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신작 시집의 시들은 소리의 감각에 골몰한 농밀한 결과물들을 다수 품고 있다. 의미 중심의 산문 지향의 시들이 후반부에 여러 편 실려 있기도 하지만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말 자체의 리듬을 잘 살린 정통적 시형의 시들이다. 그런 시들은 바람을 품고 있는 홀씨처럼 행위의 계기들을 품고 있다. 그것은 어떤 가능성의 실체를 품고 있다고 서술되기보다는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인 가벼움의 동작성을 품고 있다고 서술되어야 마땅하리라. 해설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 점은 표제작인 「와락」의 제목이자 시의 운을 이끌어가고 있는 ‘-락’의 소리의 감각이 이 행위의 실체보다는 동작의 동작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통상 움직임은 시간의 진행에 따른 동작 주체의 공간의 이동을 의미한다. 주체 중심적으로 파악했을 때 운동이란, ‘여기’에서 ‘저기’로의 이동이지만 시/공간 중심적으로 파악했을 때 운동은 ‘지금/여기에 있었음’으로부터 ‘이제/여기에 없음’, (혹은 더 미분적으로) ‘이미/여기에 존재하지 않기 시작함’-‘이제 막/저기에 존재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어떤 초능력자들은 과거의 사람이나 사물의 남아있는 기운을 반투명 상태의 사상(事象)으로 실제로 본다고도 하는데, 이때 남아 있는 에너지들의 시각적 궤적을, 증감하는 농담(濃淡)과 함께 표시할 수 있다면-그때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비행운(飛行雲)으로 가득 차리라- 그 시적 변환 상태를 그녀의 시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정끝별에게 있어 삶이란 항상적인 운동이며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한 세계의 재편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변화로 이해된다. 이는, ‘나’를 ‘동작성’으로 대치한 결과라 해도 된다. 그것은 인식하는 주체가 아니라 지금 막 움직이고 있는 기운으로서의 주체이므로, 정끝별의 어떤 시들은 기동하는 한 덩어리의 공기 같은 ‘나’의 결을 드러낸다. 이 같은 ‘동작성’의 강조는 시인의 반(反)나르시시즘적 세계관을 증명하거니와, 그녀의 시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시의 (디오니소스적이라기보다는 아폴론적인) 조화로운 음악성은 그러한 동작성의 강조와 떨어뜨려 생각하기 힘들다 할 것이다.
반 평도 채 못되는 네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
불후의 입술
천번을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
헐거워지는 너의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자락
-「와락」 전문
이 시는 특히 입술소리 초성 ‘ㅂ, ㅍ’과 모음 뒤에 오는 혓소리 ‘ㄹ’의 조합으로부터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푸른 불꽃’, ‘불후의 입술’, ‘벼락’ 등은 이 같은 초성의 부드러운 조합과 ‘ㄴ’, ‘ㅊ’, ‘ㅂ’, ‘ㄹ’, ‘ㄱ’ 등, 소리를 가두는 종성과 합쳐져 그 이미지의 감각성을 배가시킨다. 마지막 시구인 “바야흐로 바람 한 자락”은 이 미묘한 소리의 결합을 집약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소리의 감각과 그 의미의 적절한 결합이라는 전통적인 시의 본의를 성취한다. 이미지의 감각에 알맞은 소리의 적정한 폐쇄와 개방의 배치에 성공한 시구의 모범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이처럼 간결하고 순간순간의 강렬한 이미지들을 포착하여 정통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또 한 편의 시가 「처서」이다. 이 시는 앞서 「와락」이 바람결로서의 주체를 음운들의 조합과 함께 완성했던 것처럼, 사랑을 나누는 매미를 클로즈업하다가 “팔월도 저문 그믐”, “멀리 북북서진의 천둥소리” 같은 초성 ‘ㅁ’과 종성 ‘ㄹ’, ‘ㅁ’의 효과적인 결합을 통해 공감각적 광경으로 주의를 돌리며 쨍쨍한 사랑을 숭고한 풍경과 합일시키는 데 성공하는 동시에 음악과 의미의 결합을 꾀한다.
주체가 단단하고 고정된 물질성으로 정의되기보다는 바람결과 흔적, 동작성 자체를 지시하게 될 때, 그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해가는 유령성을 획득한다. 이는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세계를 함께 직조해나가고 있는, 그리하여 분할하기 어려운 환영으로서의 주체들을 그녀가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제 환영이나 환상, 그리하여 분열과 같은 키워드들에 낯설지 않은 독자들이 이것을 그녀만의 영역이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보다도, 이에 대한 각각의 태도에 관하여 우리는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정끝별의 유령적 주체는 방금 살펴보았듯 1. 「와락」에서처럼 공기적 특질이 가진 낙관성에 연루되어 있거나, 2. 상징적 현실을 직조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 바쳐지는 환상을 드러내는 데에도 사용되며(「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와 빨간 구두 아가씨」), 3. 간혹 이처럼 환상을 통해 유지되는 현실 속에서 점점 투명해지는 주체의 소외의 메타포로 사용되기도 한다(「희미해지는 병에 걸린 남자」). 그러나 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을 때에 1, 2, 3은 서로 다소 대립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태도나 입장의 변경은 유리한 대신, 일관되게 통합된 시점 내에서 각각의 시들의 의미를 읽기는 힘들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가령,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와 빨간 구두 아가씨」에서 화자는 어머니-어머니의 환상인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아버지-아버지의 환상인 ‘빨간 구두 아가씨’라는, 실제로는 두 쌍일지도 모르는 한 쌍의 부부가 어떻게 ‘서로를 사는지’ 보여준다. 대중가요의 제목을 통해 대리된 대표적 환상에 지배되는 주체들을 제시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오해야말로 관계의 기반이며, 그러한 환상을 통해 관계가 지속된다는 진실(우리가 통상 행복이라고 부르는 상태)을 확인시켜주는 것인데, 이때 환상은 구조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기능적 작인이다.
반면, 「희미해지는 병에 걸린 남자」를 보자. ‘남자’는 ‘어느날 희박해지기 시작한’ 후, 직장, 애인, 아내, 아이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자신을 확인한다. “제 목소리를 내본 적 없던 남자/한 번도 제 안을 들여다본 적 없던 남자”는 철저히 주어진 역할의 가면을 그 자신의 얼굴로 삼았던 탓에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와 빨간 구두 아가씨」에서 환상의 전면적 구조화가 통상적인 의미의 행복을 구성하고 있었다면, 이 ‘남자’의 성실한 환상에의 복무가 불러온 비극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편의 시에서 보여주는 ‘환영’은 현실을 구성하는 환상의 기능과, 상징적 복무를 통한 결과로서의 환영화로 구분되어 분석될 수도 있을 테지만 그 경계를 정하려 하다 보면 기능과 효과를 어디까지 구분할 수 있을지, 그러한 시도는 폐쇄적인 회로 내에서 순환하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는, 실제 환상의 작동방식이 그러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노란 샤쓰...」에서 환영의 기능이 세계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점점 희미해지는...」에서는 세계를 수용하거나 거부할 주체의 사라지는 형상이 전면화되므로, 환상으로 직조되는 상징적 세계에 대한 두 편의 시의 각 화자의 태도는 일치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독자가 시인에게 시적인 장치와 이를 통해 꿈처럼 직조되어가는 한 편의 시가 보여주는 세계를 모든 개별 시편에서 동일한 관점이나 입장으로 통합시켜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꿈을 가두는 행위가 될지도 모르므로. 다만, 2, 3의 환상을 운용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전공’하다시피 골몰하고 있는 여러 젊은 시인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첫 시집부터 지속되고 있는, 말을 세심히 다듬어 정공법으로 티 없이 빚어내었던 정끝별의 정통적 시형이 보여주는 감동이야말로 이번 시집에서 빛나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낯설어지는 자
이처럼 정끝별의 [와락]이 전반적으로 세계를 수용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포용과 수락에 근거한 온건한 시적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면, 허혜정의 [적들을 위한 서정시]는 세계의 표본으로서의 타인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전선(戰線)을 분명히 하려 시도하고 있다. 몇몇 허혜정 시의 화자는 대개 여성성을 전면화하여 대립항인 남성(적 세계)를 질타하거나, 분노한 약자의 최후통첩과도 같은 전투적인 태도를 취한다. 현실에 관한 직접적인 비판이 희미해져 온 바를 생각하면 이런 전투적인 태도는 다소 투박하거나 거칠어 보이기도 할 것이다. 이를 ‘폭로자의 시’라고 불러보자.
시가 숨기면서 드러내는 것이라 했을 때 어떤 것을 숨기고 어떤 것을 드러내느냐 하는 것은 각 시인들의 시의 세세한 차이를 구성하게 된다. 누군가는 은폐를 주요 전략으로 삼으며 또 다른 사람은 폭로를 자기의 태도로 확정한다. 허혜정의 시는 분명 뭔가 폭로하려는 의지로 가득하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적대적 대립항의 존재를 전제한다.
우선 그것은 억압되거나 오해된 여성성의 폭발로 이해된다. 이 점을 전면화하면서 어느 정도 완성도를 성취하고 있는 시가 서시인 「미인도를 닮은 시」와 「스란치마」다. 「미인도를 닮은 시」에서 화자는 상징적 세계에서 교환법칙에 따라 관계가 성립되는 기생인 화자 ‘나’와 “복건을 쓴 유학자”, “각대를 띤 벼슬아치”, “내로라 하는 호걸”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이들과 다른 규칙으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있음을 표명한다. 그들은 “한 푼 얹어주었기에/내 살림이 목화솜마냥 확 피어올랐다고 믿지만”, ‘나’는 “왕후장상을 부러워하는 법이 없”고, “당신들의 필법을 배우려 한 적이 없다”. 따라서 “나는 누구의 계집이었던 적이 없다”. ‘그들’과 ‘나’의 이해관계는 ‘이해’라는 기표의 전혀 다른 기의를 통해 단지 교차될 뿐이다. 「스란치마」에서도 여성으로서의 자기 주장이 전면에 표출되고 있다. “당신들의 시대에 내겐 어떤 역할이 필요했을까”, ‘그들’의 시대에 그녀에게 주어진 배역이란 고작 “아첨을 늘어놓는 여인들의 드라마”, “역사의 벼루에 핏물을 붓던 어둠의 후궁들”, “그러나 나는 궁궐문을 함부로 따고 나온/방탕한 무수리였음을” 혹은 “낡은 족보끈에 거꾸로 매달려/벼락을 맞았던 볏짚인형이었”거나, “수절해온 과부였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하는 화자는, 결국 “내간체의 서신처럼/나의 말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선언을 통해, ‘그들’의 세계 내에서 이미 의미화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자리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발견되지 않은 말’은 발견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나’와 등치된다. “나는 누구의 계집이었던 적이 없다”는 「미인도를 닮은 시」의 결구와 “나의 말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스란치마」의 결구는 결국 동일한 의미를 다른 형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과 ‘말’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며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이 시집의 ‘적대적인’ 시들의 주요 메시지이다. “별난 것을 보고 싶어하는 시대지만”, ‘그들’의 말은 “변두리의 동물원”처럼 “우리를 놀래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흑투성이 악어”, “졸고 있는 곰” 따위가 진열되어 있을 뿐 “우릴 압도하는 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변두리의 동물원」). 그것은 테두리, 제도, 체계 등 무엇이든 가두고 야성을 억압해야만 성립되는 질서, 그러나 본연의 야수성은 상실해버리고 그것들을 상징화하여 디스플레이하는 데에 만족해야만 하는 구태의연한 허울만의 질서이다. 그리하여 “공포의 깊이만큼 웅덩이를 파고/녀석들의 힘만큼 철책은 높이 올라갔구나/놈들의 광기만큼 철자의 감옥은 튼튼했구나”라는 마지막 깨달음은 체념을 동반하고 있다. 장르, 양식, 나아가 말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느껴지는 화자의 심정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해된 ‘나’의 진실을 폭로하는 것, ‘나’의 진실을 끝까지 주장할 권리가 ‘내’게 있음을 공표하는 것이다. 「적들을 위한 서정시」는 ‘그들’의 세계/‘그들’의 말에 대한 경멸과 분노를 통해 ‘나’의 세계/‘나’의 말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려 한다.
다시 의문은 시작되었다
숙맥들은 눈치채지 못할 신호를 돌리다
슬며시 자리를 터는 그들은 어디로 몰려가는 걸까
뒤늦게 홀로 구두를 찾아 신고 내려오는 시간
확실히 내가 모르는 암호가 있는 것이다
...(중략)...
오늘 다시 틀렸다고 생각한 말들을 지운다
부패한 방언으로 가득한 대화에서
떨어져나온 외로운 미치광이가 되어
차갑고 단단한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단어는 뭘까
꼭두각시 하나 불태울 수 없는 말이라면
시 같은 건 손대지도 않았다
-「적들을 위한 서정시」
화자가 처음부터 그들과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또한 이 ‘의문’은 ‘다시 의문’이었으므로, 반복된 것이다. “슬며시 자리를 터는 그들”의 “부패한 방언으로 가득한 대화”로부터 ‘나’는 “떨어져나온 외로운 미치광이가 되어” 말의 실제적인 효용을 꿈꾼다(“꼭두각시 하나 불태울 수 없는 말이라면/시 같은 건 손대지도 않았다”).
이처럼 여성으로서의, 시인으로서의 ‘나’의, ‘그들’에 대한 적대감은 시집 후반부로 가면서 틀 지워진 도시와 세계(「상자 속으로 가다」), 모든 경계지어진 것에까지 확장된다(「네 행을 쏴라」). “말하는 게 비슷해지고, 달리는 게 비슷해지고, 무서운 세기를 흘러가는 심장들의 똑딱임,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세계”, 그러므로 ‘내’가 “날마다 들락이는 입구, 출구, 그리고 방”(「상자 속으로 가다」)이어서 나도 속해 있기는 하지만 결코 행복하게 화합할 수는 없는 ‘이’ 세계는 “관성의 세계 무력증의 도시”로 명명되며, ‘나의 말’은 ‘총’이 되어 이 세계에 영합한 “존재 속에 들어앉은 명령자”, “횡설수설하는 정치가”, “공기 속의 저자”, “거만한 편집자들”을 겨눈다. 총을 든 자는 정치적이다, “목소리와 방어와 국가 없이도”. 그리하여 ‘나’는, “낯선 자가 아니라/낯설어지는 자다”. “아무도 나를 친자확인할 수 없다, 네가 호명하던/이 자는 죽었다”. 그리고 “누구의 계집이었던 적이 없다”로 시작된 이 시집은 “나는/날뛰는 사유와 웃음과 입술의/동굴 속에서 일어선다”(「네 행을 쏴라」)로 끝난다.
기생, 무수리, 수절과부의 목소리를 내고 “뒤늦게 홀로 구두를 찾아 신고 내려”온(「적들을 위한 서정시」) 그녀, ‘그들이 호명하던 그녀는 죽고 날뛰는 사유와 웃음과 입술의 동굴 속에서’ 다시 살아난, 그리하여 이전의 그녀가 아닌 ‘낯설어지는 그녀’가 결국 총을 들고 일어섰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삶이라는 말보다 더 삶을 말하”려는(「시인의 말」) 그녀를 독자인 우리는 포옹할 것인가, 그녀에게 응사할 것인가. 화법에 관해 토론할 것인가, 입을 다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