? 그것은 훈련, 끝없는 훈련을 통해서뿐인가? 행복의 내용을 의무에 의한 도덕에 맞게 재구성하도록 주체를 강제하는 것은 일종의 고문이 아닌가? 그러나 극언을 하자면, 강제로라도 어떤 이, 자신, 한 무리의 인간으로부터 양심의 즙을 쥐어짜봤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때가 진정, 있지 않은가? 정말로 최고선한 조각쯤은 사람마다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믿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6.

앞서 언급했던 라인홀드 니버는 이 같은 도덕주의자들에 대해 더할 나위 없는 비판의 화살을 퍼부었다. 실질적인 교육 주체로서 활동했던 니버에게 이 같은 고담준론은 현실을 조금도 나아지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의 비판은 자연인간의 본성 자체가 신성성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소한, 집단을 이루는 순간 그렇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개인으로서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봉사해야 할 것과 서로 간의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그런데 인종적·경제적·국가적 집단으로서의 개인들은 스스로 그들의 힘이 명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한다.”(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이한우 옮김, 문예출판사, 1992, 35) 이데올로그에 실망하고 역사에 환멸을 느낀 청년 김춘수가 되풀이 읽었던 바로 그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니버는 인간의 집단 생활이 완전히 정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환상이며, “이런 환상이 사람들의 영혼을 부추겨 숭고한 광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정의란 결코 달성될 수 없을 것인데, “환상이 위험한 것은 맹렬한 환상주의를 자극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를 철저하게 이성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타협한 듯한 가장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다; “우리는 다만 환상이 그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앞서 이성이 그것을 파괴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Ibid. 370) , 그의 오류는 정의-환상-환상주의-광기와 이성 간의 대립 관계를 상정한 초반부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경험 논리에 충실한 결론인가?

 

 

7.

엄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지녔을 듯한 칸트는 그의 철학을 엄밀하게 만들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언제나 자유신성성(, , 섭리)’, ‘물 자체’, ‘최고선등의 선결문제요구의 오류에 빠질 요청된 개념들을 주춧돌로 하지 않고는 자신의 이론을 완성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끌어가는 확신그것들이 있다고 믿는 편이 분명 더 좋을 것이다. ? 그것은 실천적이니까, 즉 효과를 산출해내니까은 생각보다 훨씬 더 궁극적으로 프래그머틱한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그 같은 그의 믿음은 속설에 대하여의 마지막 문단을 다음과 같이 매조지하도록 그를 이끌어갔던 것이다; “나는 이 인간의 자연[본성], 그 자연[본성] 속에는 여전히 법과 의무에 대한 존경이 살아 있기 때문에, 도덕적-실천 이성이 수많은 실패의 시도들 후에 종국에는 악을 이겨내지 못하여 인간의 자연[본성]마저도 사랑할 만한 것으로 현시하지 못할 정도로 악 속에 침몰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거나, 간주하고 싶지 않다. 따라서 또한 세계시민적으로 고려하여서도 다음의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이성근거들로 인하여 이론에 있어서 타당한 것은 또한 실천에 있어서도 타당하다.”(Ibid. 72, 강조는 인용자)

 

8.

어째서 나는 이 시점에 케케묵은 도덕철학의 오래된 딜레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최고선에 근거한 의무와 형식이라는 프로그램의 작동 가능성이 인간 일반의 내부에 내장되어 있으며, 그것을 가동시키고 숙련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칸트가, 그리하여 그를 떠올리면 어쩐지 엄한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는 저 관념론 철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가리켜 그것은 이론에서는 옳을지 모르지만, 실천에 대해서는 쓸모없다는속설에 대하여 해명한 글의 마지막을 아마도 인간은 사랑할 만한 것일 터이다, 그렇다고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뉘앙스로 끝내고 있다는 사실이며, 반면 현실과 경험에 의거하여 사회를 통찰하며 기독교 윤리학과 실천신학을 강의하였던 명실공히 그 자신 교육 주체였던 니버가 책 한 권을 할애하여 인간의 선한 본성을 가정하는 이상주의자들’, ‘도덕주의자들에게 맹공을 퍼부으며 그들의 환상을 폭로하고 결국 사뭇 비관적인 전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곁길이지만, 그가 키워낸 청년 김춘수의 논리적인인생 행보가 어떠했던가? (그는 자신의 자전소설 꽃과 여우의 서문에서 5공화국 하에서의 민정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 역임을 비롯한 정치 관여에 관해 내 정치 관여는 문제가 된다면 논리적 문제이지 도덕적 문제는 전연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 문제를 내 스스로 해명하려면 좀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해명하기는 해야 할 일이긴 하다.”라고 쓰고 있지만, 이후에도 그러한 해명은 없었다.) 논리와 도덕을 양분하는 무책임한 회의론은 비겁한 우울을 양산하며, 허황된 관념론과 마찬가지로 오직 종이를 낭비할 뿐이다.

 

9.

비겁한 우울이라는 말은 주판치치의 칸트와 라캉에 대한 연구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 장이 윤리적 딜레마들로 포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윤리의 억압, 즉 윤리를 실재의 차원에서 사고할 수 없는 무능력에, 단순히 더 큰 악을 방지하려는 의도를 갖는 일단의 제약들과는 다른 윤리를 구상할 수 없는 무능력에 엄밀히 상관적이다.(...)즉 우리 시대의 바로 그 사회적 질병이 된 것처럼 보이며 역사의 종말이라는 ‘()근대적 인간의 체념적 태도의 어조를 정착시키는 울증depression'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울증은 영혼의 어떤 상태인 것이 아니다. 단테가 말했듯이, 그리고 심지어 스피노자도 말했듯이, 단순히 도덕적 실패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죄이며, 도덕적 쇠약함을 의미한다고 한 라캉의 테제를 재단언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실재의 윤리: 칸트와 라캉,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4)

이것은 우리 시대의 도덕률이 이러저러한 자질구레한 이유로 인해 모든 상황에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를 일일이 써놓은 매뉴얼들로 대체되고 있음을 통해 입증된다. 마치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먹어야 할지까지 세세하게 규정해놓은 613가지 율법을 외면서 자나깨나 전전긍긍 살고 있었던 식민지 이스라엘처럼 말이다. 그들의 삶을 규율하는 것은 식민통치보다 먼저, 그들 자신의 너무 많은 율법이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상냥한 경어체로 발코니, 창문, 공공장소, 화장실에서의 흡연을 금지하는 안내문이 붙어있고(차라리 모든 장소에서 금연이라고 쓰는 편이 경제적이다) 자동차는 운전자의 모든 가능한 실수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는 스티커를 부착하고 있으며, 서점에는 온갖 부문에서 (실용적이고 도덕적인) ‘~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들이 자칭 모범 시민들을 향해 펼쳐져 있다. 그 모든 매뉴얼들에도 불구하고 대낮에 총을 맞은 사람이나 가라앉는 배에 방치당한 사람들의 가족은 노상에 쓰러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경우에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어떤 공공 매뉴얼도 적시하지 않은 모양이다. ‘공공은 도대체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10.

플라톤에게 유토피아가 이미 실현 불가능을 고지하면서도 굳이 그의 사상 속에 재현되고 있는 것처럼, 칸트에게 최고선의 실현역시 불가능을 암시하면서도 굳이 그의 저작들 속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주판치치의 말마따나 최고선최고악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논리적 구조 속에 있다 하더라도, 각각의 경우에 있어 언제나 점증하는어떤 경향성으로 실제 작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에 대한 확신)은 힘과 방향을 부여한다.

이와 더불어 매뉴얼에 대한 공격을 법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한 착각이라는 점을 부기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법과 무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과 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각축할 수 있는 준칙들 사이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유적인 가치 범주의 서열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혁명에 대한 혁명적 성찰을 오래된 텍스트로부터 발견하는 것과 관련된다.

칸트는 왜 혁명을 옹호하는 대신, 모든 종류의 봉기와 반란의 사태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는가? 요약하자면, 그의 속설에 대하여가 출간되던 당시는 엄밀히 말해 프랑스 혁명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시기였다. 혁명은 하루 동안 일어나는 소요가 아니므로, 다시 말해 그것은 그것에 대한 명명까지 포함하므로, 프랑스 혁명은 주체를 거듭 바꾸어가며 단두대 아래 바구니를 다른 당파의 머리들로 채우고 있었고, 이 사실은 칸트로 하여금 인민은 인민의 지도자들, 또는 후원자들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들었던 듯하다. 대신, 칸트는 국가법을 논하면서 통치자와 인민 양자의 덕이 확실히 공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모든 공동의 존재에는 (전체에 미치는) 강제법칙들에 따르는 국가헌정체제의 기제Mechanismus 하에의 순종, 그러나 동시에 자유의 정신이 있어야만 한다.(...)후자[자유의 정신] 없이 전자[순종]는 모든 비밀스러운 사회들을 유발하는 원인이다.”(Ibid. 57-8, 강조는 칸트 자신의 것.)

그 자유의 정신은 무엇으로 표현되는가? “펜의 자유die Freiheit der Feder는 유일한 인민권리들의 수호신Palladium이다.” 또한 한 인민이 자기 자신에 대해 결의할 수 없는 것을 입법자도 또한 그 인민에 대해서 결의할 수 없다.”(Ibid. 강조는 칸트.)

 

11.

아마도 우리는 모두 얼마쯤 비관론에 빠져 있다. 일찌감치 이데올로기의 종언에 이어 문학의 종언이 선언되었고, 정치의 실종과 공공성의 상실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혼돈 속에 있다. 우리는 아무래도 종말 속에 살고 있다는 비참을 가눌 길이 없어 보인다. 슬픔과 분노와 항상적인 불안이 구분되지 않는 이 안개 속에서 상징만 남은 공공성-법에 대한 호소를 사방에서 목격하고 있다. 깊은 밤, 분리수거 하는 달그락 소리에 아파트 창문을 열고 당신은 공중도덕도 모릅니까?”라고 정중한 경어체로 고함치는 이웃과 사람 뜸한 강변의 흡연자에게 이곳은 공공장소입니다!”라고 훈계하는, 자전거를 끌고 나온 사람을 보았고, 심지어 얼마 전에는 놀이터에서 싸움에 진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날 폭행했으니 신고하겠다고 제 벗들을 위협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분노한 나머지 각자 모두에게 유신을 선포해버린 것이 아닌가? 서로에게 참주 노릇을 하기로 해버린 것은 아닌가? 이것은 우리의 도덕적 무력을 고백하고 있음에 다름없지 않은가?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적(그것이 자본이든 통치기구든 법이든)보다 의 신경을 건드리며 자잘한 불편을 유발하고 있는 가까이 있는 이웃-원수들을 우리는 각자 즉결처분하고 무거운 형량을 선고하고 있지 않은가?

 

12.

이웃에게 서로 참주가 되어가고 있는 이 현실이 자유의 정신 없는 순종이 유발한 비밀스러운 사회의 절박한 징후처럼 보인다고 하면 과언일까.

이쯤에서 펜의 자유가 유일한 인민권리들의 수호신인 것처럼 무혈혁명을 주장하는 한 젊은 학자의 일침을 적시하는 것은 패배적인 후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사태가 나아질 것이라는 충분한 가시적 근거나 더 많은 공공질서 안내문의 조항들이 아니라 그 모든 법들을 완성하는 , 칸트에게는 최고선에 대한 존경이며, 플라톤에게는 이상이며,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로부터 깨달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너무나 어려운 하나의 명령이었던, 인간이 진보할 특질을 내재하고 있고, 나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에 근거한, 사랑할 만하다는 확신이다. , 그것은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양심의 즙이어야 한다. 주판치치의 지적대로, 이것은 단 하나의 원칙이므로, 그 보편성 때문에 지나치게 모든 것에 개방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태는 그것에 의해 언제나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도덕이고, 어떤 현대 이론가들의 어휘에 의하면 윤리다. (도덕the moral과 윤리the ethics의 구분과 용법의 자리바꿈에 관해서는 졸고, 운동의 윤리와 캠페인의 모럴의 각주를 참조하라.) 이것은 실정법이나 마음에 새길 만한 잠언, 준칙 따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읽고 쓰는 자들이 책과 펜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유감이지만, 비겁한 우울 속에서 여전히 읽고 쓰면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말한다. “반복합니다. 혁명에서 폭력은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한다면 그 반대로 말해도 좋습니다. 텍스트를 고쳐 쓴다는 것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일인가를.”(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2010, 111.) 그러니 유한을 거쳐 무한으로 투사되는 읽고 쓰는 일의 승리의 확신 속에서는, 자기의 생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비관론자들은 텍스트의 적이다. “철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철학과를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문학이 끝났다고 한다면 문학에 종사하는 걸 그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문학부 교수도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종말론에 대한 우리의 정의에서 보면, 은 단순한 끝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읽을 수 없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Ibid. 246.)

 

0.

엄밀히 말하자면, 자유, 양심, 최고선, 따라서 인간 안에 신(적인 것)을 상정하기를 요청하고 유한을 무한으로 투사하여 읽고 쓰는 일을 확신 속에 해나갈 것을 요청하는 것은 지나치게 본질론적인 것으로 보일 우려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변명하건대, 이 같은 요청은 본질 없는 본질론으로서임을 부기한다. , 자유(“나는 그것을 () 할 수 있었다”)과 양심(“인간이 사랑할 만한 존재라면 그것이 존재할 것이다”), 최고선(“인간이 더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나은 상태의 이념이 있을 것이다”), (-적인 것, “그것은 우리 안의 양심의 즙을 지칭하는 가장 오래된 메타포다”), 다시 말해 이념(Ideal)에 대한 요청은, 오늘날 지워져버렸거나 상품으로만 간주되는 가치 서열의 꼭대기에 있는 빈자리들을 지칭한다. 나는 그것들을 공집합{ }의 개념처럼, 부재의 자리를 표시하는 기호로서 요청한다.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우리의 비루한 현실의 음화를 통해서 언제나 반드시 네거티브 필름의 현상 방식으로 그 이미지들은 그려지게 마련이다. 그 이미지들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도 하지만, 그 빈자리의 장소 자체를 소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인류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진보할 것이다. 나는 이 장소를 이념의 비본질론적인 이념적 근거라고 부르겠다. (끝)

- <21세기 문학> 2014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