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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hard

읽어버린 사람

 

얻어맞기를 자청하는 자는 마땅히 맞아야 한다.

-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모피를 입은 비너스.

 

이제는 소위 정동 이론이라는 문화 연구의 한 장을 연, 스피노자의 정동(affect)에 대한 들뢰즈의 강의에는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욕구(appetite)”에 의한 사랑과 진실한 사랑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50쪽에 이르는 다소 긴 분량의 이 강의 녹취록은 블레이흔베르흐와 스피노자 사이에 오간 편지들에서 다루어진 본질의 순간성과 영원성에서 시작하여, 힘의 증대와 감소로서의 정동, 무엇보다도, 하나의 살아있는 이행이자 변이로서의 정동을 설명함으로써,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강조했던 기쁜-수동과 슬픈-수동의 색조를 음악이라든지, 연인 관계 같은 구체적인 마주침을 예로 들어 활력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이 말썽 많은 개념들기쁜-수동, 슬픈-수동, 힘의 증감과 경화(hardening), 관계의 합성과 해체, 무엇보다도 정동그 자체 등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세밀하게 해소하고자 시도했던 듯하다. 확실히,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빌려 피력하고 있는 힘의 증대와 감소로서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정동적 색조의 설명은, 20세기 철학 전반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정신분석학과 실존철학의, 기괴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암울한 분위기를 감안하면, 기묘할 정도로 활달하고 단순하리만치 명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스피노자적인 기쁜 마주침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켰을 때와 같이 필연적으로 그 사물의 행위(action)을 피하는 것에 할당된다는 의미에서 내 힘의 일부가 제외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강의 도중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좌중의 관심은 고조된 듯하다. 청중은 종종 질문을 하거나 호응하는 감탄사들을 내뱉는다. 들뢰즈는 이 같은 호응에 힘입어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욕구에 의한 사랑을 설명하는 데 긴 시간을 할애한다. 스피노자의 렌즈를 통과한 들뢰즈의 견해에 따르면, “사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나의 행위, 동일자, 정확히 동일자, 나의 육신적 행위, 나의 신체적인 행위는 그 관계가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직접적으로 내 행위의 관계와 조합되어 있는 사물[사태]의 이미지와 관련되며, “그와 반대로,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사랑 속에서, 하나는 다른 하나를 파괴한다. “거기에서는 관계들의 전체 과정이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들은 그것들 서로에게 난폭하게 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한다. 이 강의의 중반은, 이처럼 최초의 슬픔에 의해 중독된 기쁨을 가지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기본적인 감각적 욕구에 의한 사랑을 묘사하고 기술하는 데서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그것은 잘못된 만남’, 내가 내 관계들과 조화되지 않는 관계들을 갖는 신체와 만날 때벌어지는 일들이며, “일종의 집착(fixation; 이것은 고착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인용자)”이 일어남으로써 내 힘의 일부가 나와 합성되지 않는 대상의 흔적에 투여하고 그것을 국지화시키는 데에 완전히 바쳐지는 사태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런 잘못된 만남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일련의 사태를 꽤나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잘못된 선택을 향해 달려드는, “최초의 슬픔에중독된 사람들은 너무나 무기력한(impotent) 사람들”, “그래서 위험한 사람들이며, 결국 이들은여러분에게 자신들의 슬픔을 불어넣을 때까지 여러분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고, “더욱이, 여러분이 그들에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그것이 여러분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 여러분을 바보처럼 취급하면서 이것이 참된 삶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다툼에 기초하여, 이 어리석음에 기초하여, 조롱의 괴로움에 기초하여 탐닉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 “그들이 여러분에 들러붙으면 들러붙을수록 그들은 여러분을 더욱더 감염시킨다. “만일 그들이 여러분에게 들러붙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옮긴다.

들뢰즈가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이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것을 욕구하는”, 그리하여 최초의 슬픔에 중독된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마치 오늘날 우리가 사회면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의 당사자들이나, 혹은 편집형 인격장애라고 불리는 것에 관한 설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쩌면 지나치게 자신의 실존 감각에 몰입하다가 타인과의 공감 능력이 무디어진 표정 없는 실존철학자의 자기중심적인 일상적 관계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슬픔에 중독된 사람의 관계 해체적이고 시종일관 파괴적인 사랑은 자나 깨나 죽음을 생각하는 존재, 불안과 공포와 염려에 싸여 있는 현존재의 본래성에만 골몰하면서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는 원한을 연료로 삼는 논쟁적인 철학자가 다른 이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강의 뒷부분에서 그는 야스퍼스의 한계상황에 관해 혼란스러운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항상 방법에 대해 말합니다이것은 매우 복잡해진 스피노자주의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결국엔 나는 이것이 종종 담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죠.”) 재미있는 것은 이 같은 일련의 설명에 덧붙여져 있는 녹취록 상의 들뢰즈에 대한 묘사이다; “(들뢰즈는 매우 속이 안 좋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슬픔을 전염시키는 누군가우리가 한 사람쯤은 알고 있는, 일상 속에서 마주칠 수 있으며, 잘못하면 꽤 오랜 시간 시달릴 수도 있는를 아무래도 경험 속에서 소환하여 떠올렸던 듯하다.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이 상황을 순간적이고 동시에 영원한 어떤 본질과 어떻게 연관시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순간은 들뢰즈의 정동자체를 요약하여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강의록의 다른 부분들에 비해 유독 정념적인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흥분을 우리는 그의 초기 글인 냉정함과 잔인성(1967) 전체에서 느낄 수 있다. 냉정함과 잔인성에서 독자는 사도-마조히즘으로 묶이어 통칭되고 있는 기존의 지배적인 정신분석학적 해석으로부터 들뢰즈가 어떻게 마조히즘의 특이성을 구별해내고, 사디즘과는 전혀 다른 구조와 개별적인 체계를 텍스트 자체로부터 세밀하게 발견해내는지 목격하게 된다. 특히나 1975년에 가타리와 함께 저술한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를 비롯한 다른 문학에 관한 글이 다소 기계적으로, 마치 지도를 새로 그리고 독해하듯이 씌어져 있는 것과 달리 (독자는 여러 군데에서 그가 행하고 있는 카프카 텍스트에 대한 창조적 오독에 자주 저항하게 된다), 이 글은 텍스트 자체를 가장 확실한 징환이자 증거로 삼아 프로이트의 사도-마조히즘의 일체성을 반박하고 있어 굉장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들뢰즈가 문학 작품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이 두 저서가 보여주는 큰 차이는, 물론 대상 작품 자체의 특성 차이도 있지만, 그 사이에 있었던 가타리와의 만남이나 그간의 사상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것은 그의 마조히즘 연구가 프로이트를 따라 지배적으로 정신분석학 분야에 널리 퍼져 있었던 사도-마조히즘과 어떻게 다른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글이 있고, 무엇보다 그의 글 자체가 선명하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가외의 요약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들뢰즈의 글 중에서는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거의 난해하지 않은 냉정함과 잔인성, 한 연구자의 가혹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 정신분석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이라면 무리 없이 독해해낼 수 있는 글이다. 프로이트의 뒤집어진 사디즘으로서의 마조히즘에 대한 들뢰즈의 흥미로운 반박열나고 기침한다고 다 감기가 아니듯이, 때리고 맞는 장면이 등장한다고 모두 사디즘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며, 마조히즘은 사디즘과는 그 작동 원리나 구성에 있어 어느 한 군데 겹치는 것이 없고, 오히려 이 두 체계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구도에 대한 대담한 도전이면서도 결국 프로이트의 핵심 개념들인 죽음충동(죽음 본능, 타나토스)과 생명충동(생명 본능, 에로스)에 의해 설명되면서 아버지가 완전히 제외된 일종의 단성생식과 이를 통해 죽음을 통과해 태어나는 이상적 자아의 서사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 글의 진짜 특이성은, 그가 이 글을 문학적 읽기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마조히즘이라는 정신분석학 상의 병리적 명칭을 한 작가의 작가론으로서 확고히 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사실을 첫머리에서 직접 명시하고 있다. 그는 향후 그의 유작의 제목이 암시한 바(비평과 진단진단임상Clinique’의 다른 번역어다.)를 머리말의 결론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는 것이다. “비평적 관점(문학적인 의미에서)과 임상의학적 관점(의학적 의미에서)은 필연적으로 상호이해라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증후학이란 언제나 예술의 문제이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에 대한 임상의학적 특이성들은 사드와 마조흐 특유의 문학적 가치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모든 것을 너무 간단하게 상반성의 연관관계로 파악해 버리는 변증법적 관점 대신 우리는 비평적·임상의학적 평가를 통해 예술적 독자성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두 메카니즘 사이의 차이점을 밝히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냉정함과 잔인성의 서두는 다음과 같은 질문; “문학의 용도는 무엇인가?”로 시작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끝난다; “의학의 과학적 또는 실험적 측면인 병인학은 그 문학적·예술적 측면인 증후학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하에서만 구체적이지 못한 원인들로 제멋대로 정의한 전체 내에서 신경장애의 증후학적 단일성을 분해시키거나 잘못 지어진 이름하에 서로 다른 신경증들을 결합시키는 오류를 피할 수 있다.”

들뢰즈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대한 조사는 철저히 사드와 마조흐의 작품들에 드러난 묘사와 기술(記述)상의 특징, 서사의 전개 과정, 인물의 성격, 작품의 주제를 추적하는 문학 비평의 방식과 정확히 동일하며, “증후학이란 언제나 예술의 문제라는 단언이야말로, 이 같은 조사 방식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데이빗 시글러는 라캉과 들뢰즈의 마조히즘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문학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심지어 흥미롭게도, 마조히즘에 대한 그(라캉)의 연구는 결코 임상 분석에도, 프로이트 이론에도 거의 기초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우리에게 곧바로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소설들을 지목한다.”고 쓰고 있다. “자허-마조흐를 읽어라.”라캉은 마조히즘을 읽기와 해석의 기술들을 통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현상으로 직역한다(construe).” 프로이트는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괴테의 작품으로부터 절편 음란증의 오래된 기호들을 읽는가 하면, 스토우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독자들을 처벌의 가시적인 스펙터클 속에 옮겨놓는다고 말한다. 그 효과는 단지 독자들을 그 자리에 옮겨놓는 것 이상이다. 자크 알렝-밀레는 주체성이란 오직 허구 속의 가치일 뿐이며, “전체성으로서의 언어와 가능성으로서의 언어를 동시에 경험하면서 이중으로 위치지어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결국 라캉, 들뢰즈, 프로이트는 모두 도착증에 관한 분석을 문학 비평의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일종의 주체의 구성 원리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설명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거꾸로, 마조히즘에 대한 연구는 사실 문학 독해 행위에 대한 연구이기도 한 것이다. 독자는 계약 관계 속에서 저자에 의해 종속되며, 그의 환상이 배치된 자리에 입회한 상태에서,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폭력적이든 다 읽어낼 때까지는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 마치 이 같은 독자 훈육을 암시하듯,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세브린은 완다와 함께 (필경 자신이 고른) 책을 읽고 토론하며 자신의 관점에 익숙해지도록 그녀를 훈련시키고 있다. 세브린이 완다를 설득하고 훈육하여 계약관계에 의해 자신의 환상을 완성하고, 또한 그 같은 초과 달성된 환상을 통해 그 자신에게 변경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독자를 길들이고, 훈육하고, 설득하여 자기 환상의 불가피한 구성 요소로 길들인다. 그런 계약적 종속에 의해서라야 독자에 의한 폭력적 해석, 텍스트의 이용과 소모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매우 세심한 역할놀이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착증의 구조란, 독자에 의해 소비되고 이용될 언어가 됨으로써, 텍스트가 됨으로써, 대상이 됨으로써 작가가, /녀의 주체성(저작권, 권한)을 요구하는 방식에 대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들뢰즈의 정념에 찬 감각적 사랑에 대한 혐오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스피노자를 연구하고, 그를 옹호하고, ‘슬픈 정신으로부터는 창조적인 것은 나오지 않는다고 썼던 그가, 그토록 어떤 유형의 고통에 대해 열심히, 자세히, 마음을 다해, 힘 닿는 데까지 깊이 생각하려고 결심했던 것은 이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앞서 지적한 정동에 관한 벵센느대학 강의에서 들뢰즈가 일시적으로 보인 정념적인 순간과 관련하여 마조히즘 연구에서 보여주는 강렬함에서 발견되는 공통성은 이들이 모두 초감각주의(suprasensualism)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욕구에 기초한 사랑이 왜 즉각적으로 관계 해체적이며 나쁜 것인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벵센느대학 강의에서 다소 불분명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들뢰즈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관계가 그의 묘사대로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잘못된 선택’(자신의 관계 전체와 맞지 않는 관계를 선택함)으로써 벌어지는 사태인지, 정말로 그 관계의 당사자가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욕구에 기초한 사랑에 경도된 사람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감각적인=(정신분석학적 어휘를 빌리면 죽음 충동에 잠식된)최초의 슬픔에 중독되어 관계를 해체하는이라는 등식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연관 고리는 그의 마조히즘에 대한 연구에서 찾아지는 듯하다.

(냉정함과 잔인성이 문학 비평이기 때문에) 매저키즘에 함께 실려 있는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감각에 바쳐진 찬가이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로 인해 회한에 싸인 사람의 속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의 알맹이는 세브린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원고로 일종의 액자소설이다. 이 원고의 첫머리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너무나 감각적이었던 한 남자의 고백.”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서 자허-마조흐는 세브린과 완다의 아직 설익은 만남에서 벌어지는 토론들 속에서, 유약하고 감각적이기만 한 현대 남성들에 대한 완다의 경멸 어린 태도와 세브린의 반박을 대조시킴으로써 작업의 시작 시점을 알려주고 있다.

 

사실 감각적인 쾌락과 잔인성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죠.”

단지 제 경우에는 좀더 극단적일 뿐입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이성적이라는 것이 당신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고, 선천적으로도 당신은 유약하고 감각적인 사람일 뿐이라는 뜻인가요?”

그런 의미에서 순교자들도 유약하고 감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순교자들이요?”

그렇습니다. 순교자들은 고통 속에서 적극적인 쾌락을 발견했고, 남들이 즐거움을 추구하듯이 끔찍한 고문과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지극히 감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들처럼 극히 감각적인 사람입니다.”

 

자허-마조흐의 분신이라고 여겨지는 주인공 세브린은 주저없이 감각적 쾌락과 잔인성을 연결 짓고, 완다는 이것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이야기한다. 시글러는 앞서 언급한 논문의 결론에 라캉과 들뢰즈가 모피를 입은 비너스통해마조히즘에 다다른다는 사실, 그 대가로, 문학적인 것에 대한 그것 자체의 조사를 통해 초감각주의에 도달한다는 사실에 중요성을 두고, “우리가 도착증의 문학성에 입문하기를 배울 때에, 마조히즘은 그것이 각자 제자리에 고정시킨 주체들을 서사를 통해 재구성하는, 세심하게 편곡된(orchestrated) 욕망의 그물망이 된다.”고 쓰고 있다. 이 같은 시글러의 결론을, 앞서 제시한 들뢰즈의, “기본적으로 감각적인 욕구에 의한 사랑만을 추구하는, “최초의 슬픔에 중독된 사람의 묘사와 비교해보라.

 

결국 이들은여러분에게 자신들의 슬픔을 불어넣을 때까지 여러분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고, “더욱이, 여러분이 그들에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그것이 여러분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 여러분을 바보처럼 취급하면서 이것이 참된 삶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다툼에 기초하여, 이 어리석음에 기초하여, 조롱의 괴로움에 기초하여 탐닉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 “그들이 여러분에 들러붙으면 들러붙을수록 그들은 여러분을 더욱더 감염시킨다. “만일 그들이 여러분에게 들러붙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옮긴다

 

이 묘사에서 이들이나 그들작가들로 바꾸어 읽는다면, 19세기 이후 내내 인기 있었던 어떤 부류의 작품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는, 들뢰즈가 문학론으로써, 그리고 그것과 구분이 가지 않는 증후학으로써 초감각주의를 다루는 방식과, 그가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윤리학으로부터 가져와서 우리들의 실제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써 초감각주의적인 어떤 요구와 마주칠 경우에 대해 그가 정동되는 방식(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사이의 어떤 괴리이다. , 예술론, 특별히 문학론으로서의 마조히즘 연구는 감각주의에 대한 (대항counter)정신분석인 동시에 작가들이 독자와 가지는 방식에 대한 유비인데, 이것이 만일 현실이 될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의 신체는(그는 보편화된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당장 힘을 투여하기를 중지하고자한다는 것이다.

결국 마조히즘 연구가 보여주는 초감각주의에 대한 비평과 도착증의 유형에 대한 조사는 지적으로 흥미롭고 정신분석학적인 견지에서, 그리고 어쩌면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견지에서도 흥미진진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바라지는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텍스트가 독자를 정동하고 나아가 한 독자로 주체화시키는 것을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과 들뢰즈가 확신하든가, 적어도 암시하고 있고, 이것이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면, 우리가 읽는 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현실적인 삶의 구성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실제로 마조히즘적인 함의를 가진 작품들을 선호했던 듯하다. 그가 시종일관 좋아했던 카프카의 심판낭독이 뜻하지 않게 좌중의 폭소를 유발했다는 점을 들어 마조히즘적 유머에 관해 냉정함과 잔인성에서 직접 거론하기도 하거니와, 시글러는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세브린이 완다의 노예 역할을 할 때에만 주어지는 그레고르라는 이름이 자허-마조흐의 카프카에 대한 오마주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 역시 마조히즘적인 구성 체계 속에 있다고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의 경우는 어떠한가? 세간에서 바틀비의 특이한 어법과 그의 하지 않기로 하는 선택의 특이성에 세속적인 호감을 표시하는 것은 사실 매우 마조히즘적인 구성 속에서 마조히스트의 장치에 매혹당한 뒤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틀비는 (냉정함과 잔인성에서 두 남성원리 중의 하나로 파악했던) 예수의 순교자적인 모습과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적 불복종이 보여주는 소극적인 저항과 카프카의 단식 광대를 합쳐놓은 것 같은 모습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사한 카프카의 단식 광대가 함의하고 있는바 역시, 마조히즘적 비극의 희극적 기미, 초자아를 비웃으면서 자기를 무화시켜버리는 엄청난 자아의 고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조히스트의 법 조롱이 들뢰즈의 말대로 유머라면, 그것은 블랙 유머에 가까울 것이다.) 너무나 열심히 세간의 평가기준을 따라 살려 노력하는 신경증자의 모습에 반성을 야기한다고 해서 자기를 파괴해가면서 초자아를 비웃는 데에 모든 힘을 쏟고 있는 도착증자를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표상으로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도 좀 우습지 않을까? 무위의 자유는 죽은 듯이 살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권태나 무의미 대신 평화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바틀비는 선호의 논리를 새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선호는 명확하게, 인간적인 행위들을 하지 않음에 대한 선호이며, 그의 전반적인 생활양식은 길고양이의 그것과 같다. 그는 소송대리인이 바로 바틀비 그 자신 때문에 사무실을 옮기고 나서도(이건 미안함에 대한 대가치고는 엄청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송대리인과 바틀비의 관계에서 주인과 노예는 역할이 뒤바뀌어 있다.) 고양이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영역을 떠나지 않으려고 고집하며, 심지어 다른 이가 그 자리에 사무실을 차린 다음에도 그렇다. 그는 명백히 남에게 해가 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적인(상징계에 기반한) 탐욕을 부리는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도 그가 선호하는 전혀 비인간적인 소박한 욕망길고양이처럼 자신이 있고 싶은 곳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고 싶은 것이 인간적인 모든 제도를 방해하게 되는 결과 속에 있다.

멜빌의 소설을 통해 들뢰즈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멜빌 자신이 제시했던 메시지와 결코 매우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바틀비와 같은 인간이 완전히 가능하며, 침묵과 무위를 선호하는, 아주 공손한 형식을 유지하는 비타협적인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래 영원히 형벌로 주어진 노동을 거부하고, 신이 인간에게 준 명명할 권리를 거부하고, 그보다는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에서처럼 단지 주어진 자연 전체 속에 가만히 있고싶어 한다. 그런 인간이 가능하다. 이것의 속화된 형태를 종편 채널과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공영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사실상 매일 보고 있다. 그들은 그 같은 무위와 침묵을 통해 신경증적인 이 체제를 조롱하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도 있다. 바틀비는 순교자이며, 불복종적인 반시민이며, 마조히스트다. 그의 죽음만이 짧은 뉴스거리이며 이 세계의 배설물처럼 잠시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일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들뢰즈는 세브린이 그레고르로서 완다와의 자발적인 계약관계를 초과 달성한 이후, 자신이 만든 무대와 환상과 계약의 결과로서 이전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었던 마조히스트적 사디스트’, 유사-사디스트로 변모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단지 짧은 언급을 하고 있을 뿐이다. 라캉이 마조히즘에 대한 물음에 대해 단지 자허-마조흐를 읽어라라고 했던 말에 관해 시글러가 해석한 바, 이 같은 지침에서 자허-마조흐자허-마조흐의 작품들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작가와 작품의 동일성을, 나아가 작품이 작가를 초과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결론을 의도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액자소설의 바깥에서 는 세브린의 원고를 읽고 난 후, 세브린에게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인지 묻는다. 세브린은 첫 번째 대답으로 내가 바보였다는 거요!”라고 외치고, 그 다음으로는 여자는 철저하게 남자의 적이라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이야기의 교훈은 바로 이것이요. 얻어맞기를 자청하는 자는 마땅히 맞아야 한다는 것이오. 당신이 읽어보았듯이 나는 이미 그 매를 맞아보았고 감각주의라는 그 장밋빛 안개는 더 이상 나를 현혹시키지 못하오.”

감각에 대한 욕구와 법을 조롱하며 편법적으로 취하는 마조히스트의 부가적인 쾌락의 극단에서 세브린은, ‘망치가 되느냐 아니면 얻어맞는 모루가 되느냐하는 이분법적인 논리 안에서 모루가 되기를 자청했다가 마침내 그 환멸에 의해 망치로 변모한다. 시글러의 결론과 같이, 만일 마조히즘 이론이 독서 행위 이론으로 치환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의 부가적인 사항을 반드시 병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당신이 읽는 것이 당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만들어낸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고통의 수업료가 생각보다 훨씬 비쌀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읽어버린 이상, 당신은 변모하기 시작했고, 당신이 진지하게 읽어버렸다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감각적인 욕구에 의한 사랑을 묘사하면서 속이 울렁거리던 들뢰즈는 더 이상 냉정함과 잔인성을 쓰던 들뢰즈가 아니다. 바틀비처럼 논쟁을 회피하던 그는 카프카의 단식 광대처럼 점점 작아지다가 사라지는 대신, 영원회귀의 미래 시간을 자기 손으로 끌어당겨 카오스모스 속으로 자기를 던졌던 것이다. 그는 망치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  계간 <파란> 2016 가을

The Velvet Underground, "Venus in F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