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중년 남자의 비애란, 그의 삶이 가족과 사회에 바쳐지고, 그 헌신을 위해 자기 자신의 사감(私感)들을 오롯이 감당하고, 평생의 노동이 그를 외면한 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리라는 (확실한) 예감과 떨어뜨려 생각하기 힘들다. (「은자(隱者)」에서 그가 쓰고 있듯, 죽어서 비로소 은닉될 수 있었던 익명적 주체에게, 죽음과 대응항인 삶은 “자해의 흔적인지, 타살의 단서인지 도저히 밝힐 수가 없는” 노동의 흔적으로 치환된다.) 사랑이 많은 남자에게 이 비애는 유독 깊다. 사랑은 모든 국지적인 문제를 전면적인 번민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영의 이번 시집에서 일상의 국면들이 깨달음으로 수렴되는 것은 이 사랑의 보편적 성격 때문이리라. 참으로, 서정적 화자의 진정한 번민은 사랑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닌가.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라는 표제작부터가 사랑의 전면적 성격 앞에서 속수무책인 ‘나’의 고백이다. 그는 시집 앞머리에 “어떤 벼락이든 한번은 맞고 볼 일”이라고 적어놓았는데, 그렇다, 이 ‘벼락’이 ‘너’라는 타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너’를 맞아야 한다. 그것은 ‘너’라는 타자를 ‘맞아들임’이 언제나 행복하고 따뜻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벼락을 ‘맞는’ 듯한 느닷없는 충격과 동시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만남은 언제나 위험하다. “한 사람이 그리운” 것을 “몸쓸 짓”으로 예감하는 것(「고라니」)은 그 때문이다. 그때, 타자(他者)는 타자(打者)다. 이때 ‘이웃을 사랑하라’의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의 원수는 한 몸이 된다. 그런데 사랑이란, 타자에 대한 충실성을 함의하므로, ‘나’의 결심과 상관없이 계속되는 충실 속에서 ‘너’를 맞은 충격은 한 번 지나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이시키는 일생의 과정이다. 한번 맞아들인 타자의 충격은 행/불행을 판단할 수 없는 지속적인 시간 속으로 ‘나’를 던져 놓는다. 타자는 ‘나’의 가치체계를 뒤흔드는 혼란이기 때문이다.
너......라는 말 속에는 슬픔도 따뜻해지는 밥상이 살고/너......라는 말 속에는 눈곱 낀 그믐달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밤마다 새 떼를 불러 모으는 창호지문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물구나무 선 채 창밖을 몰래 기웃거리는 나팔꽃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스스로 등 떠밀어 희미해지는 바람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진즉에 버렸어야 아름다웠을 추억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약속 그래서 더욱 외로운 촛불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불멸의 그리움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안고 괴로워하는 상처도 살고/너......라는 벼락을 맞은 뼈만 남은 그림자도 살고-「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전문
모든 것이 다 있으되 “뼈만 남은 그림자”로 ‘나’를 살게 하는 ‘너’라는 벼락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진즉에 버렸어야 아름다웠을 추억”이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약속 그래서 더욱 외로운 촛불”, 그리고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안고 괴로워하는 상처”는 ‘너를 맞음’이라는 사태가 결과적으로 ‘나’의 생을 관통하며 회한으로 기억됨을 보여주지만, 이 회한은 전반부에서 호명되는 ‘너’가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이고 따뜻한 추억들을 모두 보듬은 채다. 그래서 벼락같은 ‘너’를 ‘맞음’은 ‘나’를 “아름다웠을 추억”과 “진즉에 버렸어야 할”로 쪼개어 살을 발라버리고, 끝내는 물리적 실체를 잃어버린 ‘그림자’로서만 목숨을 부지하는 애증 속에 영원히 가두어놓았다. 벼락이 왔다 갔다는 것을, ‘나’는 이별을 통해서만 안다.
혼자 남겨진 저녁은/가슴에 새긴 상처보다 더 빨리 와서 슬펐다./그날 나는 울먹였던가, 울먹이다가/끝내 눈물과 화해했던가.//...(중략)...//어제 떠나간 사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오늘 남겨진 몰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내일 곱씹을 후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중략)...//칸나의 슬픔/마리아의 눈물//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떠난다./24시 편의점에 불은 꺼지고/향기 없는 모과는 더 깊이 찌그러진다.-「물끄러미 칸나꽃」
“혼자 남겨진 저녁은/가슴에 새긴 상처보다 더 빨리 오”고, “칸나꽃 다 지기도 전에 칸나꽃 향기는 떠나고”, “종소리 다 듣기도 전에/성당문은 굳게 닫힌다”. ‘지기도 전에 향기가 떠난’ 칸나는 ‘마리아’처럼 사건 뒤에 남겨진다. 어떤 마리아일까? 요셉의 아내 마리아일까, 막달라 마리아일까? 예수의 어머니든, 다섯 남편을 가지고 예수에게서만 유일하게 이해받은 막달라 마리아든, 그들은 충분히 고지되어 왔는데도 갑작스럽기만 했던 예수의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랑한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떠난다”고 시인은 썼지만, 어쩌면, 떠남이 사랑을 사후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은 아닐까. “배신은 사랑의 궁극적인 확증”이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수수께끼 같은 말도 이 같은 강박적 경제에 강한 심증을 준다. 시간의 강제인 죽음이든, 주체의 (무)의지가 결부된 이별이든, 남겨진 사람에겐 마찬가지로 배신이다. 타자(打者)이자 타자(他者)인, 원수이자 이웃인 ‘너’의 떠남은 ‘너’를 맞는 사건만큼이나 갑작스럽다. ‘너’를/에게 맞은 ‘나’는 이미 이전의 ‘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미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며, 지속적으로 변이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하는 주체가 스스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나 ‘지금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은 언제인가?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로를 조종해가는/완벽한 합일!//지금, 세상의 중심이 저들에게 있다”(「사랑」)는 시인의 말은 그래서, 바깥에서만 가능하다. ‘너라는 벼락’이 왔다 갔다는 것을, 그러니까, ‘나’는, 이별을 통해서만, 바깥이 되어서만, 안다. 그 순간, ‘뼈만 남은 그림자’처럼, “향기 없는 모과는 더 깊이 찌그러진다”.
이밖에도 「천사보육원」, 「북청전당포」 같은 시들에서 보이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이해, 「음복」이나 「속죄」 등에서 보여주는 맑고 간결한 서정적 성찰은 독자를 겸손하게 한다. 인간과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과잉되지 않은 쓸쓸한 정서는 백석이나 정호승의 시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좋은 서정시들이 가진 미덕은, 우리를 무용한 흥분 속에 몰아넣지 않고서도 세계에 대한 손쉬운 순응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사랑을 맹목적인 헌신이나 무분별한 동정심과 착각하지 않으려 투쟁하는 서정 시인의 조용하고 지속적인 싸움을 응원하면서, 나는 오늘 한 시인이 자기의 삶을 깎아 내어놓은 잘 익은 서정적 성찰의 편린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먹는다.
오은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을 읽는 독자들이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것은 그의 현란한 말놀이일 것이다. 그의 말놀이 자체가 골머리를 앓으며 수행되는 것이 아니므로, ‘연구’한 뒤에 읽는 오은 시의 재미는 반감되리라. 또, 이 말놀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 묻는 것도 시기상조이거나 무의미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과연 있다면, 그것은 놀이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인으로 하여금 말로 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하는 심리적 강제는 분명히 있다. 말놀이와는 별도로, 아니 그 말놀이를 통해서 그가 순간순간 의도한 그림의 마무리는 종종 어딘가 불충분한데, 이 불충분함은 자신의 시에서 펼쳐 보이고 있는 상황에 대한 시인의 감정의 방향이 아직 미결정 상태에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나는 그의 끝없는 말놀이의 배후에 그것을 추동하는 ‘체념 직전의 불안’ 같은 것이 있다고 느낀다. 1차적인 단서를 시인은 시집의 「자서(自序)」에 살짝 던져놓았다;
천둥과 번개/개와 원숭이/까마귀와 배/앙꼬와 찐빵/붕어와 붕어빵/웃음과 울음/눈물과 눈물/홈스와 뤼팽/커피와 담배/金과 숲/사드와 자허마조흐/누벨바그와 트뤼포/알리바바와 알리바이//나와 너는 거의 모든 관계,/아무리 의심해도/섣불리 숨길 수 없었다.-「자서」 전문.
그의 자서는 본문에서 펼쳐지는 말놀이의 핵심을 보여준다. 세계에 편재해 있는 사물들, 인간의 심리 속에 실재하고 있는 개념적 사실들에는 대개 이름이 있다. 이 수다스러운 시인에 의하면 편재해 있는 사물 혹은 개념적 사실의 이름들 사이의 관계란, “아무리 의심해도 섣불리 숨길 수 없”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시를 쓰는 데에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는 바로 이 관계들, 음운/형태상, 일상/이론적으로 유사하거나 대립적인 이름들을 병치했을 때 생겨나는 효과들이 가진 임의적이고도 숨길 수 없는 관계들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말놀이를 통해 혼자 ‘놀’ 뿐 아니라 ‘놀려먹기도’ 한다. 사물, 혹은 개념의 이름과 이름 사이의 모든 임의적이고도 상관적인 관계는 개별적인 이름의 특수하고도 고유한 의미 속에 붙박힌, 이름의 주인이 지니고 있던 절대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범주가 다른 이름들이 오로지 그 형태나 음운의 유사성만으로 짝지어졌을 때, 혹은 속담이나 관용구, 이론의 문패들로 간주되고 짝지어져 말놀이 연쇄의 고리들이 되었을 때, 이 이름들의 가치는 평준화되고 관계 속에서 수평적인 위치를 가지게 된다. 그는 이름의 권위나 고유한 의미의 진지함을 부정한다. 아니, 그 권위와 진지함의 가치 절하가 놀이의 효과다. 그는 종종 카페인을 과다 섭취한 사람처럼 조증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그의 말놀이 뉴런들이 12월의 크리스마스 상점처럼 성업 중이라는 증거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체념하고 무엇을 불안해한다는 것일까? “나와 너”의 관계로 이루어진 ‘우리’라는 복수 1인칭이 이 모든 관계를 “섣불리” “숨길 수 없었다”는 점, 즉 관계에 대한 은폐가 그에게 은밀하게 강요되고 있다는 데서 시작하자. 그에게 주된 감정은 서정적 화자에게 흔히 기대되는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과 감동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그리고 이것을 은폐해야 한다는 은밀한 강요에 대한 저항감이다.
우선, 3인칭 화자의 입을 빌려 어린이 주인공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들로부터 이를 유추해보자. 어린이나 천진난만한 얼굴을 가진 그의 주인공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처럼 말놀이 여행을 거친 뒤 “뜨악해, 뜨악해, 산다는 게 뜨악해.”라고 말하고 잠들어 “다시는 깨지 않”는다든지, 「모기를 잡는 연이」의 연이처럼 밤마다 모기를 잡아 피를 맛보면서도 “맑은 눈으로/언제든 벌레만 보면 소스라칠 수 있다는 듯이” “엄마의 이마에 키스하며/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 이 어린이 주인공들은 슬프거나 감동적일 틈이 없다. 지금 화급한 것은 자신의 진짜 모습과는 달리 기대되고 부과되는 상징계의 자리가 주는 충격과 당황스러움이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모든 것들이, 심지어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놀랍고도 아주 많이 두려웠”으며, ‘연이’는 “배은망덕하게도” “이미 맛을 알아 버렸”으므로 “세상 물정 모르는 우리 딸/지금처럼 밝고 건강하게 자라 줬으면/벌레들 모르게/엄마랑 단둘이 평생 살았으면”이라는 엄마의 말에 “소스라치며/눈이 뻘겋게 달아올라/실은 엄마, 사랑해요”라고 기대되는 대답을 하지만 “새콤달콤 딸기 주스”라는 말로 말끝을 흐리며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얼버무려야 한다. 그만큼 놀라고 당황했으면 적응할 만도 하건만, 시인은 그 놀람과 당황스러움의 자리에 투항할 수 없는, 빼앗겨서는 안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은 이 어린이들은 어른 세계를 십분 이해한다. 다만, 거기로 가버릴 수 없고 혼자 몰래 자기의 놀이를 지속함으로써 자기를 파괴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뿐이다. 그것은 오은의 시가 대개 우화나 상황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역할놀이가 비참하고 비루한 실제 상황의 인유라는 점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식충이들」의 ‘먹다’와 그 어간 ‘먹’으로 현란하게 펼쳐진 말놀이는 그의 시를 ‘날로 먹으려는’ “당신”의 비루한 삶과 뻔뻔한 의도를 겨냥하며, 「변신」의 등장인물들은 호칭에 의해 배우들이 바뀌다가 결국 “여보와 아빠가 되기 위해 집으로 향”하는 결구를 통해 상징적 자리들이 부과하는 피곤을 드러내고, “-가 없다”가 범람하는 「당신에 관하여」는 ‘X도 없는’ “당신”의 삶이 끝날 기미조차 ‘없는’ 비참한 상황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여전히 말놀이를 경유하고 있으나 비교적 직접적인 화법으로 어른 세계의 비참함과 비루함을 짚고 있는 시들이 2인칭이라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그것은, 앞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모기를 잡는 연이」처럼 3인칭 화자를 빌린 시들과 달리, ‘어른’이 대상일 때에는 ‘어른 세계’의 파국을 직접 언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당신-어른’은 비참하고 비루하나, ‘나-어린이’는 그 세계에 동참하는 척함으로써 ‘당신-어른’ 몰래 즐겁다.
그러나 이 즐거움이 ‘당신-어른’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 또 이 놀이가 영속적일지에 대한 의심과 불안은 그의 시들에 미결정된 감정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하여 나는 대부분의 서정시에서는 무시로 찾아볼 수 있으나 오은의 시집에서는 가뭄에 콩 나듯 발견되는 1인칭 화자의 독백 형식의 시로부터 순정한 어린이의 불안을 목도하였다.
순간이 도래하기가지/우리는/불길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발생하려는 경향」, 부분.
마주침이 있기 전까지, 그 순간이 도래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그 자신이 정말로 ‘발생’하기 전까지, “우리는”, 특별히 그는, “불길하게 방치되어 있”다. 정말로 ‘발생’한다는 것, 마주침이란 무엇인가? 그에게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도적이나 선물처럼 느닷없이 찾아오고 주어질 어떤 사건처럼 보인다. 이 사건은 성장보다는 변신에 가까울 것이다. 성장을 대체할 느닷없는 변신에의 기다림, 발생하려는 경향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으로부터 수다스러운 21세기 흡혈 어린이의 놀이가 시작되었다. “아, 이 은밀한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소리 없는 오르가즘에 대해/고통 없는 마조히즘에 대해/규칙 없는 알고리즘에 대해//당신이 뭘 언급할 수 있겠”는가(「신경쇠약 직전의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