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쯤 전 김수영은 죽기 전에 쓴 그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라고 쓰고선, 막상 시의 형식-예술성/내용-현실성 논의에 들어서자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고 쓴다.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는 것’에 부연하듯 덧붙인 말은 이것이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소설을 쓰듯 시를 쓴다는 말은 내용-현실성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알다시피, 그의 시론의 주제인 ‘온몸’은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지 않은 이 둘 사이의 긴장 자체이므로, 소설을 쓰듯 쓰는 시가 ‘시’를 쓰듯 쓰는 시의 내용/형식과 일치할 리 없다. 그것은 극단의 긴장과 배반의 반복일 것이기 때문이다.
서두를 김수영으로 시작한 것은 김언이 첫 시집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이러한 의미로서의 ‘소설쓰기’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 왔기 때문이다. (「수영을 생각함」에서 김수영에 대한 심리적 태도의 밀착감이 확연히 드러나기도 하지만) 김언은 김수영의 시와 시론이 예기치 않게 멈출 수밖에 없었던 지점에서 자기 식으로 ‘온몸’을 완수하려고 한다. 어떤 식으로? 더 많은 자유를 위하여 더 많은 산문성을 도입하되,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한다는 김수영 식 ‘소설 쓰듯 시 쓰기’의 김언 식 발전 계획을 통해서다.
첫째, 그의 시의 최소 단위는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다. “그 자체로 세계인 문장...문장에서 인생이 보인다면 세계가 보인다면 나는 소설을 쓰는 것처럼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詩도아닌것들이」, <거인>) 시의 전통적인 형식미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이것은 분명 생소한 태도일 테지만, 문장이라는 한 덩어리의 세계/인생이 사건과 인물과 인물의 어조, 태도를 한꺼번에 짐작하게 하는 단위로서 시 속에 놓일 때, 이것은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포함한) 인식과 그것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에 대한 태도를 전위로 삼는 강력한 힘을 의식한 후의 것이다. 그것은 극도의 압축과 절제를 통해 단어를 시적 세계의 꼭짓점으로 묶거나, 많건 적건 이미지의 풍요를 위해 수식어들을 취사선택하는 방식과는 반대되는 지점의 극단을 향한다.
둘째, 그는 이번 시집에서 자기 내부의 인물들을 ‘사건’이 사는 시공간과 동일시하고 그리하여 사건 현장으로서 여러 ‘나’들의 재서술을 한꺼번에 꾀함으로써 ‘모순 없는 진실은 없다’는 경험적 현실을 가감없이 드러내고자 한다(“이 소설의 등장인물이 그들의 주요 서식지다...소문처럼 텅 빈 공간을 이 소설이 말해 주고 있다. 등장인물은 거기서 넓게 발견될 것이다.”-「사건들」). 김언이 시집의 표지에 다소 과감하게도 ‘소설을 쓰자’는 제목을 달았을 때, 아무래도 그건 그냥 자기 시들 중에서 맘에 드는 시 한 편의 제목에 대충 대표성을 담았던 것은 아니다. 첫 시집 <숨쉬는 무덤>의 3부에는 어니, ‘소설가’ 곰치, 자두, ‘만인의 연인’ 제니라는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일종의 연작시들이 실려 있는데, 그가 자신의 산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 이들은 모두 시인 김언의 ‘나’와 동격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의 안팎을 살고 있는 그의 ‘나’들이다. 김수영이 자기 시에서 ‘내’가 ‘딴 사람’이 되는 경험, 그러니까 ‘나’의 타자화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하면서 그것을 시간의 문제로 끌고 가는 데 주력했다면, 분열된 주체라는 담론이 이미 공식적으로 선언되어버린 2000년대에 씌어지는 김언의 시는 단일한 ‘나’의 쇄신의 문제보다는 이미 너무 많은 ‘나-타자들’을 실체화시킴으로써 들끓는 사건 자체와 그것의 현장을 될 수 있는 대로 다 보여주려 노력한다. 그의 시가 대체로 완결된 문장 구조의 긴 산문 형식을 띠는데도 이해하기 힘든 까닭은 압축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종종 ‘나’들 중 한 명으로 하여금 자기를 대리하여 일목요연하게 사건이나 사물을 드러내는 대신, 자두와 제니와 어니를 비롯한 무수한 ‘나’들의 심정과 태도를 누락시키지 않으려 한다(그것을 수행하는 기능소로서의 ‘나’는 ‘소설가’ 곰치씨다).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자유를 떠나”는 일이며(「자연」), “모든 것이 연기로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그것은 충분히 하나의 심정으로 굳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만 못마땅하”다(「인터뷰」). 그러자니 한 편으로 완결되는 시는 드물어지거나, 겉으로 완결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배반에 배반을 거듭한다. 그 ‘나’들의 태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들의 진술을 하나로 묶는 발화행위의 주체는 거의 고된 편집자의 노동을 수행해야 한다.
왜 그는 모든 것을 빼놓지 않으려 하는가? 뭉뚱그려진 사건의 여러 겹의 층위와 ‘나’의 수많은 목소리를 다 들려주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아마도 ‘사건’의 단위가 관습적이고 권위적으로, 따라서 임의적으로 설정된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에서 나오는 것 같다. ‘누구의 사건’이 ‘우리의 사건’으로 화하는 경계의 애매함과 웅성거림, 관습적이고 틀에 박힌 행위를 이끌어내는 사건의 이름이 도래하기 직전(‘나’들 각자의 ‘직전’)과 그 전후의 ‘다른 시간’(「인터뷰」)들. 그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이미 도착해 있는 ‘경향’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도래했는지 확실해지기(그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직전의 포즈는 모두 사실이”다(「연인」).
때문에 그의 시집은 시편 낱낱의 발화들이 가지는 값 못지않게, 덩어리로, 시집 한 권이 통째로 읽혀지는 값이 남다르다. 눈높이와 패러다임을 바꾸어가며 이어지는 더듬거림, 비문, 빈 공간으로서의 ‘나’에 들어앉는 여러 다른 ‘나’들의 자기주장.
‘나’라는 빈집을 당분간 관리하기로 되어 있었던 ‘소설가’ 곰치 씨가, 이 집에 드나들며 자기가 진짜 임대인이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소설 같은 시집을 펴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사건이 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것은 고통스러웠지만, “공기가 그를 도와주었다”. 그게 숨(空氣)인지 밥그릇(空器)인지 문법(共起)인지 정부기관(公器)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문장」에는 ‘큐’가 결석했는데, 그건 아직 실제로 촬영되진 않았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