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빗소리를 듣던’(「지옥에서 듣는 빗소리」, 불온한 검은 피) 한 남자가 “왠지 모르게 우리는 텔레비전처럼/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청량리 황혼」, 불온한 검은 피)는 마지막 전언을 남기고 사라진 지 13년, 홀연히 귀환한다. 두 권의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얼굴 사진은 애인과 정사(情死)한 다자이 오사무처럼 불길하고, 불길한 얼굴이 으레 그렇듯 나이를 종잡을 수 없고, 좌우가 바뀌어 있다. 그는 방황하는 여름 같았던 청춘을 지나 회사원이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 직장에 가는 일을 부끄러워했지만 목숨이 달려 있었으므로, 병원에 가고 출근을 했다. “왜 가난은 항상 천재이며, 고독과 번민이 천재이어야 하나...뭐 시인 만세라고 빌어먹을 너희들은 나를 학생이라고 부르고, 허군이라고 부르고, 가끔은 젊은 시인이라고 부른다...나는 출근을 한다...나는 지금 목숨을 건다. 지중해에 태어나지 않았으므로.”(「출근」, 불온한 검은 피) 이제 그는, 새 시집의 자서에 이렇게 적는다. “결국,/범인(凡人)으로 늙어 간다./다행이다.”
오랫동안 시를 쓸 수 없었던 그의 ‘휴면기’에 그는 활동 정지 상태의 아프리카 폐어처럼 진흙 속의 생활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며”(「휴면기」) 돌아왔다고 그는 쓴다. 그것은 고독-번민-가난-천재의 청년 시절로부터 휴면기를 거쳐 비굴-오만-직장인-범인의 중년 시절로 이행하는 동안의 깨달음에서 비롯됐다. 사막에 비는 내릴 기미가 없었다. 비가 내리기는커녕, “말라가는 것이 내가 아는 생(生)의 전부”(「멸치」)가 되어버렸다. 시집을 펼치면 처음 독자가 맞닥뜨리게 되는 시,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에서 화자는 ‘추하다’와 ‘평범하다’를 등치시킨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추하다는 말을 간간히 들으며 산다는 것, 그러므로 “헤엄치기를 잊어버린 도미가...용서한 자의 자태”이다(「도미」).
무엇을 용서한단 말인가? 과거가 현재를 구성했다는, 하거나 하지 못한 과거의 일들의 책임이 자신의 것이라는 그 무서운 깨달음이 벌려 보여주는 시간의 절개면, “움직여야 하는 운명과/그렇지 못한 운명의/빨간 틈새”(「경첩」)에서, 용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이며, ‘나’를 이렇게 구성하게 만든 세상에 대한 용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정말로’ 용서할 수 있는가?
가령, 「슬픈 빙하시대 1」은 원하지 않던 시공간 속에 놓여 있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자기 자신의 구성의 결과로서 인정한 뒤에 오는 회한을 쓸쓸하게 풀어놓는다. 이 시에서 그는 타인에 대한 성숙해가는 이해를 감동적이고 솔직하게 보여준다.
호명되지 않는 자의 슬픔을 아시는지요. 대답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아시는지요. 늘 그랬습니다. 이젠 투신하지 못한 자의 고통이 내 몫입니다. (「슬픈 빙하시대 1」 3연)
관계는 언제나 상호적이므로, ‘당신’의 호명에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던 ‘나’의 성격적 비극은 ‘당신’으로 하여금 기다림도 호명도 포기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이 고집스러운 ‘나’의 수동성이 ‘당신’의 ‘산’을 ‘당신의 슬픔’이라는 ‘덤불’로 다 덮어버렸다. 결국 ‘나’는 정말로 더 이상 ‘호명되지 않는 자’, ‘대답하지 못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시인이 시의 지층에 다 새겨 넣지 못했던 세월에 대한 압축된 보고이자 성찰이며, 회한으로 구성된 현재하는 ‘나’에 대한 고백이다. 그는 그 산을 아직도 다 내려오지 못했는데, “어려운 것들은 전부/내려오는 길에 몰려 있었고...기억은 여지없이 기억일 뿐이었”으며, “거대한 것들은 차라리 돌아서 갈 수 있었”지만, “어떤 기억도 소멸하지 않았다”(「그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왜 나는 떠나 버린 것들이 모두 지층이 된다는 걸 몰랐을까.”(「지층의 황혼」) 그러므로, “투신하지 못한 자의 고통이 내 몫”일 때, 진짜 비극은 “내게 세상은 빙하시대”(「슬픈 빙하시대 1」)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이든 혁명이든, 자기를 올인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온갖 ‘기억들’이리라.
이때, ‘나’는 다음의 몇 가지 태도를 취해볼 수 있다. 1.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은 나를 아주 생각이 많은 놈으로 만들었고’(「포를 떠버린 시간」), 온갖 일들은 “원래 일어날 일들이었”거나(「커피를 쏟다」) “어차피 비틀댈 것은 이미 비틀대기로 한 것임을...좆도 아니게 된 것은 이미 좆도 아닌 것”(「생태 보고서 1」)이라 어거지로 정당화해본다. 사회적 타자로부터 암묵적으로 강요된 이러한 정당화에 따르자면 “신념이 필요 없는 이유는 충분하다.”(「태평성대」) 그러나 여기에는 얼마간의 조소가 동반되는데, 그것은 시의 화자가 이 같은 정당화에 완벽하게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없는 것인가? “서 있는 자리가 바뀌지 않는 이상”은(「경계선의 나무들」) 그렇다. 그때, 2.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운명론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달리기만 남았습니다./한 사람이 불현듯 자유롭습니다.”(「달리기」) 그는 초월한 것처럼 보이고, 세상을 완전히 수긍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기만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 가장 어려운 선택, 3. ‘기억과 함께 살기’가 남는다. “날개 없이 살기. 날개의 기억으로 살기./우울증의 나날을 견디기 위해 비를 맞는다. 수행하기 싫은 수행자들처럼 비를 맞는다. 도를 닦지도 구태여 반항하지도 않는 속된 아름다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고된 아름다움.”(「등뼈로만 살기」) 이 ‘살기’에는 살기(殺氣)가 배어 있고, 그럴지라도, 이 벌어진 절개면 앞에서의 삶은 삶 자체를 완전히 배신해버리지는 않는다. 한때 ‘죽음과죽음의철학으로또하루를살’던(「나는 또 하루를」, 불온한 검은 피) 그는, 자기 내재적 신념과 타자가 강요하는 합리화 사이에서 동요하며, ‘나쁜 소년’이 된다.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4-5연)
‘나쁜 소년의 법’은 삶도, 자기도 배반해버리지 않고, 그 모든 기억들과 함께 동요하며 버티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그 일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타인에게나 스스로에게) 지지하고 사사로운 ‘범인’처럼 보이는 일을 감수해야 하리라는 예고다.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어려운 일이야말로 ‘자기의 자기 구성’의 결과이며, 기억의 지층, 절개면 앞에서 그가 택하는 마지막 윤리다. 그의 ‘휴면기’에 관한 자기 재서술은 이렇게 일단락된다. ‘범인’ 주제에 ‘법’이라니! 불길한 얼굴로, 위장한 채 시내에 돈을 벌러 다니는 이 ‘나쁜 소년’이 만들어갈 ‘법’의 내용을, 독자는 그 고통에 참예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자 한다. 아무래도 남 같지가 않은 탓이다.
(<세계의 문학> 2009,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