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완벽하다. 당위성이 빠지면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해진다. 혹은 공유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당위를 수긍하고 난 뒤의 세계는 나름대로 완벽하다. 그런데 완벽이란 게 대체 뭐지? 그건 그냥 그대로 있음, 자연(自然) 아닌가? 유대인들의 신 ‘야훼’의 본래 뜻처럼, ‘스스로 그러한’ 것, 무수한 ‘-임’, Be 동사의 모든 주어들. ‘더 높은 곳’이 없는 이곳에서, 신성은 하향 평준화되고 만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어찌됐든 완벽하다.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는 실용주의의 명제가 세계화되는 자리, 과거의 모든 사건이 정당화되는 자리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던 80년대 소설가의 말은 완료된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게 된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성립된다고 한다. ‘지금 여기’가 최선이다. 아무리 맛없는 식사라도 당신의 삶을 하루 더 연장시켜줄 것이다. 그러니 “건드리지 마!/여기는 완벽해.”(「전설의 고향」) “행복은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므로(「날마다 편히 잠드는 영희의 기술」), ‘그냥 있는’ 것들에 만족하고 ‘그냥 있으면’ 된다. 불만인가? 그대가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는, 뭐랄까, 대단하지가 않다. “손에쥐고통째로먹고싶어요엄마./한세계를완전히가지고싶어요엄마.”(「작고한 金들의 세계」)라고 그대는 투정하고, “이대로 아무 제목 없이 죽으면 어쩌나”(「훙커우 공원의 고양이들」), “익숙해익숙해미치겠어”(「거울에게」)라고 중얼거리다가, “나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이젠 정말 참을 수 있어.”(「난 스타를 원해」)라고 자위(自慰)도 해본다. 나름대로 완벽한 세계에서 대단치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영희는 영희가 아니니까. 영희는 90년에 불 타 죽은 영희고, 80년에 죽은 영희고, 61년에, 45년에, 50년, 19년에도 죽은 영희다. 영희는 “교과서에 실리는”(「나와 영희와 옛날이야기의 작가」) 그 유명한 영희다. 유명한 영희야말로 대단한 영희니까. 영희를 유명하고 대단한 영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되어 있는 세계 X의 ‘X임’에 복무했음을 증명하는 교과서다. 그냥 복무하면 안 되고 극적으로 죽어야 한다. ‘나’는 “19년에. 법상동 사거리에서 만세 운동을 흉내 내다 다리를 삐었”다(「나와 영희와 옛날이야기의 작가」). 하지만 극적으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영희가 될 뻔하다 만다.
모두가 유명한 영희에게 환장한다. 환장했었고, 아닌 척하지만, 그대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생각하다가 그것은 “외운 것”이라고도 생각해본다).
웃지 마. 영희를 안다고 하는 게 유행이었어. 알잖아. 아무나 교과서에 실리는 건 아니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어제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 봤잖아. 물어봐. 다들 자기가 영희랑 제일 친한 친구라고 해. 불타는 구호는 너무 늙었다고 수군대면서도 다들 영희 찾는 전화가 자기한테만 온다고 해. -「나와 영희와 옛날이야기의 작가」 부분.
이 평온한 세계에 울리는 난데없는 전화벨 소리. 하지만 그건 그대 자신의 ‘장난전화’일지도 모른다. (같은 시)
‘지금 여기 그냥 있음’을 문제 삼다 보면 그 시작이 궁금해진다. 도대체가 그대가 처음부터 ‘그냥 그대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거실 벽 가족사진이야말로 코미디의 표본 같은 것./하물며 국사 책의 단군 영정 따위야 말해 무엇 할까.//시작에 관한 공공연한 왜곡들./촌스럽기 짝이 없는.//모든 눈물은 텔레비전 속에 있고/난 여전히 이름 없는 몸 속에 갇혀 있는데/눈 밖으로 내다보이는 이 정원의 분명함.
-「난 스타를 원해」 부분.
국가도 개인도 시작이 허구였으니, 전도서 기자의 말과 같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대는 그럼에도, 역사책을 읽는 일을 포기하지 못한다. 읽을수록 분명해지는 허구 앞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호기심의 늪에서, 그 모든 것이 통째로 거대한 거짓말이라는 심증 속에서, 거짓말이야말로 모든 것의 가능성이라는 놀라운 깨달음이 도래한다.
사실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지만요./사실 오늘은 어떤 날도 되겠지만요.//시간의 총탄이 빗발치는 여기는/대대로 투명한 전쟁터랍니다.
-「거짓말」 부분.
그러나 이 같은 진술은 ‘선생님’에 의해 도리어 ‘거짓말’로 낙인찍힌다. (영희는 선생님과도 공모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 거짓말이나 교과서에 실리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 아닌 세상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같은 시)라는 쓸쓸한 독백은 천동설의 재판정에서 돌아 나오는 갈릴레이의 그것처럼, 아직까지는 ‘저 혼자 진실’이다. (‘진실’이라고? 오, 이를테면, 이제 ‘진리’나 ‘참’ 같은 말은 쓰이지 않은 지 오래니까 말입니다.)
자꾸만 “텔레비전에 나오”는(「나와 영희와 옛날이야기의 작가」) 영희, “역사는 뭐 아무한테나 해석되는 줄 아니? 넌 그냥 살면 돼.”(「날마다 편히 잠드는 영희의 기술」)라고 윽박지르는 영희. 그대는, 급기야 투명해진다.
텔레비전 속에는 내가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유령 채널이 점점 늘어 가는데/당신이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나처럼 말이죠./그렇다면 내가 유령이라는 건가요?/당신이 유령이라는 건가요?
-「그렇고 그런 해프닝」 부분.
기승전결이 완벽한 역사와 달리 그대, 투명한 앨리스의 읊조림은 지리멸렬할지도 모른다. “혹시 당신/줄거리 같은 걸 요구할 생각이라면.”(「달과 나와 선물」) 하지만 일목요연한 건 수상한걸. 줄거리를 잃어버린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 헛갈리고(“거울아 거울아!/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니?”, 「거울에게」), 그대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고/텔레비전에 나오지는 않지만 그것은 사실.”(「살의의 나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완벽하다. “하긴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말은 현실에 충실하자! 니까”(「그렇고 그런 해프닝」). “이제 우리에게 시간 말고는 더 이상 남은 이데올로기도 없”으니까.(같은 시)
어떻게 해야 하나? 영희를 찾는 전화벨이 자꾸만 울리는데. 그건 장난전화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영희도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은데. 소문만 무성한 투명한 집 주변을, 앨리스는 돌고 또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