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기는 삶이 일종의 ‘덤’이나 짐이라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에서 배설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이 생산의 지점과 동일한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그 징후일 것이다. 「채송화」에서 “무너진 집안의 막내인 나는/가난한 어머니가/소파수술비만 구했어도/이 세상에 없는 아이/.../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엄마는 아무 때나/울타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오줌을 누었다/죽은 동생들이/노란 오줌과 함께/쏟아져나왔다”라고 쓸 때 태어나지 않을 뻔 한 시적 화자의 느낌은 ‘죽은 동생들’과의 동일시 직전까지 가고, 「꽃 진 자리」에서는 “사과에겐/꽃 진 자리가 똥구멍이다/꽃 진 자리에 유난히/주름이 많은 것은/전생(全生)이 한꺼번에 쏟아질까봐/항문에 힘주기 때문이다//사과밭 노인 병상,/어머니 관장하신다”고 쓸 때, 사과의 탐스러움은 해체 직전의 안간힘으로 이행한다. 또 「소금 한 포대」에서 간수가 흘러내리는 소금 포대와 “누런 오줌 가라이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치매 걸린 노모”를 병치할 때에도, “산의 똥구멍 같은,/아는 사람만 슬쩍/숲의 괄약근/두 손으로 벌리며/빠져나오는 등산로”(「막잔」)라고 쓸 때에도, 항문과 요도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인생이다. 왜 그는 ‘삶=똥’이라는 그물에 사로잡히게 된 것일까?
첫 시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적은 「탐구 생활_변기」에서다. “눈물 그렁그렁 매단 채//슬픔 한 조각 건네주려//네 입 속에 혀 들이미는 나보다//앞뒤 배설 말없이 받아주는//네가 더 인간적이다”에서 드러나는 외설성은 삶 자체의 외설성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자주 시의 소재가 되는 가족사에서 드러나듯 잦은 죽음의 경험 탓인지도 모른다. ‘형’, ‘아버지’, ‘태어나지 않은 동생들’, ‘태어나지 못할 뻔 한 나’, 병환 중의 ‘노모’는 어느 순간 삶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 이탈했거나 이탈할 예정이다. 첫 시집에서 그의 소년기에 대한 회상은 기지촌을 둘러싼 부패와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죽음을 명상하지 않는 시인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들에 등장하는 죽음은 관념적으로 선취된 도래할 현실이 아니라 아직 시취가 가시지 않은, 이미 도래한 주검들이다.
물론 그의 시들은 여러 곳에서 이 죽음의 서정을 삶에 대한 위안으로 승화시키려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일은 종종 만족할 만큼 성공적이지 못하다. 잠언이란 무릇 위안의 거짓말을 참말로 믿어야만 효과적인 것, 잘 익은 사과에서 해체 직전의 똥덩이를 보는 시인에게는 사랑도 거짓말이다.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는 시집의 표제와 그것이 시구로 포함되어 있는 시 「사랑」은 실상 시인에게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언제나 환상의 영역에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듣고 싶은 음악은/다시 듣고 싶은/당신의 거짓말”이라는 시구에서 보듯, 이 환상은 음악처럼 덧없는 시간 속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연주와 감상의/차이 같은 것”으로, 이 환상은 삶을 직조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상하는 자의 것이다. ‘욕망의 대상-거짓말-환상’은 언제나 ‘당위적 현실-날 것-비루한 실체’와는 결코 섞일 수 없다. 그는 얼마간의 환상이 현실을 직조한다는 견해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한편으로 그가 필요로 하는, “청춘의 부재를 설명해줄/그럴듯한 알리바이”(「라면을 끓이며」)는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청춘이 사랑이나 정의, 평화 같은 이상(理想)이 강렬한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힌 시간이라면, 그런 의미에서의 청춘을 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가 생을 배설물과 동일시하기 시작한 (아마 너무 일렀을) 어느 시점에, 그는 청춘을 몰수당하고 만 셈이다.
이때 그의 ‘삶=똥’이라는 의식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삶의 비루한 이면’ 같은 여유 있는 부분 긍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첫 시집에 보이는 그의 유년은 지나간 어린 시절을 기억할 때조차 가정된 낙원적 기원에 대한 향수(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죽음이 도처에서 범람”(「도두리」)했던 외설적인 실재와의 조우로 점철되고 있다. 어쩌면 그의 시가 다소 상상력을 결여하고 있거나 도식적인 상상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환상의 내용이 비루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무의식의 강력한 전략의 하나라면, 그가 너무 일찍 경험한 외설적인 실재와의 조우는 환상의 직조에 필요한 최소한의 거리를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떨어지기 직전의 똥덩어리처럼 더럽지만 ‘나’의 냄새를 진하게 머금은 삶에 대한 이중적인 마음(연민과 해소감)이 효과적으로 표현될 때 다음과 같은 수작이 나온다.
풍 맞아 쓰러진/늙은 나무를 옮긴다/잔바람 치르는지/메마른 가지/바르르 떨고 있다/비뚤어진 입속엔/뱉어내지 못한 말 가득하고,/녹내장 걸린 옹이눈/마지막 생의 두려움으로/촉촉하다 나무는/관심에 둘러싸인/적지(敵地)가 불편한지/모로 누웠다/아무 말 못하니,/남몰래 내다버리기엔/이곳이 적지(適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