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사를 아우르며 테러의 의미와 맥락을 추적하다 <성스러운 테러>는 서구 문명사에 스며있는 테러의 계보학에 대한 고찰을 담은 책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시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신화와 프로이트, 니체와 서구의 다양한 문학작품들을 통해 서구 문명사에서의 테러를 고찰하면서 9ㆍ11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테러가 단지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님을 명시하면서, 인문학적으
서평) 테리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서정은 옮김, 생각의 나무, 2007)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가 자국에서 출간된 지 2년 만에 번역되었다. 9.11 이후 서구 사상가들은 테러의 충격과 그 후속적인 영향을 설명할 적절한 용어와 개념에 대해 골몰해왔으며, 이를 위해 그간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져온 것인가를 다시 성찰하고, 그 결과 전지구적인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와 그 바깥으로 세계를 번역하는데 확신을 가지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폭력과 악의 문제에 골몰하게 된 것 같다. 좌파 문예이론가로 알려진 이글턴에게 있어 ‘전지구적인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와 그 바깥으로 세계를 보는 관점은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하트·네그리 같은 자율주의자들이 면밀한 분석을 통해 그려내는 ‘제국과 그 바깥’이라는 세계상과도 닮아 있다. 같은 시기에 번역된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강연 모음집 『세계의 밀착』에서는 ‘수정궁’과 그 바깥이라는 비유로 세계상을 그리고 있는데, 그가 동시대 사상가들을 거의 참조하지 않고 이 비유를 주조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와 그 바깥에 대한 사유는 이제 거의 보편적으로 통용되기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동시대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이글턴도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가 항상적인 위험을 생산하면서 그것을 먹고 사는 거대한 욕망기계라는 점에 동의하며, 이를 인정하고 나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9.11의 잔상을 설명하기 위해 테러를 ‘형이상학적인 맥락’에 위치시키려 시도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새로운 논의를 발견한다기보다는 테러를 특징짓는 동시에 이에 맞서는 이성의 광기도 특징짓는 폭력의 몇 가지 양태들을 다양한 문학적 맥락 속에서 확인하면서 향유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이글턴은 여러 장으로 자신의 글을 구분해놓았지만, 그는 논의를 확장시키면서 전진하기보다는, 이미 보편적 용어로서 다소간 설명되어온 후기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위험 징후들을 테러의 고유한 의미로부터 발전시켜 풍부하고 깊게 성찰하면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변주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확실히 이 책의 장점은 개념과 이론을 문학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갈등의 현장들이 어떻게 현실의 참조점이 되어 사유와 이론을 풍부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필연적 자유의 존립 근거가 신으로부터 예술로 이동했다는 이글턴 자신의 서술을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고대 비극에서 근대 문학까지 광범위한 문학적 사례들을 제시한다.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갈등을 통해 정치공동체를 위협하는 주신제의 테러적 측면과 이에 대응하는 권력의 정치 테러가 어떻게 서로의 닮은꼴이며, 아나키적인 열정과 아나키적인 기원의 폭로에 대한 국가의 필사적인 은폐가 동일근원적인 것인지 유려한 문장으로 서술하는가 하면, 근대 문학 전체를 관통해 나타나는 대립쌍들이 어떻게 ‘은행 강도와 은행 설립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가’를 열거하고, 리처드슨의 소설 『클라리사』를 통해 현대의 안티고네라 할 순교자의 유형, 즉 ‘좀더 풍요로운 존재를 위해 비존재를 선택하는 무구한 범법자로서의 희생양’이 교환법칙에 의거한 목적의식으로 자신을 폭파하고 마는 자살테러범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준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이즈음 대두되고 있는 도덕/윤리(이 두 개념은 종종 뒤바뀌어 반대 개념으로 쓰인다)라는 인문학적 화두가 대개 ‘칸트와 홀로코스트’를 주변으로 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글턴은 (종종 칸트를 인용하기도 하지만) ‘숭고와 미의 조화’라는 주제를 ‘테러’와 관련시키며, 확정적인 해결책으로서는 아니지만 생각해볼 만한 갈등 해결의 방향으로서 ‘남성적 숭고는 여성적 미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버크의 아이디어를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각주에서 근간 칸트에게 조명이 편향적으로 쏟아지고 있다는 식으로 언급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이글턴에게 있어 칸트에 대한 버크의 비교우위에는 ‘단두대가 있는 집의 꿈의 여인과의 하룻밤’이라는, 법과 욕망 사이의 도덕적 행위에 관한 칸트의 저 유명한 사례에 대한 다소간의 오해가 연루되어 있는 듯하다. 사실 전칭 명제로 제시되는 순전한 형식의 정언명령은 그것이 순전히 형식적이라는 이유에서 선과 악(만일 그런 것이 있기라도 하다면)의 차이를 지워버린다는 것이 이즈음의 해석인 것 같다. 이 ‘순전한 형식’이라는 아이디어의 매력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숭고한 모든 행위들에서 느끼는 일종의 광폭한 희열과 관련되어 특별히 도덕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충격적 광경에 대해 이를 적용하고 싶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일 터이다. 이 책에서 디오니소스의 주신제에 의해 은유되는 완전한 무질서, 무(無)에 대한 욕망은 ‘절대 자유’의 행사의 조짐으로서 공표되며, 테러와 같은 숭고의 순간에 표면화되고, 이것이 칸트적인 도덕의 완성과 동의어인 것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이글턴 자신도 서술했듯이 이 ‘순수함에 대한 치명적 욕망’은 ‘자유의 실행에는 최소한의 자아가 요청된다’는 사실 때문에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 그리고 칸트가 신 대신 자유를 소급적으로 요청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주체라는 근원적인 오점을 인정해야만 이 비루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동시에 ‘도덕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비판적 도덕 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글턴의 물 흐르듯 유려한 서술은 칸트에 관한 오해 말고도 몇몇 허술한 개념 정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우연을 인정함으로써 도덕적으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자유의 실행을 위해 최소한의 주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때, 나는 그가 다소 고루하게 보일지라도 가치 중심적 서술을 옹호하는 용기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뭐, 이런 촌스럽고 당연한 이야기를 다...”라고 일갈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우리가 너무나 많은 ‘다양성’의 담론에 떠밀려 원칙을 취향에 양보하고 마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이유가 무엇인지, 왜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은 원리주의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나쁜지’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술 형식에 있어서 그는 다소 세속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비유들을 탁월하게 활용하는데, 테러를 테러로 맞받아치는 이런 광폭한 시대에 이론서를 읽다가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그의 활달한 필치는 이론적인 폭과 깊이만큼이나 동시대인들과의 공통감각과 중용을 유지하는 일-선정성이나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더 손쉬울 수도 있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환기시켜주기도 한다.
오리너구리 (연세대학교 BK 21 한국 언어,문학,문화 국제인력양성 사업단 소식지, 20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