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룡, "고시원은 괜찮아요"(창비, 2008)
차창룡의 신작 시집 "고시원은 괜찮아요"는 풍자와 해탈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라는 앞선 시인의 통찰은, 지금의 말로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정치적이거나 냉소적이거나’쯤 되지 않을까. ‘시’와 ‘풍자’라는 말이 일깨우는 예리한 힘은 뚜렷한 몇 가지의 선택지만을 우리에게 제시했던 가시적 폭압의 시절에 아주 잘 어울렸지만, ‘생정치적으로다가’ 우리 삶의 안과 밖을 한 땀 한 땀 오바로크하고 있는 지금-여기에서도 잘만 사용하면 훨씬 더 잘 어울릴 성싶다. 균열이란 균열은 죄다 시침질하고 마는 민활한 문화적 자본주의 세계의 은밀하고 화려한 색색의 실밥들이, 실은 누군가의 피와 땀이며 우리가 봉사세 명목으로 우리도 모르게 자진납세하고 있는 한숨임을 폭로하는 데 풍자만한 것도 없을 테다. ‘이미 거기에 있는’ ‘시스템의 봉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안과 밖’이 헛갈리는 현실이다. 일상을 풍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도 우리는 이제 그것을 완전한 부정의 대상으로 간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미 ‘나’의 일부이니까.
그래서일까. 풍자와 해탈, 정치와 냉소의 갈림길에서 선택의 자리는 안개에 휩싸인다. 하지만, 일상성을 그리는 시인의 ‘시선의 온기’를 미덕으로 받아들일 때, ‘일상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읽고 있는 ‘안팎을 깁는 바늘이 만들어내는 무늬’를 우리는 적극적으로 읽어낼 수도 있겠다. 우리가 일상성에 근저를 둔 시라고 칭할 때 시의 일상성이 우리를 일깨우는 것은, 너무 밀접해서 알아보기 힘든 무늬의 주요 동기가 드러나는 현장을 다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일 터이다. 차창룡의 시는 아마도, ‘돈과 똥과 몸과 신이 동등하게 거주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현장’이라는 주요 동기를 변주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듯하다.
가령, 이번 시집에서 가장 풍자적이라고 할 만한 「고시원은 괜찮아요」와 「찜질방」, 「실내 고행림」은 모두 동시대의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 따라 새롭게 탄생한 공간들에 관한 것이다. 개인에게 가장 작은 단위로 분할된 거주공간으로서의 고시원, 휴식과 오락과 위생을 한군데서 해결하도록 고안된 찜질방, 외양과 건강에 대한 강박을 해결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상업화된 헬스클럽 등은 ’90년대 이후에나 지금의 용도로 급격히 발달한 것으로, 그 같은 장소의 발명은 자본주의적 ‘편의성’(잠잘 곳만 있으면 된다-나머지 시간은 노동(준비)한다, 한 군데서 씻고 쉬고 논다-그리하여 나머지 시간에 노동(준비)한다, 건강과 몸매를 한꺼번에 가꾼다-그리하여 더 잘 노동(준비)한다)을 구현한다. 물론 이 편의성은 시스템의 지속을 위한 편의성이다. 이 ‘팔리는 공간’들의 종교적 비유는 자본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이처럼 장소와 시간을 시스템의 편의에 맞게 소비한다는 가장 일상적인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단면을 각 시의 화자들은 냉철하게 비판한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체념과 씁쓸한 조소를 보여 주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는다. ‘이미 자기도 모르게’ 순응해 있는/순응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시원과 찜질방과 헬스클럽의 소비자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닌데, 아마도 그의 시집에 체제에 대한 전통적 비판의 녹슨 칼이 숨겨져 있다면 그가 이 소비자들의 계급성을 문제 삼고 싶어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고시원의 다국적 선승들의 대부분은 먹고 살 돈을 벌러 와서 불만보다 더욱 위험한 침묵과 인내를 수행하며 공동변소의 똥냄새를 공유하지만, 찜질방의 서민들은 ‘집이기도 하고 무덤이기도 한’ 그곳에서 “병든 가족과 지친 연인을 품에 안는다”. 선원 같은 고시원이나 자연사 박물관 같은 찜질방의 묘사에 서린 시인의 ‘시선의 온기’는 이 장소들을 채우고 있는 ‘생활=고행인 주체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실내 고행림’에 들어선 화자의 어조는 보다 신랄하며, 「예술의 전당 꽝」에서 그 신랄함은 절정에 달한다. ‘예술의 전당’은 순전히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상징으로서만 드러나며, 그 건립 내력과 정치적 용도와 자본주의적인 공간 지형으로 인해 줄곧 세차게 부정된다.
이 장소들에 대한 풍자와 연민의 제로섬 법칙에서 화자와 대상의 심리적 거리는 대상에 대한 동일시 정도에 따라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한다. 물론 공감 자체가 심리적 거리에 따라 밀도가 정해지는 것이라면 ‘인지상정(人之常情)’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우리들은 그의 ‘숨겨진 계급의식’에 그다지 크게 거리낄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시집이 전체적으로 그려내는 일상적인 붓터치에 의한 계급성의 풍자적 함의가 신화나 종교적 해탈과 만날 때, 이 교차점들이 어딘가 성급하게 봉합한 균열의 자리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풍자와 해탈을, 정치와 냉소를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주체의 체제 내적 삶을 얼마나 파괴적으로 몰고 갈 것인지 우리가 얼마쯤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칼리 간다키/뱀」이나 「그것이 아픔인 줄 모르고」 같은 시편들은 앞서 언급한 풍자적 시들을 가능하게 하는 삶과 생활에 대한 시인 자신의 인식과 바람을 보다 날것으로 보여준다. “바퀴가 되어 구르고 싶다/몸의 최소한을 땅에 디디고 굴러가는 바퀴 되어/가장 어려운 요가의 자세로 빠르게/낮은 곳으로 굴러가고 싶다”는 그의 고백은 “오랫동안 우리는 강을 흉내내왔다”는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가장 어려운 자세로 가장 빠르게 낮은 곳으로 굴러가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빡빡 구르는’ 생활을 자발적인 고행으로 재서술함으로써 수동적인 위치를 초월하고자 한다. 이 자발적인 고행이 무르익으면 “도토리의 대가리를 뚫고/나무 한 마리 솟아오르”는 명확히 자연스러우면서 그럴 수 없이 기적적인 ‘숨은 인연’의 현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시들은 분명 풍자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시편들 가운데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시들은 덜 풍자적일지는 몰라도 훨씬 단단한 감동을 주는데, 그것은, 해탈과 완전히 구분되지 않은 풍자가, 실은 화자에게 진지한 책임감의 짐을 조금 덜어 주는 효과적인 장치라는 것을, 풍자하는 이도, 그것을 읽는 이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풍자에 직면하여 맘껏 웃고 정화되기에는,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아직 씁쓸한 뒷맛이 좀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리너구리, <세계의 문학>, 2008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