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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ard

우회

      

      살들이 조각조각 난자되고 <있다>가 있다

피가 번진 도마 위에 파란 눈을 뜨고

 

<있다>가 없어진 잉카 레스토랑에서

뚱뚱보 여자들이 배를 들고 나온다

피망 유령처럼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가 식탁에

<놓여/있다>와 정반대의 상황으로 놓여 있다

피가 번지는 도마는 계속 피가 흡수하는 도마

 

탐정 요리사가 빛과 그림자로 도마를 조사한다

도마는 깨끗하다

조사의 순서와 순환을 역조사한다

도마에 깊고 긴 칼자국 문장들이 음각으로 새겨진다

 

도마가 아가리를 벌린다

도마가 그를 삼켜 그를 가둔 도그마로 변한다

 

<있다>가 사라진 식탁에

< >가 밤과 낮으로 마주 앉아 오래도록 응시한다

함기석, 요리사를 요리하는 요리사전문(뽈랑 공원,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1. 서양철학의 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존재론과, 그 연장선상에서 정신분석학에서 출몰하는 그것(it)’의 다양한 양상, 유령, 초자아, 무의식, factor X 은 아마도, 사유의 표현 형태인 언어형식으로부터 역으로 유추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적 사유의 기원과 언어의 기원의 순서는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어느 순간 그 기원들이 가정되었다는 것이고, 언어의 잊혀진 기원이 존재론적 사유의 발달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라틴어를 근간으로 한 서구 언어 내에서 비인칭주어와 관계대명사, 그리고 존재를 표시하는 기본동사는, (지금은 인문학 내에서 번역어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지만) 우리말에서는 자연스럽게 없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의미론과 존재론의 형식적 동위성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2. 가령, “몇 시냐?”의 영어 문장 “What time is it?”에서 “it”은 시간관념 자체를 하나의 주체로 가정하고 있다. 주어가 종종 생략되는 우리의 어문생활방식 내에서 시간관념이란 언제나 몇 시속에 포함되어 나타나지만(그러니까, “시간은 언제나 n이다), 영어(사유) 안에서 시간관념은 “n일 때에도, 언제나 이미 그전에 그것이다. 이 유령 같은 그것은 대체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마치 인류의 조상이 시간을 분절하여 시계 숫자판에 기입하기 이전부터 그것은 지구를 뒤덮는 거대한 옷자락을 질질 끌며 걸어다니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현존하는 존재자들의 빠르고 느린 변화와 그림자의 자리 이동을 통해 우리가 세월이라고 추상해낸 지구 위에서의 일관되고 무차별적이며 총체적인 어떤 흐름을 우리가 그것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구적 사유의 충격과 대면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서양철학을 중학교 교과목에 넣을 수 없는 이유이다. 비슷하고도 다르게, 일상적인 용례와 현실적인 유효성을 통해 (윤리적 개념을 유보한) ‘좋음을 획득하고자 하는 좋은 게 좋은 거지철학의 관점에서 미국 대학들이 형이상학과 존재론, 그리고 그 역사를 시간표에서 쫓아내버린 것은 또한, 시간(-)그것’(있다고 가정된 물 자체, 혹은 라캉의 ) 사이의 긴장을 낭비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포함된 언어를 통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경우, 미국인들)그것’-혹은 물 자체, 관념의 배제는 애초부터 그것을 통합시켜놓은 언어문화권(가령 한국인들)애초부터 분리가 불필요함보다 훨씬 의도적인 게으름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시간을 우리말 사유에서 이질적인 그것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시간(time)’=‘그것(it)’이라는 등식관계를 먼저 머릿속에 기입해야 한다. 그러한 훈련과정을 거친 후 다시 시간으로부터 그것을 분리하고 재차 이들의 통합과 관련된 존재론적 논의들과 맞닥뜨리게 될 때, 눈앞에 가나안 땅을 두고 사십 년을 헤맨 모세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처럼, ‘그것은 들이닥치고 통합해버려야 하는 어떤 것으로, 이미 선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 각자의 검은 우리 속에 갇힌, 기후가 다른 고향을 가진 짐승들처럼,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뒤섞이며 오직 배회하는 것에만 목숨 걸고 있었다.

김중일, 황색 날개를 달고 우리는중에서(아무튼 씨 미안해요, 창비, 2012)

 

3. 왜 빙글빙글 돌아가야하는가? 돌아감(detour)’이 장황한 제자리걸음이 아니라면, ‘모세의 사십 년 방랑이야말로 가나안 입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지름길의 시시함은 학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4. 그것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그것을 기표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문장은 성립될 수 없었을 테지만, 순전히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그렇다. 역사와 함께 해온 신비주의 교의들의 최종형식으로서의 진정한 신비주의는 바로 신이 창조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누보누보로망이라는 화려한 명칭으로 수식되었던, 르 클레지오가 약관을 겨우 넘긴 나이에 쓴 1963년 르노도상 수상작 조서(調書)에서 탈영했는지 정신병원에서 뛰쳐나왔는지 알 수 없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연적인 상태를 체현한 주인공 아담 폴로는 이 책의 후반부, 정신병원에서의 질의응답에서 코기토, 또는 창조될 필요가 없었던 신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심리학자들로 환유된 아카데미를 아연실색케 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그건 문화, 지식, 언어, 글 따위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지입니다. 종합해 따져보면 그건 일종의 평안이죠. 그러나 절대 그것이 자신의 종말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니죠. 그 경지에선, 정말이에요. 진정한 신비주의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건 단순히 어떤 상태입니다.(르 클레지오, 조서, 민음사, 260)


만일 추상적인 사유의 정점에 있으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궁극적인 전제이자 결론으로 가정된 무엇인가가 어느 사이에 신 개념으로부터 그것의 다양한 변용들로 대체되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순전한 형식은 이와 같은 신비주의의 정점밖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실재라는 구멍을 하나의 누빔점으로 그러모아 기호화하는 제스처가 없다면, 줄거리가 거의 전무한 이 소설의 주인공이 그렇듯, 우리는 실어증선고를 받고 상징계 바깥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수밖에는 없다. 진정한 신비주의자는 단순히 어떤 상태에 놓여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창조될 필요가 없었다 하더라도 코기토, 또는 신에 관해 왜 창조될 필요가 없었는지 말해야만 한다. 마치 고틀로프 프레게가 집합개념을 만들면서 모든 집합의 교집합으로서 공집합을 포함시켜 그것을 드러냈듯, 그것은 일단 표현되고, 그리고 다시 (비로소) 통합된다.

 

5. 내친김에 이 공집합을 둘러싸고 20세기 초엽에 일어난 논쟁의 일단을 버트란트 러셀의 “On Denoting”(Logic and Knowledge, 1905)의 결론을 통해 간략하게 추출해보면, 정신분석학에서 대상 a의 자리를 지시하는 기표인 공집합이 영미 영미 언어철학에서 사물과 물자체라는 분리된 개념과 관련하여 어떻게 논의되었는지 흥미로운 논점을 발견하게 된다. 러셀은 맥콜의 개별자들의 실재/비실재 여부와 비실재 개별자들의 공집합에 관해 언급한 후 이를 논파한다(물론 이 실재/비실재는 정신분석학에서의 실재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1905년의 개념이다). 맥콜은 개별자들을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으로 나누고 공집합을 모든 비실재적인 개별자들로 구성된 것으로 정의한 뒤, (프레게가 참은 아니지만 유의미하다고 생각한) ‘현재 프랑스 왕과 같은 것이, 실재하는 개별자를 지칭하지는 않지만 비실재적인 어떤 개별자는 실로 지칭한다고 논하는데, 러셀은 비실재적인 개별자들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을 견지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공집합은 그것을 채우는 요소들(members)을 가지지 않으며, 모든 비실재적인 개별자들을 포함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집합이 아니다.”(pp.54~55, 강조는 인용자) 그의 지칭이론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것이 그러저러한 속성들을 가진 정신이라는 것은 알지만 A가 의문에 부쳐진 정신일 때에 ‘A가 그러저러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음은 알 수 없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알지 못하고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물 자체가 구성하고 있는 명제를 하나도 알지 못하고도 사물의 속성들은 알 수 있다.”(p.56)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는 돌아가지 않았고 그는 곧 우리가 되었다 그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것만 같았다

강성은, 이상한 방문자중에서(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 2009)

 

6. 비실재하는 개별자들을 죄다 공집합에 기입하려는 맥콜과 그것을 강력하게 부정하는 러셀의 충돌은 상징계의 빈 공간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표시하는 누빔점으로서의 주인기표=대상 a’를 상징계에서 감당할 만한 상상물의 보완으로 수용하느냐, 혹은 그것을 단지 비어 있음으로서의 비어 있음을 표시하는 기호로 읽을 것이냐 하는 고민과 상응한다. ‘알 수 없는 정신으로 가정된 A이러저러한 속성들A의 가면처럼 현상할 때, 그 아래 맨얼굴을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러셀의 지칭이론을 우리가 하나의 유비로 읽을 때 일단의 언어철학 텍스트에서 얻어낼 수 있는 정신분석학과의 교차점이다. 그것은 일단 표현되고, 그리고 다시 (비로소) 통합된다. 그런 후에 논의되어야 할 것은 그 공집합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즉 그 빈자리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 무엇’(이 집합 저 집합)을 더불어 언어 안에서 사유하기 위해서는, 리처드 로티가 언어철학계에 화려하게 데뷔한 뒤 십 년의 침묵 끝에 다시 나타나, 단 하나의 진리를 가정하는 형이상학, 그리고 변호사와도 같이 누구를 위해서나 복무할 수 있는 언어철학을 때려치우자고 말할 때조차도 이를 설득하기 위해 언어철학의 분석적인 방법을 사용하며 형이상학의 세세한 부분들을 지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언어 안에 침잠해 있는 언어 내적인 사유방식과 함께한 뒤에야 비로소 쓸모없어진 사다리를 걷어치울 수 있다.

 

7. 어쨌든 그것(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따라서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핵심을 빙빙 도는 우회는 (물론 최소한 이 같은 논의를 유의미하게 여기는 의미공동체 내에서) 유용한 일이며, 실용주의적인(utilitarian)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끝까지 사유하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은 좋을 것이다’. 이 언제나 당분간이라는 한계를 표시함으로써 다른 방식의 우회를 허용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왜냐하면, 말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의 삶도 끝나니까 말이다. 유용할 뿐더러 심심치 않은 일이다. ‘심심치 않음의 가치를 누군가 묻는다면 지젝이 들고 있는 친도구(chindogu)에 대한 일본인들의 성향에 관한 사례에서처럼, 우리는 복잡하게 할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쉽게 하지?”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온전히 객관적인 자리에서만 서술될 수 있는 메타담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같은 이른바 지젝의 동양적 숭고의 위치에서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길을 따라 전혀 무용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집어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진리가 없다거나 가면 아래 맨얼굴은 없다는 것이 바로 유일한 진리이거나 맨얼굴이라 할 때 우리는 이미 학문 자체가 “(서양적이거나 동양적인) 숭고가 되는 자리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로 학문의 기능이란, 전자제품 설명서만큼 실용적일 수는 없으며, 외국어 학습처럼 일정한 의미 영역 속으로 들어간 이후에야 최소한 의미가 없다는 의미라도 찾아낼 수 있다. 단지 비유적인 것이기는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위에서 최단 거리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라는 사실은 소위 상식이라는 것과 학문의 불필요한 잉여분의 배제가, 근거리에서는 거의 식별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정식화하고 밀고 나갔을 때 얼마나 큰 차이를 보여주는지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우리가 우리의 대척지로 가기 위해 지구의 표면을 따라가는 곡선 대신 직선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지구를 뚫고 가거나 우주 바깥으로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실용적으로(pragmatically), 문제는 쓸모없는 것들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요람과 무덤 사이에 놓여 있는 긴긴 고독을 메우는 백지 위에 그려진 충만한 하얀 그림을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 유용성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를 받아들였을 때는 사실상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가령, “몇 시냐?”와 그 번역문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미 모어(母語)와 번역어의 혼융상태에 어느 정도 적응해가고 있으며 상당히 많은 경우에 번역어로, 따라서 이미 그들의 방식으로사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반복되는 의미론적 분리-통합 작업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황지우가 그의 시에 파리는 나비가 아니다라고 썼을 당시, 그 자신이 오랜 후 자문한 바와 같이 그는 “Fly is not butterfly”라는 영어 문장을 의식하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한 번 들어온 징그러움은 영원한 협력자다

김승일, 조합원중에서(에듀케이션, 문학과지성사, 2012)

 

8. 눈치챌 수 있겠지만, 나는 위에서 전개한 몇 덩어리의 사유에 다음과 같은 일련의 전제를 가정하고 있다.

 

. 서구 언어형식 내에서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전통적인 서양 존재론 내에서의 최고의 존재자인 신의 자리이며 하이데거에게서는 존재의 자리이고 인식론에서는 물자체의 자리이며 윤리학에서는 칸트적인 자유의 자리, 정신분석학에서는 주인기표=대상 a’의 자리와 형식적으로 일치한다.

 

. 그것’, , 존재, 물자체, 칸트적 자유, ‘주인기표=대상 a’의 맨얼굴은 알 수가 없다. (언어 내에서 유추되지 않고 표현되지 않는 한, 없다고 가정된다.)

 

. 통속적인 실용주의와 통속적인 신비주의는, 바꿔 말해서, 일상생활은 그것이 분리될 필요성을 무시한다.

 

. 그러나 사실상 그것 표현되거나 표현되지 않거나, 즉 기표화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삶의 연쇄를 가능하게 만드는 형식적 기능적 작인이다.

 

. 그것은 상징계 내에서 여러 모습으로 위장하고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 단적으로, 통속적인 실용주의와 로티식 신실용주의, 그리고 통속적인 신비주의와 르 클레지오식 진정한 신비주의사이에는 그것을 둘러싼 우회들이 있으며 그 표현을 부득불 명시한다. 우리는 분리의 도정을 거친 이후의 통합이라는 우회의 도정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제기되고 있음을 이들로부터 징후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세속인의 일상적인 삶의 표면적인 평온함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벌어지는 마음속의 분란들이 어떻게 모순 속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나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지극히 비학문적일 수 있는 단순한 물음을 학문 자체의 우회적 성격에 비추어 사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우회의 내용은 크게는 세속적인 일상생활과 학문, 혹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신비주의의 정점인 시로 대표되는 문학과 이론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각자 자기의 패턴을 만들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을 지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일상의 윤리적 영역 내에서 협소하게는 기독교 신자의 주 육 일 동안의 죄악에 가득 찬 더럽고 평범한 삶과 주일 예배의 드라이클리닝이 어떻게 그의 일주일 단위 생활 내에서 조화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속화된 현대생활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일정한 반복을 통해 어떤 것(something)’으로서의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부터 멀어졌다가 다시 근접하는 우회를 되풀이함으로써 영위된다. 그것은 온갖 대립항들 사이의 모순 조화에 관한 것이다.

 

9. 따라서 온전히 실용주의적인 생활과 온전히 형이상학적인 생활과 온전히 신비주의적인 생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활은 모두 어느 정도 실용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기미를 띤다.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고리들은 계속되는 욕망의 환유적 운동에 의해 처음과는 아무것도 닮은 것이 없어지는 일종의 가족유사성의 연쇄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가 유사성에 대비되는 상사성(相似性)을 강조하는 것은 인접해 있는 환유 대상들의 유사함보다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원본을 잠식하고 그 존재 여부를 알 수 없게 하는 차이들에 대한 강조라 할 수 있다.

 

10. 근대철학에서 각 학문 분야의 이름이 지칭하고 있는 표현 방식들 사이의 분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통합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형식적으로 문제삼았을 때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칸트의 불가지론적 태도의 핵심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선험적인 오성의 범주를 통해 우리는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윤리적 판단을 요하는 사태들에 직면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도 되는가로부터 인간의 윤리적 행위가 자연적인 인과율(‘을 지탱하는 자연법칙)과 어떻게 형식적으로 일치하는지에 중점을 준다. 이 두 책은 정확히 거꾸로 선 거울상을 보여준다. 인식론에서 도식은 아래에서 위로, 윤리학에서 도식은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물자체가 지각 불가능한 무엇이지만, 있다고 가정된 상태에서,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해도 사물에 대한 은 가능하다고 할 때, 그는, (앞에서 살펴본) 러셀이 지칭이론의 결론을 통해 도달한 것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것을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을 해도 되는가라는 윤리적인 질문에 직면하여서는 행위 이후의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자유의 차원을 사후적으로 가정함으로써 인식론에서의 물자체에 해당하는 빈 공간의 자리를 요청하고 이것이 필연적으로, 또한 불가결하게 행위의 논리 안에 전제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할 때조차도 의심을 믿으면서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모든 삶이 일종의 종교생활이라 했을 때, 불가지론은 그것알 수 없음이라는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도리어 극단적으로 알고자 하는 편집증적인 집착을 보여준다. 불가지론자는 그것에 삶을 내맡긴 자이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전제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결론인 것을 도출할 수 없는 칸트 학문체계 전체를 근본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는, 오류 자체가 논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의 주인공이자 얼룩인 근원적 모순으로서의 정신분석적 주체와 닮아 있다.

 

하고 싶다면 너도 형을 해. 그러나 네가 형을 해도. 네가 죽으면 내 책임이지.

김승일, 부담중에서(같은책)

 

11. 의미론과 존재론에 있어서의 빈자리의 동위성을 가정하고 기능적인 작인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함에 있어서 이 빈 자리의 판본들이 모두 같은 위치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순전히 형식적인 기능만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이 지점을 완전히 백안시할 수는 없다.

가령, 어떠한 형태로든 실현되어야 할 이상적인 공동체의 유형을 가정하고 있는 사회사상들의 꼭대기에 있는 최종적인 무엇을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명명할 때, 이 명칭은 역사를 통틀어 반복되는 시도들의 거대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어떤 공동체가 있고 이 공동체가 지향하고 있는 유토피아1이 그 체제 내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 뒤에는 사후적으로 그 내용과 의미를 바꾸고 유토피아2라는 새로운 판본이 된다고 가정해 보자. ‘불가능한 장소라는 이름을 노골적으로 달고 있는 유토피아는 그러나, 언제나 가능하다고 믿은 후 적극적으로 의지해야만 아주 조금이라도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점진적인 개조를 통해서는 이룰 수 없다고 여겨져 왔다. 유토피아는 언제나 현실의 네거티브필름처럼 없는 것만을 드러내는 듯 보이지만, 현실의 윤곽 자체를 모두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현실체제-상징계의 논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다.

칸트 이전의 근대 인식론자들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최고의 존재자가 있어야만 한다는 요구로부터 최고의 존재자라면 그는 완전해야만 한다고 비약했던 것처럼, 유토피아의 이상은 우리가 이 지경으로 살고 있는 것은 살 만한 세상이 되도록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로부터 희망할 만한 세상이라면 그것은 완전해야만 한다고 비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완전함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체제)의 불완전함을 일소한 완전한 형태의 존재자(체제)이지 근본적으로 현실 존재의 상상할 수조차 없는 속성들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아이러니는 그 자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언표함에 있다. 외상적인 사회적 사건 후에 유토피아의 판본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외상적 사건들이 불러온 전반적인 변화 때문이지 유토피아의 원본이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불가능한 장소라 자신을 언표하는 어떤 것이 세계를 (아주 조금이라도) 바꾼다는 것은 역설이 아닌가?

 

얼굴 없는 내레이터는 역사에게 마이크를 들이댄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보다 왜소하시군요?

(……)

늦은 봄날 마을 사람들은 살 오른 꿈 한 마리를 끌고 역사의 집 옥상에 모였습니다. 꿈의 멱따는 소리가 날카롭게 마을 천지를 찢어놓습니다.

난 꼬리를 다오 난 꿈의 꼬리가 좋더구나

깨어나면 아무 기억도 안 나는 깜깜한 그 맛

김중일, 늙은 역사와의 인터뷰중에서(같은책)


12. 유토피아의 판본이 처한 현실적인 위기는 가령, 식민지 조선이 육십 년 뒤에 무역규모 11위의 대한민국이 되었을 때 이제 무엇이 될 것인가하는 막막함과 봉착하게 된 내력 속에서 압축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현대성을 체현한 공동체로 선택하고자 마음먹었던 몇 가지 선택지는 당시의 현실에 존재하고 있었던 사회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아직까지는 가능태에 불과하지만 무정부주의였다(무정부주의는 후에 민족주의와 영합하여 형태상 자취를 감추기는 했지만, 그전에 신채호를 위시한 무정부주의자들은 1920년대에 안의에서 전국 무정부주의자 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판본들의 싸움이라 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서구의 분열이 노골화 되었다가 전쟁보다 더 위협적인 원자폭탄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었을 때, 서구의 분열은 상처를 도려내는충격요법으로 봉합되었다. 그것은 못 볼 것을 본 사람이 눈을 뽑는 것과도 같다. 분열을 냉각시키는 것은 화합과 대화가 아니라 난데없는 도끼질이며 예상치 못한 충격이다. 이 충격을 겪은 후에야 이후의 사태는 온갖 국제기구들의 조직화와 더불어 화합과 평화, 조정을 통한 분쟁 해결로 위장된다.

그 가운데 몇 가지 판본들은 유기된다. 무정부주의의 일차적 목표는 국가라는 기표를 벗기는 데 있으므로, 무정부주의 유토피아 판본의 기본적인 골격은 사유재산감옥이 없는 자율적인 개인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은 공동체 이전인, 떠도는 모나드들의 세계이지만, 이는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개인이 홀로 오지에 망명하더라도 그것은 반대로 그가 끊임없이 공동체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의 완전한 판본은 공동체의 완전한 판본을 대립항으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사회주의 판본은 봉쇄된 채 비밀리에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지다가 냉전이 종식된 이후 (거의) 폐기되었다. 하트네그리의 적확한 판단과 같이 이제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주의의 판본만이 남겨지며, ‘바깥은 없다’. 순전히 사상적인 차원에서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잠재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면, 다른 선택지들은 선택할 가능성 자체를 박탈당한 채 봉쇄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 모순은 순전히 내적이며 이것을 토대로 시스템은 굴러가기 시작한다. 바깥이 없는 체제에서 그려낼 수 있는 유토피아, 그것은 아마도 이미 도래해 있고 아마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우리는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총알을 맞고도 목숨이 붙어 있다면 그때부턴 식물의 시간을 사는 겁니다. 아무튼 덤 같은 거죠.

김중일, 아무튼 씨 미안해요중에서(같은 책)

 

자궁 위로 초음파가 지나듯 해가 저물어요

신동옥, 악공, Anarchist Guitar중에서(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13. 문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수한 유토피아의 판본들을 폐기하고 도달한 이곳에서도 여전히 그것,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가 닿을 수 없는 지평처럼 물러나기만 한다. 가 닿을 수 없는 지평은 내재적인 조건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이 지경의 삶살 만한 세상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곳에 있다.

더이상 미지의 대륙과 같은 것은 없으며 모든 땅덩어리들이 남김없이 지도에 그려진 뒤에도 생각해낼 수 있는 아직 알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지구 바깥의 외계인의 존재이거나, 우리 자신의 무의식일 것이다. 그것이 냉전 이후 할리우드의 징후적 영화들이 외계인 영화이거나 혹은 사건의 중핵을 연기하는 자기 자신에 관해 충분히 알지 못하는 주인공들을 내세우는 이유일 것이다. 이 문화적 현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근원적인 불안이다. 그러니까, 이런 맥락에서 적대라는 것은 알고 있는 사물(주체)’알지 못하는 다른 사물(외부의 타자)’의 이항대립으로부터 알고 있는 사물(주체)’없을지도 모르는 불가능한 다른 사물(상상적인 타자)’, 혹은 알고 있는 사물’(주체)그 사물의 알 수 없는 물자체(주체의 분열, 주체 속의 타자)’라는 이항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통한다

전봇대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배선공이

어디론가 신호를 보낸다

고도 팔천 미터의 기류에 매인 구름처럼

우리는 멍하니

상공을 치어다본다

너와 단절되고 싶어

네가 그리워

텃새 한 마리가 전선 위에 앉아

무언가 결정적으로 제 몸의 내부를 통과할 때까지

관망하고 있다

이장욱, 電線전문(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사, 2006)

 

서로 손해만 보는 일을 전봇대는 하고 있다. 머리에 전선을 매고 그들은 질문 중이다. 왜 모든 것은 연대책임일까?

김승일, 선잠 자는 전봇대중에서(같은 책)

 

14. 이 같은 생각은 앞에서 언급한 공집합을 둘러싼 맥콜과 러셀의 논의에 의하면 모든 비실재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공집합이라는 맥콜의 입장을 사회철학적인 입장들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에서 나는 러셀이 도출한 공집합은 아무 요소들도 가지지 않으며, 사물 그 자체를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물은 알 수 있다는 결론을 정신분석학적 함의와 관련시켰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라는 부재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기표, 현실에 부재하는 것이 있음을 나타내는 기표를 모든 이데올로기의 꼭대기에 놓아두었을 때, 그것은 아무 내용도 함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 반대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상상물이 없이는 아무것도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조건인 것은 아닌가? 문제는 이 불가능성이라는 조건을 정식화하고 형식적인 측면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혹 메타담론을 이야기하는 자의 위치에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그러니까, 푸코를 따라 차이들의 계열화를 이야기할 때에, 실제로는 그것에 참여하고 있으면서 영향사적인 맥락을 객관적인 척 판단할 수 있는 심의관의 입장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근원적인 의심 말이다.

 

15. 범박하게 이야기해서, ‘그것의 정신분석학 내에서의 위치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존재론에서는 최고의 존재’, 형이상학에서는 신, 인식론에서는 물자체, 칸트 윤리에서는 자유의 자리라고 할 때에 이들의 작인은 그것을 사유하는 주체 내부로부터의 깊은 요구로부터 연유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철학에서 진리로 통칭되었을 오랜 역사로부터 어느 시점에 표면의 현실 이면에 본질과 같은 것, 필연적인 진리와 같은 것은 없다, ‘진리가 없다는 진리’, 선사의 죽비와 같은 충격적인 것으로 변화한 뒤에도 우리 모두는 별다른 충격 없이 이를 수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라깡의 격언이 그것을 광신적인 포화된 의미 부여로 극단으로 밀고 나가지도 말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말라, 실제로는 아주 현실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때, 우리는 더이상 나올 것이 없는 상상력의 빈곤을 고백하거나 최종적인 비의에 도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사후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사건과 그 사건의 끝장만이 있다. ‘그것,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정말로 보면죽게 되는, 그래서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갔던, 어떤 것으로도 형상화하면 안 되는 유대교의 신과도 같은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빈자리로서의 진리와 마주쳐서도 우리는 실신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것의 공백에 관한 물음을 한사코 회피하고 전적으로 상징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강박증적인 태도나,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계속해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신경증적인 태도나, 조서의 주인공 아담 폴로와 같이 죽은 듯 살아가는정신병적인 태도는, 마치 답이 있는 듯 보이지만 답이 쓰여야 할 괄호 안에 들어갈 정답이 없는 잘못 출제된 시험 문제에 대해 우리가 반응하는 각각의 방식들이다. 14번에서 서술한 내용의 의심하는 자의 자리는 아마도 근대적인 주체의 자리를 계승한 듯 보이는 신경증적 주체의 위치일 텐데, 그것은 이것은 답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래도 굳이 써야 한다면, 왜 이런 문제를 출제하였는가에 대해서 서술하는 수밖에는 없을 듯합니다라는, 어쩔 수 없이 신의 자리를 유추적으로 떠맡는 주체의 자리일 듯하다.

 

여섯 살 난 하은이의 인형을 빼앗아 놀았다

병원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인형은 나의

의사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아프다고 말했다

어디가 아프냐 물어도

아프다고만

선생님은 내게 의자에 앉으라 하셨다

의자는 생각하는

의자였다

앉아서 생각해보라고, 잘 생각해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울어버렸다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져서

황인찬, 의자전문

 

16. 영화 <리크루트먼트>에는 주교가 교황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묻는 장면이 있다. “저는 더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물음에 대해 교황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인자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말한다. “위장하게(Fake it).”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은 적과 아군과 싸움의 의미가 분명한 냉전시대의, 압박감을 긴장과 서스펜스로 위장해 보여주는 90년대 이전의 할리우드 영화들의 속내가 아니라, ‘절름발이가 범인이래!’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래!’라는 속삭임 이후 모든 영화들을 접할 때마다 이거 또 자기가 범인 아냐? 이거 또 자기가 귀신 아냐?’라고 관객들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주인공들을, 따라서 자기 자신을 의심과 불안에 가득 찬 시선으로 즉각 생각하게 만든 21세기 영화들의 공통된 메시지 즉, 의심할 것은 바로 네 안의 너 아닌 것, 네가 알지 못하는 네 안의 그것’!”이라는 것이다. 믿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으로서의 그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코기토적 주체 안에서 혼란을 부채질하며 기입할 정답이 없는 괄호들을 생산한다. 주체는 그것과 구별이 힘들어진다.

 

갑자기 형사가 찾아오면

갑자기 나는 혐의자가 되고 용의자가 된다

갑자기 킁킁거리며 개가 다가오면

갑자기 나는 냄새 나는 고깃덩어리가 되고

갑자기 탄환이 날아오면 갑자기 목표물이 된다

곤충 채집자가 나를 채집하면 난 이상한 곤충이 되고

벌레 연구가가 나를 연구하면 난 이상한 벌레가 된다

함기석, 당신을 위한 수탉의 모닝콜중에서(같은 책)

 

모두들 그곳에서는 안녕하시오오?

모두들 그곳에서는 안전하시오오오?

김중일, 아무튼 씨 미안해요 중에서(같은 책)

 

17. 그리하여 우리는 참이 사라진 삶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짜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제 질문은 그것이 진짜인가로부터 완전히 다른 자리로 이동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진짜가 불가능한 삶의 유머러스한 형식은 다음의 오래된 민담과 같은 것이다.

 

옛날에 천장 없는 집에 눈깔 없는 영감이 살 없는 문을 열고 나무 없는 앞산을 쳐다보다가 다리 없는 노루가 뛰는 것을 보고 구멍 없는 총으로 쏘아 죽여서 썩은 새끼로 꽁꽁 묶어서 사람 없는 장에다가 팔고 오는데 물 없는 강에 무엇이 동동 떠내려가기에 가서 살펴보니 거짓부렁이 너울너울 흘러가고 있었다.(새빨간 거짓말(세계민담전집한국 편, 신동흔 엮음, 황금가지, 2003)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짧은 이야기는 첫 구절부터 불가능을 암시하지만, 반복되는 무엇을 무엇이게 만드는 것이 결여된 채로 진행되어나간다. 그것이 목표하고 달려나가는 거짓부렁이 너울너울 흘러가고 있었다, 그 불가능을 확정하지만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순간은 정확히 수사적인 형식과 동시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내용의, 그때그때 알맞은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태어나는 말들의 연쇄일 것이다. 존재론적인 (진리가 아니라) 진실이 의미론의 그것과 겹쳐지는 행복한 우연은 위락적인 모든 언어행위민담, , 소설, 기타 등등의 언어예술들 속에서 언제나 태어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것을 온전히 명백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하물며 우리는 우리(안의 그것’)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못할 때에도, 모름말할 수 없음을 알고 있고 또한 말한다는 것, 인류의 모든 말들의 총합이 할 말이 없다는 한마디로 축약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말들이 아니라는 것, 하이데거식으로, “시인은 말할 수 없다는 체념을 지절거리는 멜로디로 변형시킨다고 할 때 진정한 신비주의의 가장자리에 슬며시 다가가는 것이라면, 그럼으로써 문학과 예술은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향한 혁명에 가담하는 대신 그 징후와 상처에 연루되며, 상처를 도려내는 대신 빨간약을 발라준다는 것이다. 피보다도 노골적으로 빨간약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새빨간 거짓말은 그것 자체로 얼마나 현실적인가.

 

내가 죽고 당신이 죽고

나무가 죽고 새가 죽고 도시가 죽고 문명이 죽고

천둥과 함께 백만 년이 흐르고

번개와 함께 다시 백만 년이 흘러도

빙글빙글 지구는 계속 돌고

뱅글뱅글 슬픔도 고독도 우리들 눈깔처럼 계속 돌고

뺑글뺑글 존재도 농담도 우리들 불알처럼 계속 돌고

돌다가 돌다가 완전히 돌 때까지

우주는 랄랄랄 계속 돌고

시간도 히히히 계속 돌고

죽음도 헤헤헤 계속 돌고

말들도 깔깔깔 계속 돌고

함기석, 당신을 위한 수탉의 모닝콜중에서(같은 책)

 

18. “몇 시냐?”의 영어 문장 “What time is it?"에서 시작하여 새빨간 거짓말로 끝나는 이 심리적 보고서는 자동기술에 가까운 방식으로 쓰였다. 아마도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행간에 연무(煙霧)처럼 뿌옇게 펼쳐져 있고 나머지는 말할 수 없다부재와 잉여의 창고안에 들어가 있겠지만, 이 결여가 보편적이라 믿고 싶어하는 나는, 이 창고가 소지주의 창고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날락 하는 길바닥에서 누구나 순간 이동할 수 있는, 이를테면 평준화된 버뮤다 삼각지대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블랙홀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황지우가 메를로퐁티의 용어를 조금 수정하여 자기 식으로 한 말에 따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주관적 의미 자장을 통해 우리는 희한하게도서로를 얼마쯤은 이해한다. 모든 주체들의 구멍으로 인하여 내가 나를 모르는 만큼 타인들을 모른다 할지라도, 이 구멍의 보편성이 한 자루의 구슬을 꿰어서 보배로 만드는 이유 없는 연대성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역설을 통해서 말이다.

 

됐어, 내 꿈은 먼 곳에서 왔지만 언젠가 유효할 믿음,

박상수,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조림중에서(후르츠 캔디 버스, 천년의시작, 2006)

 

 

 

 - 계간 <문학동네> 2012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