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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문학 주체를 구원하기 위하여—작품이 되고자 한 비평의 욕망

서평) 해럴드 블룸, 영향에 대한 불안(양석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마크 에드먼드슨이 1995년에 출간한 철학에 반대하는 문학, 플라톤에서 데리다까지(Literature against Philosophy, Plato to Derrida)(시에 대한 심미적 향유가 줄어들고 사회적인 담론에 시가 시달릴 때마다 여러 번 출현했던) ‘시에 대한 옹호(A Defence of Poetry)’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은1960년대 이후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는 갖가지 사회 이론과 신역사주의에 잠식당하기에 이른 미국 문학 비평계의 현황을 이른바 문학주의자의 시각에서 비판하면서 실낱 같은 희망의 한 가닥으로 마지막 장에 해럴드 블룸의 견해를 배치하였다. 그의 책에 인용된 블룸의 1987년 인터뷰의 한 부분은 블룸의 장대한 비평 인생에서 영향에 대한 불안이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인 위치를 짐작하게 해준다; “저는 만일 제가 더 산다면- 35권의 책을 더 쓸 수 있고, 또 십중팔구 쓸 테지만, 죽는 날까지 그리고 죽어서까지도 이 한 권의 책, 영향에 대한 불안의 저자로 간주되리라는 사실을 감수해야 할 겁니다.”

 

미국 비평계에 있어서 60년대는 신비평이 저물어가고 데리다의 영향 아래 출발한 예일 학파가 대두하면서 해체비평이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된 시기다. 현대미국비평해체비평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빈센트 라이치는 두 권의 책에서 모두 이 일군의 해체비평가 집단에 해럴드 블룸을 함께 포함시키고 있지만, 영향에 대한 불안의 서문에서 블룸이 원망학파(School of Resentment, ‘원한학파라고도 한다. 블룸이 서구의 정전에서 문학을 정치, 경제, 사회 등 문학 외적인 문맥으로 환원하려는 비평 경향을 통칭하기 위해 사용한 말)의 대표자들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데리다 혹은 프랑스 조이스’”라고 농담한 것을 보면 (지나치게 사회적인 것에 집중한 나머지 실제 작품들을 향유하는 데 충분한 심미안을 형성하지 못한) 유럽 이론가들에 대해 블룸이 지니고 있던 불편한 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20세기 문학 이론의 많은 부분을 유럽 이론에 빚지고 있다 하더라도 망명한 유대계 유럽 이론가들의 저작이 미국을 경유해서 수입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작 미국 비평 이론의 원전들이 더디게 번역되고 있는 것은 좀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학자로 인정받기 위해 원전은 원어로 읽고 이해하고 쓸 줄 알아야 하고, 학자가 된 뒤에는 원전을 원어로 읽고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므로 학계 바깥에 소개하고 전달할 충분한 여유가 모자란다는 학계 전반의 아이러니하고 불편한 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테고, 학교 바깥에서 여전히 이론적인 것에 갈급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문학 이론보다는 정치 이론을 선호한다는 추정과도 관련이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 블룸의 시각을 따르자면, 정작 지금 우리가 아는 문학 개념이 거개가 낭만주의로부터 나왔으되, 실제로는 정신으로부터 낭만주의가 이미 추방되었다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블룸의 영향에 대한 불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 정치, 사회적인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로지 계몽주의 시대 이후 미국 시인들의 전통, 시인들의 가계보 안에 흐르고 있고 현대 세계에서 더욱 난감하게 증폭될 수밖에 없었던 어떻게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독창적인 시인이 될 것인가에 관한 개인주의적 낭만주의의 문제, 정말로 현대 세계에서 아직도 천재가 가능한가라는, 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질문의 새로운 판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어떻게 (블룸이 이피브라고 부르는) 후대의 젊은 시인이 문학의 전통 내에서 최초에 자신을 사로잡은 강한 선배 시인과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마침내 또 다른 하나의 강한 시인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는가에 대한 시론이다. 그의 유대교 신비주의에 대한 경사와 프로이트, 니체 등 바로 이전 시대의 가장 강력한 다른 분야의 (유용한 메타포들의 창안자를 시인이라 칭하는 로티의 용법에 따라 광의의) ‘시인들에 힘입어 그는 이 시론의 여섯 개의 장을 비유적인 이름들클리나맨, 테세라, 케노시스, 악마화, 아스케시스, 아포프라데스로 짓고, 후대의 젊은 시인이 어떻게 강한 선대 시인들을 오독하고, 대조하고, 반복적으로 불연속을 창출해내고, 악마화하고, 유아론에 몰입하며, 마침내 선배 시인으로부터의 이탈과 선배 시인의 완성이라는 동시적인 욕망의 내적 갈등에서 역설적인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가를 서술한다. 서론인 "우선권에 대한 명상, 그리고 개요"에서 그는 영향의 이 같은 낭만주의와의 관련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이 책 전체에 함축된 고뇌는 낭만주의가 그 모든 영광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예시적 비극이었을 것이라는 점, 즉 프로메테우스의 기획이 아니라, 스핑크스가 자신의 뮤즈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눈먼 오이디푸스의 자기실패적 기획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70)

 

짐작하다시피 이 과정은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이론에 빚지고 있는데, 블룸의 낭만주의적인 자아주체에 대한 고집은 자신이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빚지고 있음을 다소간 인정하면서도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기인했다고 추정함으로써 마치 프로이트라는 후대의 강한 시인이 셰익스피어라는 선대의 강한 시인을 오독하고 자기 것으로 전유하는 데 성공하여 역방향의 분석을 유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1장에서 지젝이, 햄릿이 외디푸스보다 논리적으로 앞서 있다고 쓸 때 블룸의 젊은 시인의 수정률은 지젝의 문학 작품에 대한 정신분석적 비평과도 잠시 교차한다.) 다소 난삽하고 독서량을 과시하는(그는 대단한 기억력을 자랑하고 오로지 자신의 기억력에 의지하여 인용하므로 주석 달기를 싫어하였다. 외국문학 1996년 여름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그는 위스키를 마시면 실락원 전체를 거꾸로 암송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 대한 기본적인 인상은 (블룸을 본 따 장난을 좀 치자면) ‘블룸 혹은 미국 블랑쇼의 외디푸스적 시 쓰기의 수정적 삶에 관한 신비로운 낭만주의적 오독으로, ‘시가 되고자 하는 비평의 욕망이 절절하게 체현된 것이다. 실제로 영향에 대한 불안실제 비평의 새로운 본을 만들려는블룸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만족시켰다기보다는 곳곳에 그 자신이 다루고 있는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감과 선대 시인들에 대한 질투, 그리고 자기 안에 깃든 선대 시인들에 대한 인정투쟁 등을 전유한 것처럼 보이는 장치들을 배치하였다. 우선, 그의 서문에서 다루고 있는 (그리고 본문에서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은) 정전으로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경탄과 셰익스피어 작품들이 위치해 있는 영향의 자장들셰익스피어의 동시대인이었으며 약간 앞선 선배였던 크리스토퍼 말로에 의한 영향에 대한 불안과 셰익스피어가 끼친 후대 작가와 이론가들에 대한 영향의 불안에 관한 이야기는, 본문에서는 신비주의적 내용과 깐깐한 신비평적 어조를 섞어 때때로 불명확하게 서술한 내용을 실제 작품 비평에 응용한 것으로, 독자에게 던져진 유혹하는 미끼 역할을 한다. 본문의 첫머리와 마지막은 거의 시로 쓰인 자기 이론의 작품화이며, 정중앙(3장과 4장 사이)에 배치되어 선언투로 쓰인 중간 장, "대조비평을 위한 성명"은 그랑빌의 우화집 한가운데 실린 "사고(社告)"처럼 세심하게 계산된 문학적 장치다. 이 책은 이처럼 이즈음 보기 힘든 문학적 열망으로 가득 찬 신비주의적 비평서, 다소 지식화된 낭만주의적 영감의 과도함을 형식적 완전으로 처리하려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주지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낭만주의적인 시인들이 자기의 양가적 체질에 대해 종종 그렇듯이, 그는 니체의 대조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의 책 자체가 그 증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 안에 이항 대립을 점점 더 키우고 그 화농에서 결실을 보는 어떤 시인들이 그렇듯이, 이 문제를 형식적 균형에 대한 집착을 통해 풀려고 했던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렇듯, 이전 세기까지만 해도 별로 이상할 게 없어 보였을 그의 정전 중심의, 문학 전통에 대한 끝없는 경외감과 시적 영감으로부터 기인한 작품이 되려는 비평의 욕망, 점점 전문화되고 분업화되고 있었던 학문 영역들의 비인간화 경향’—사회 이론과 문학 이론의 접목이 점점 증가하는 현실속에서 어쩐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사회적 현실과는 관련 없이 도서관 문학 분야 진열대 앞에 살고 있는 고집스럽고 나르시시즘적인 독학자의 이미지를 전해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앞서 언급한 에드먼드슨의 책 마지막 장은 블룸의 영향이 끼친 영향의 세 단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선적으로 사람들은 이 책을 난해하다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비평가들은 이 책이 굉장히 명쾌하며 자신들은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다음 궁극적으로 마지막 국면에 해당하는 블룸의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영향의 불안에 나타나는 탁월한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아마도 일종의 환상, 즉 블룸의 영향에 대한 불안이 폭로하고자 했던 것,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전임자의 위대한 원천, 여러분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자 했던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옮긴이가 렌트리키아를 빌려 옳게 지적하고 있듯이, “’시적이 아닌 영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282)가 블룸에 관한 현재의 가장 화급하고 궁극적인 질문이 될 것이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문학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나는 아직 여전히 이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문학주의자의 편에 더 가까이 서고 싶은 생각이 든다. ‘문학적인 것을 옆으로 제쳐놓고 작품을 단지텍스트나 문화사적 편린으로 환원하기 일쑤인 원한학파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의미가 있고 또 필요한 것이다. 서문에서 신랄하게 쓰고 있듯이 원한학파 비평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국가권력이 전부이고 개인 주체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 주체성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것이라도 말이다.”(17)라는 언명은 문학적 향유의 고유한 개별적 공간에서 개개의 고독한 체험에 맡겨져 있는 개인 주체성의 지위를 내팽개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조언하고 있다. 원한학파 비평가들이 문학을 정치, 경제, 사회 등 문학 외적인 문맥으로 환원하려는 것처럼 블룸이 문학을 오로지 문학 내적인 유산 상속의 유형과 그 절차로 환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의 영향에 배어있는 분노와 공격성은 원한학파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오르고 있는데, 이는 1960년대 이후 미국 대학 제도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블룸보다 에드먼드슨 같은 블룸의 후예들에게는 이 악조건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이 비판이 노골적이게 된 1990년대에 로저 킴볼은 오로지 이론적이 되고자 했던 강단 좌파가 문학을 망쳤다고 생각하여 강단 급진주의자들Tenured Radicals를 썼고, 몇 년 후에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캐리 넬슨이 강단 급진주의자 선언Manifesto of a Tenured Radical을 쓴다. 이 두 권의 책은 문화학과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 미국 대학 제도 내에서 문학부가 맞이한 위기와 문학과 정치의 균형이 과연 가능한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다. 미국 영문학과가 다른 학과들을 식민지화하고 있다는 에드먼드슨의 신랄한 목소리는 국문과가 국학 연구로 점철되고 있는 작금의 우리 대학 제도 내의 연구 방법론에 관한 고민과 더불어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블룸의 진단에 의하면 미국 대학의 문학분과는 플라톤주의의 끝없는 역사에서 대단히 주변적인 삽화로서 푸코와 마르크스의 괴상한 혼합물로 가득 차버렸다. 얼핏 들으면 이 말은 도리 없는 수꼴의 말처럼 들릴 테고, 이즈음의 학문 지형도 상에서 분명히 이런 발언은 표면적으로 받아들였을 때에는 오른쪽에 찍힐 것이다. 하지만 리처드 로티는 "위대한 문학 작품의 고무적인 가치"라는 대단히 문학주의적인제목의 글에서 블룸의 이 말을 미국 대학의 문학부가 지적 자율성이 상상력을 지배하도록 만들려는 끝없는 시도에 의해 잠식되었다는 의미로 재서술하고, 앞서 언급한 에드먼드슨을 빌려 다음과 같이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에드먼드슨이 지금 영어권 문학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많은 것들은 영감을 받은 시인보다 인식하는 철학자들의 우월성을 획득하게 된 최근의 시도 가운데 일부라고 묘사했을 때, 그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철학자들이 결코 이런 시도에서 성공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문학비평가들이 철학을 블룸처럼 여기지 않는 한, 문학이 철학에 저항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로티는 이 말을 쓰면서 논리실증주의에 의해 쫓겨난 형이상학과 윤리학과 역사철학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블룸이 프랑스 하이데거주의자들franco-Heideggerians’이라고 조롱 섞인 말로 부르고 있는 유럽 이론가들에 의해 점령당한 미국 문학 비평계에서, 고집스럽게 문학의 향유 주체로서 자리를 고수하며 외로운 1인 시위를 돌아가며 벌이고 있는 수줍고 내성적이고 시적 영감에 의해 전율하는 영혼의 상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원한 문학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셈이고, 시스템 냉방이 밤낮 없이 빵빵한 법대나 상대와 달리 초라한 미래를 감내해야 한다는 듯 모기떼가 난무하는 낡은 문과대학 건물의 연구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문학을 사랑하는 자가 자기의 첫사랑이었던 작품의 지대한 가치를 위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전투력을 사력을 다해 쥐어짜면서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사실 나로서는 원한학파를 끊임없이 들먹이면서 원한에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블룸보다는, 그가 즐겨 인용하고 있으나 온전히 마음을 주지는 않는 에머슨의 자립을 옹호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사랑할 만한 작품들로 가득 찼던 유년의 행복했던 독서 시절의 기억이 없었다면, 아버지 시인이 없었다면, 독자는 어떻게 아들 시인, 더 나아가 아버지의 아버지 시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여러분에게도 악마화의 시간을 견딜 정신의 근육 단련 시간이 주기적으로 필요할 것이라 당분간 믿도록 한다. 시적 영감을 쉽사리 지식화하지 않고 자기 영혼으로 하여금 전율하도록 내버려두시는 문학의 독자 제위 여러분은 부디 견디시기를. 영향 아래 놓인 우리 모두는 시인의 가계보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


(문지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