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에는 두 편의 「키스」가 있다. 그리고 「키스」와 「키스」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다. 앞장과 뒷장 사이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키스는 잠시 쉬었다 계속된다. 우리는 ‘나’와 ‘너’가 어떻게 키스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키스 이전에 얼마나 많은 말이 필요했는지도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키스는 혀로 할 수 있는 말 아닌 말의 첫 번째 형태다. 물론 그것은 말보다 수고스럽다. 그러나 그 수고는 기꺼운 수고다. 키스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와 ‘그러고도 우리는 말할 수 있어요’라는 쌍방의 암묵적 합의가 이끌어낸 가장 가까운 상대와의 텔레파시의 시작이다. 그것은 착각과 오해로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위험천만하다. 말 아닌 말로 알게 될 밀접한 생의 내력은 당신의 혀에 지울 수 없는 화인을 남길지도 모르므로. 그것이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일 때, 시인은 키스의 환희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혀들의 의도에 관해 말한다.
첫 번째 키스는 ‘네’가 시작했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키스」 부분, 16쪽.)
키스는 한 세계를 닫고 다른 한 세계를 연다. 그리고 이 문 안에서 두 사람은 본격적인 탐색을 시작한다. 이 개방과 폐쇄는 마치 ‘바깥에서의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작은 문 안의 넓은 세상’에서, 두 사람만이 열 수 있는 폐쇄된 세계에서 두 사람은 ‘인간 일반’을 만나는 행위에 몰두하게 된다. ‘나’는 ‘나의 후손’이 아니라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강조는 필자)하고,
너의 문 안에서 나는 모든 사랑이 체험하는 종말의 예언을 저작한다 너는 내 혀에서 음악과 시의 법칙을 섭취하려 든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 (같은 곳)
그러니까, 이 키스는 이러저러한 특성을 가진 한 개인으로서의 ‘나’와, 마찬가지로 이러저러한 특성을 가진 한 개인인 ‘너’의 접촉이 아니라 ‘인간 일반’으로서의 한 주체와 다른 주체가 2인칭의 타인에 관해 할 수 있는 궁극적인 탐구의 개시이다. ‘모든 사랑이 체험하는 종말의 예언’, “음악과 시의 법칙”,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강조는 필자)-‘나’는, 지금, 혀라는 탐침으로, 인류의 대표로서, 인류의 나머지인 타인 일반의 대표인 ‘너’와, ‘궁극의 인간 보편’이라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그러한 탐색의 절정에서 “궁극은 극단의 임사 체험으로 연결된다”. 이 열띤 무언의 탐색 끝에 다다른 “관 뚜껑을 닫는 맛”(같은 곳)은 하나의 삶의 완성이면서 바타이유가 오르가즘에 붙인 다른 이름인 “작은 죽음”에의 도달이다. 그런데, 이 인류학적 탐색의 탐침에 남아 있는 저 지울 수 없는 흔적은 무엇인가? ‘내’가 “살짝 혀를 빼는 순간, 내 혓바닥에” ‘크로키로 그려져 있는’ 이 ‘불우한 가족사’는?
두 번째 키스-“네 눈 속에 담겨 있는 짐승”
잠시의 침묵에 이어 키스는 이어진다. 두 번째 키스는 ‘내’가 시작했다. “나는 문을 닫고 너의 몸을 받는다”. 이 키스는 첫 번째 키스가 남긴 ‘불우한 가족사’로 인해 ‘너’의 특수성이 환기된 후의 키스다. ‘너’의 “사뭇 여장부스러운 근골과 큰 키”, “뒷굽이 십 센티미터에 달하는 하이힐”과 같은 구체적인 특성에 대한 묘사, 그리고 ‘너의 무용에 어울리는 몸’과 ‘나의 건축에 어울리는 몸’은, 여전히 ‘무용’이나 ‘건축’과 같은 보편적 분류의 개념을 빌려서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차이와 개별성을 고지한다. 첫 번째 키스가 ‘나’의 인류학적 탐침 위에 남긴 흔적, “어느 불우한 가족사”는 두 번째 키스를 통해 하나의 결절을 맞이한다.
내 혀는 너의 동선을 따라하며 네 가족들의 불편한 심기를 박물화한다 이 키스는 한 아이가 태어나고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초현실적 리포트다 내 혀를 뒤집으면서 너는 네 인생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탕진한다 나의 문은 너에 의해 닫히고 나의 문밖에서 모든 시간은 풀어진 물감처럼 시계 밖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내 속에서 죽었던 것들이 관 뚜껑을 열 듯 내 몸을 열고 문 열린 너의 바깥으로 날아간다 두 겹으로 붙어 네 겹의 문으로 열리는 이 방생의 순간, 네 눈 속에 담겨 있는 짐승은 고대 중국 용봉문화 관련 서적에서 문득 흘려 보았던 오래 전 내 얼굴이다 (「키스」, 18-9쪽)
그러니까, ‘네’가 시작한 첫 번째 키스가 남긴 “어느 불우한 가족사”의 ‘불우함’은 ‘내’가 시작하는 두 번째 키스를 통해 ‘박물화된다’. 그건 아마도 ‘나’의 ‘법칙’, ‘전형성’, ‘원형’을 탐색하려는 욕망의 과정 속에서 의도치 않게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의도하지 않은 ‘절대에 대한 욕망’은 ‘너’의 특수성과 만나 ‘나’까지 변용시킨다. 그렇지 않고서야 첫 번째 키스에서는 “관 뚜껑을 닫는 맛”으로 귀결되었던 ‘너’와의 접촉이, “내 속에서 죽었던 것들이 관 뚜껑을 열 듯 내 몸을 열고 문 열린 너의 바깥으로 날아가”는, “두 겹으로 붙어 네 겹의 문으로 열리는” “방생의 순간”(「키스」, 18쪽)이라는 정반대의 효과를 낳을 리 없다. ‘절대’에 대한 탐색의 논리적 결과로서가 아니라, 탐색의 욕망에 의한 우연한 ‘특수’의 발견들을 통해 ‘나’는 “네 눈 속에 담겨 있는 짐승”, “오래 전 내 얼굴”을 발견한다. 사르트르가 ‘타인과의 유일한 합일의 순간’이라 불렀던 이 절정에서 ‘나’는 또 다른 자아(the alter ego)를 발견하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별별 짓을 다해가며 꿈꾸는 저, 타인과의 이상적인 합일을 획득하는가?
‘나’의 의장(儀狀)이 ‘나’일 때
아니, ‘내’가 발견하는 것은 ‘네가 나’라는 사실이 아니라 “네 눈 속에 담겨 있는 짐승”―“오래 전 내 얼굴”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나’는 ‘나’를 “네 눈 속”에서 발견했지만, 그때 ‘네 눈’은 ‘너’의 눈이라는 사실보다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기능을 통해 ‘나’에게 의미를 가진다. 이때 ‘나’는 구제불능의 나르시시스트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 사랑이 나르시시스트의 사랑인 것이 아니라, 사랑 일반이 나르시시즘적인 속성을 내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눈에 들어온 “네 눈 속”에 비친 ‘내’가 짐승이라 할지라도, 이 짐승이 “춤추는 龍”(「키스」, 19쪽)으로 생각될 만큼. 그렇지 않고서야 키스하는 자가 “기뻐하라”(같은 곳) 같은 말을 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이 나르시시즘을 온전히 벗을 수 있다면, 거기에는 ‘내’가 없을 것이므로. 그리하여, 시인의 지독하게 살아있는 자의식은, 사랑이 시작될 때마다 모든 두 번째 입맞춤이 구현하는 반복적인 나르시시즘의 특성과 그 묵시적 함의를 지나칠 수 없다. (‘나르시시즘’을 ‘주관’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시인은 ‘주관’을 ‘나르시시즘’으로 파악할 만큼 도덕적 결벽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너’보다는 “네 눈 속”의 ‘나’를 사랑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의 이상적인 상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소? 어찌해도 당신은 내게 속아 넘어갈 뿐, 대체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마시오 (「자멸의 사랑」 부분, 27쪽.)
그렇다면, ‘너’와 혀를 섞고 있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 왜 키스는 두 번 반복되어야 하는가? ‘속이지 않는 사랑’이란,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
啓示는 종종 어조가 다른 두 번 이상의 동어반복으로 사람 마음에서 엇갈린다 나는 나의 거짓말을 따라하며 진심을 뱉는다 웃고 살자며 바지춤 붙들며 울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사실, 당신이 나를 따라 웃을 때 나는 너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중략)··· 이십 년 이력의 거짓 웃음, 울음이 바꾸어놓은 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세상의 모든 배후는 맨얼굴의 창녀처럼 슬프게 역력하다 나는 그 모든 미완결의 위선들이 갓 만난 연인들의 키스처럼 달콤하다는 걸 안다 ···(중략)··· 당신이라는 거울 안쪽에서 나라는 허구가 부화한다 나는 또 그를 연기할 것이지만 그가 도대체 누굴 연기할지는 이 세계가 감춘 유일한 비밀이다 (「사실, 사랑은···」 부분, 28쪽)
「사실, 사랑은···」은 두 편의 「키스」에 대한 충실한 자기 주해처럼 보인다. 시인은 마치 ‘자기’는 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아의 필연성―‘진짜 나’를 포기하지 못하는 정초주의자처럼 말한다. 그는 거듭 도착적(倒錯的)으로 ‘나도 알아. 하지만···’이라고 중얼거리는 듯하다―“나는 나의 거짓말을 따라하며 진심을 뱉는다”. ‘내’가 보는 ‘나 자신’은 ‘당신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확인 가능하므로, ‘진짜 나’를 확인할 도리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모든 “계시는 종종 어조가 다른 두 번 이상의 동어반복으로 사람 마음에서 엇갈린다”. 동어반복은 차이를 생산한다. 그것은 이야기하기에 따라서는 점점 더 ‘거짓’이 되어가는 차이의 계열화 과정이기도 하고 보다 더 새로울 갱신의 가능성을 펼쳐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 시집에 같은 제목의 시가 네 세트나 있다는 것은 우연일까? 「키스」와 「키스」, 「불탄 방-너의 사진」과 「불탄 방-네가 없는 사진」, 「텔레비전」과 「텔레비전」은 모두 인접하고 있으며 처음과 다음 사이의 변화를 보여준다. 한번 발화된 한 뭉치의 언어는 다음 순간 처음을 배반하거나 확장한다. 원본의 가능성을 잊지 않고 있을 때, 모든 스냅샷은 거짓과 연기를 가리킬 것이다. “사실, 당신이 나를 따라 웃을 때”, ‘내’가 죽이고 싶었던 ‘너’는 ‘당신’이 아니라 연기 중인 ‘나’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이 ‘연기 바깥의 내’가 과연 있는지 없는지 보증할 자가 없다는 것, 그것이 세계의 비극이다. “이십 년 이력의 거짓 웃음, 울음이 바꾸어놓은 내 얼굴”은 이제 오롯이 ‘내’ 얼굴일 텐데, 그는 ‘허구 아닌 나’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다른 ‘나’의 가능성을 상상한다는 것은, 마치 ‘내’가 웃음과 울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생각한다는 말이다. ‘내’가 다른 ‘나’를 연기할 수 있었을 거라고, 아니, 그보다는 연기 아닌 생짜의 행위가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바깥을 희구하는 일에 가깝지 않겠는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토해내면 나는 인간의 정념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까 ···(중략)··· 이제야 알겠다 살을 부빈 시간이 많을수록 네가 내가 되고 나는 그 어디에도 안 보이는 바람이 되어버리던 까닭을 (「낯선 짐승의 시간」 부분, 57쪽.)
나는 나의 오래된 가짜다 (「티브이 시저caesar」 마지막 부분, 93쪽.)
순전하고 유일한 ‘나’의 실현은 방도가 없다. “인간의 정념 바깥”의 ‘나’, 그것은 ‘너’로 대체된 ‘나’와 평행적으로 존재하는 “그 어디에도 안 보이는 바람”, 즉 ‘부재로서의 나’이다. 그는 ‘이 나’와 ‘저 나’로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이 나’와 ‘아무것도 아닌 나’로 분열된다. 그것을 굳이 분열로 인식하는 것은, 어쨌거나 ‘이 나’가 ‘가짜’라고 끊임없이 ‘발화하는 나’가 있기 때문이다. 이 평행우주-대체현실 속에 ‘부재로 있는 나’는, 말하자면 “사후의 바람”처럼 사방에 존재한다. 이 시집의 수미상관을 결정짓는 두 편의 「사후의 바람」 사이에 그 모든 ‘거짓’과 ‘연기’의 처절한 진실이 있다. 그러나 파스칼의 관습의 논리가 보여주듯이, 그 모든 반복되는 연기와 거짓말이 ‘나’를 구성한다면? ‘나’의 의장(儀狀)이 ‘나 자신’이라면?
그는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것도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전 한 편의 시가 끝나고 바람이 부”는(「사후의 바람」, 11쪽) 자리에서 시작된 그의 ‘되뇌임’(「시인의 말」)은 ‘펄럭이는 파도 끝 자락에 불붙는 마지막 시’(「사후의 바람」, 120쪽)로 끝난다. “불타는 시간들이 그대로 숲이 되”는 모순으로 시작하여 ‘기필코 사람이 지느러미와 날개를 갖는’ 역전, 그것은 우리의 동어반복이 직선적인 진화의 목적론적 신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보여준다. ‘나’의 의장은 ‘나 자신’이지만, “우연히 모든 것이 완벽해지길 꿈꾸”는(「시인의 말」에 앞서 인용된 장뤼크 고다르의 말) 자에게 ‘나’는 언제나 ‘아직 아닌’, ‘되어져가는’ 반죽처럼 도정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금’의 ‘나’는 가장 진실한 연기에 몰입해 있는 대체 불가능한 거짓이리라. 아무려나, 이제 ‘‘참’이 무엇인가’는 적절한 질문도 아니다. 동일한 반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에 매달려 있는 자는 ‘생성 중인 윤리’를 숙고할 테다. 그것은 피로한 일이지만, 이 피로의 필요 바깥을 사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필요의 웅덩이에 고여 썩어가는 바바리안이 되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