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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유명한 영희에게서 투명한 앨리스에게로

앨리스네 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황성희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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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완벽하다. 당위성이 빠지면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해진다. 혹은 공유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당위를 수긍하고 난 뒤의 세계는 나름대로 완벽하다. 그런데 완벽이란 게 대체 뭐지? 그건 그냥 그대로 있음, 자연(自然) 아닌가? 유대인들의 신 ‘야훼’의 본래 뜻처럼, ‘스스로 그러한’ 것, 무수한 ‘-임’, Be 동사의 모든 주어들. ‘더 높은 곳’이 없는 이곳에서, 신성은 하향 평준화되고 만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어찌됐든 완벽하다.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는 실용주의의 명제가 세계화되는 자리, 과거의 모든 사건이 정당화되는 자리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던 80년대 소설가의 말은 완료된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게 된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성립된다고 한다. ‘지금 여기’가 최선이다. 아무리 맛없는 식사라도 당신의 삶을 하루 더 연장시켜줄 것이다. 그러니 “건드리지 마!/여기는 완벽해.”(「전설의 고향」) “행복은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므로(「날마다 편히 잠드는 영희의 기술」), ‘그냥 있는’ 것들에 만족하고 ‘그냥 있으면’ 된다. 불만인가? 그대가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는, 뭐랄까, 대단하지가 않다. “손에쥐고통째로먹고싶어요엄마./한세계를완전히가지고싶어요엄마.”(「작고한 金들의 세계」)라고 그대는 투정하고, “이대로 아무 제목 없이 죽으면 어쩌나”(「훙커우 공원의 고양이들」), “익숙해익숙해미치겠어”(「거울에게」)라고 중얼거리다가, “나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이젠 정말 참을 수 있어.”(「난 스타를 원해」)라고 자위(自慰)도 해본다. 나름대로 완벽한 세계에서 대단치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영희는 영희가 아니니까. 영희는 90년에 불 타 죽은 영희고, 80년에 죽은 영희고, 61년에, 45년에, 50년, 19년에도 죽은 영희다. 영희는 “교과서에 실리는”(「나와 영희와 옛날이야기의 작가」) 그 유명한 영희다. 유명한 영희야말로 대단한 영희니까. 영희를 유명하고 대단한 영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되어 있는 세계 X의 ‘X임’에 복무했음을 증명하는 교과서다. 그냥 복무하면 안 되고 극적으로 죽어야 한다. ‘나’는 “19년에. 법상동 사거리에서 만세 운동을 흉내 내다 다리를 삐었”다(「나와 영희와 옛날이야기의 작가」). 하지만 극적으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영희가 될 뻔하다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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