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당신 한 사람만 탈 수 있는 잠수정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이것을 타고 어디까지 내려가고 싶을까? 실제로 돌고래 모양으로 생긴 레포츠 용도의 일인용 잠수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잠수가 목적이 아니라 수면 바로 아래에서 달리거나 수면 위로 뛰어오르거나 뛰어올라 한 바퀴 돌기 위한 것이다. 잠수란 무릇 수면 아래로 깊이 깊이 침잠하는 일. 레포츠용 돌고래 잠수정이 유희를 위한 것이라면, 이현승의 일인용 잠수정은 명상과 사색으로 당신을 유도하여 당신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도록 한다. 그러나 이 명상과 사색은 위안을 주어 당장의 양심을 편안하게 하거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혹한 진실을 꿰뚫어 관조하기(contemplate) 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은 끊임없이 ‘세계 안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익숙하고도 괴상망측한 자기의 현실 속에서 물으면서 독자를 부지불식간에 이 성찰에 참여시키는 철학적 성격을 담고 있다.
당신은 수면 위와는 달리 조용한 물밑으로 내려가면서 처음에는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얇은 막에 싸여 물에 잠겨 지내던 기억할 수 없는 옛날을 갑자기 떠올린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제 막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투과하는 햇빛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수온이 점차 내려가고, 망측한 모양의 생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관광 상품이 되려면, 일인용이어서는 곤란하다고. 그러니까 우선 당신은 당신에게 쏟아지는 세계의 중압감을 맞서는 데 있어 타인이 대신 제공해주는 관점 같은 것은 안경집에 고이 넣어둔 채, 자기 자신으로서 생각한다는 일의 힘겨움과 의미를 알게 된다. 대부분이 침묵인 깊은 어둠 속에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당신은 두려움에 떨게 되리라. 어제인지 오늘인지 헷갈리고, 차라리 어서 한계 수심에 닿기를 바라고, 다시 떠오를 수 있을지 근심하고, 당신과 닮은 타인의 존재를 화급하게 요구하고, 급기야 당신 자신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물을 것이다. 그것은 궁금증과 두려움이 혼재된 형태의 질문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당신은 다행히도 잠수정을 타고 있다. 이 최소한의 공간, 당신과 당신을 질식시킬 거대한 물 사이의 완충지대를 제공하는 잠수정은 당신의 생명을 담보하는 최종의 보장물이다. 당신 자신의 연장(extension)이며, 당신의 일부인 잠수정. 이것을 당신의 마음과 당신을 질식시키는 외부 세계 사이의 완충지대인 당신의 피부라고 불러보자.
어떤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조종사들이 자기의 연장이자 일부로서 로봇을 ‘입듯이’, 그리고 이 조종사들의 연장된 신체가 된 로봇들이 또 한 번 방어막을 ‘입듯이’, 우리는 중력과 수압, 망측한 괴물 같은 타인과 급격한 감정의 온도 격차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 위로 저 추상적인 ‘사회’가 제공해준 언어를 삼켰다가 ‘나’의 말로 뽑아 낸 제2의 피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각질처럼 연약한 부위를 보호하고, 더러 굳은살처럼 어지간한 충격에는 긁히거나 찢어지지 않도록 우리 감정과 생각의 장기들--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희미한 뭉치--을 보호해준다. ‘나’의 외피 안에서 ‘나’가 온전히 혼자 견디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리하여 잠수정은 공상이나 상상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 자신, 각자 계발한 외피를 입고 있는 현실의 ‘자기’들의 비유이되, 유머와 지혜의 단단한 외피를 입고 깊은 수심을 혼자서 견뎌내는 이현승의 화자들 자신의 이미지와 매우 닮아 있다. 이현승의 사색적인 화자들은 강고한 지성적 외피를 입고 있다. 이 화자들이 깊은 수심 속에서도 일희일비하지 않는 까닭은 탄성이 뛰어난 굳은살 탓이다. 이 지성의 굳은살 안에서 그는 즐겨 명상하며, 기꺼이 그럴 수 없는 순간에도 사색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가 종종 울음이나 웃음의 감정적 표현을 시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상황의 심부에서 깨달음을 건져 올리는 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는 이미 자기 안에 맹수와 비명을 함께 지니고 있었으되, 이 적대적인 ‘둘’의 연방으로서의 자아가 온갖 양가적인 일상적 사태들--친애하는 망측한 사물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교호(交互)하게 되었는지의 내력을 전작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에서 보여준 바 있다.
“유머를 갖기까지”
그가 첫 시집에서 가장 골몰하고 있었던 문제는 (도덕의식의 우물인) ‘나’의 양가감정과 ‘당신’, 그리고 이웃이라는 3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상’이라는 이름의 윤리적 사태들을 시의 논리로 제대로 기술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세계인식은 대체로 적실하고도 분명하다. 그는 “서로의 몸속을 보여줄 만큼/거리는 이제 아주 사적인 공간이므로/투명인간들이 활보하는 거리에서” 녹아내려 소매를 적시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길 위에서 사라질 아이”를 시집의 전면에 내세운 바 있다(「우는 아이」). 도시에서의 근대적인 삶 속에서 거리는 건물 이외의 거의 모든 공간인 통로(path)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거리(감)(distance)이기도 해서, 속속들이 구획되고 등록되어 투명하지만 친밀성의 땀내를 잃어버린 곳이다. 어떻게 이토록 사적이고 또한 그럴 수 없이 공적인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위에서 아이스크림이 녹아 소매를 적시는 줄도 모르고 울고 있는 아이는 자기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나는 이것을 줄곧 ‘아이 스크림I scream’의 무의식적 조작으로 읽는다)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다. 어떻게 달콤한 것이 녹아내리는가. 어떻게 분명 있었던 것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가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태들의 한가운데를 함께 살아져/사라져가고 있는가.
이 현대문명 속에서의 정신/정서 생활의 다른 축은 문명의 은폐된 기원이며 동시에 그 부산물이기도 한 야수성이다. 시인은 예절을 익힌 늑대가 수저를 들고 허겁지겁 쫓기듯이 포식하고 있는 식탁 풍경을 즐겨 묘사하고(「늑대가 나타났다」, 「식탁의 영혼」, 「기침 사나이」, 「동물성」, 「찰리의 저녁식사」 등등), 소리 지르는 소년과 늑대가 한 몸이라는 추문을 폭로하여 이 양가성이야말로 도덕 감정의 수원지라는 것을 암시하며(「동물의 왕국」, 「세렝게티의 물소리」, 「아이스크림과 늑대」 등의 시편들과 특히 「캐츠 아이」가 보여주는 문명 비판과 시적 감성의 완벽한 충일감), 어떻게 사회가 이 길 위에서 사라져가는 애처로운 맹수를 훈육하는지 시선을 집중한다. 그 비유적인 양상은 열대어나 화분, 강아지들이나 서로를 길들이는 연인처럼 예의바른 관계 맺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쨌든 이러한 훈육은 야만의 징표인 굶주림과 식욕을 조절하고 인간적인 선(善)을 이룰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아마 첫 시집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몇 명의 ‘달인들’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슈퍼맨 리턴즈」의 ‘은하슈퍼 장씨’나 「주름의 왕」의 ‘태양세탁소 주인’은 자기 생활에 성실을 다함으로써 제 분야에서 달인이 된 사람들로, 화려한 명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숙달된 자신만의 전문성을 발휘하며 일상을 자신만만하게 꾸려나가는 이웃이다. 화자는 이들을 ‘슈퍼맨’이나 ‘왕’에 빗대어 표현하며 짐짓 ‘자기 생활을 완벽하게 긍정한 이웃’을 예찬하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조롱인지 경외심인지 알쏭달쏭한 뉘앙스가 배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저 투명한 거리를 점점 더 속속들이 구획하고 야수성을 낱낱이 길들이는 체제의 바람이야말로 달인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탓일 것이다. 문명은 문명화의 수단까지 더욱 더 문명화하기를 갈망하고, 그리하여 그 수단은 채찍을 통한 강요가 아니라 ‘설탕’이나 ‘아이스크림’처럼 단것을 통한 일시적 위안을 회유의 수단으로 채택하며,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완벽하게 책임지게 하는 도덕적 방식을 선택지로 내놓는다. 당신은 더 예절바르거나 덜 예절바르게 될 뿐, 굶주림과 식욕에 충실한 무도덕적(amoral) 삶을 포함한 다른 가능성들을 박탈당한다. 따라서 그의 첫 시집이 「모든 것에 대해 긍정하는 마음을 당신은 설탕에게서 배울 것인가」라는 문제적인 시를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 같은 조용하고 예의바른 훈육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않기 위하여 유머감각을 취하기로 한 바 있다.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의 사랑」에서 “이것은 웃음에 관한 이야기다”로 시작하여 “이것은 공포에 관한 이야기다”를 지나 “이것은 억압에 관한 이야기다”로 끝냈던 그의 심리학적 통찰은 자신이 재서술해내는 삶의 서사가 어떻게 웃음이라는 표면에서 시작하여 그 방어대상인 공포에 이르고, 또 이 공포의 진원지로서의 억압에 가닿게 되는지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웃음이 공포, 억압과 갖는 관계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우연적 조건으로서의 세계와 그 자신이 대응 양식으로 선택한 ‘유머’ 사이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찰리 채플린의 서글픈 희극 영화 <황금광 시대>의 저 유명한 구두 수프 장면을 통해 동물적인 식욕과 인간적인 예절이 결합해 있는 식탁 풍경을 독특하게 해석한 「찰리의 저녁 식사」는 “당신이 아직 유머를 갖지 못했다면, 감히 권한다/단련될 것을. 푸르뎅뎅한 독이 살 속으로 파고들 때까지/이건 유머를 갖기까지의 이야기다”라는 결구로 끝난다.
“사과나무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은 그 자신에게 띄우는 결의의 전언이기도 했다. 농담은 미적이고도 지적이다. 담론을 지배하는 규율의 핵심을 단박에 전시한다는 점에서 미학의 장기를, 그러나 대상인 사물이나 사태로부터 거리를 확보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성찰적이고 풍자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는 유머를 완성하는 일에 골몰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띄운 친애하는 사물들의 곳곳에서 (채플린의 영화가 그렇듯이) 비극적인 희극성이 발견된다면, 그가 이 미적이고도 지적인 작업을 삶이라는 환멸의 연속에 지속적으로 틈입시키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가 이 무섭고 우습고 슬픈 진지한 농담들을 담아내고 있는 그릇에 관해 살펴볼 때, 그가 3~6연 25행 안팎의 전통적인 서정시형을 매우 선호한다는 사실에 당신은 놀랄 수도 있다. 그는 매우 고전적인 취향을 지닌 듯 보이며, 형식과 내용이 불가분의 관계라면 그의 통찰과 감성이 빚어낸 내용이 종종 이미지의 비유를 거쳐 단정한 형식으로 응축되어 나오는 모양은 흡사 고전적인 조상(彫像)의 제작과정처럼 비율을 중시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으리라. 그 다분히 꼭 죄는 옷에 드러난 대담한 사고의 몸은 군더더기를 제하려 한다. 가령, 다음의 섬찟한 농담을 보자.
사과나무가 사과를 떨어뜨렸다. 이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잠자리에서 벽지 들뜨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숨을 죽이고
사과나무를 이해하기 위하여 바람이 불어오는 골짜기를 쳐다봐야 한다.
어쩌면 구름을 바라보는 당신의 습관도 조금은 바뀌어야 할지 모른다.
중력이 없다면
바보들의 행동을 더욱 쉽게 이해하게 될 거야.
최소한 야구경기 같은 것은 볼 수 없게 되겠지.
사과나무는 자신이 떨어뜨린 사과에 대해서 생각 중이다.
자신의 아파트 난간으로 아이들을 떨어뜨렸던 여자가 있었다.
골짜기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들이 바람에 날려왔다.
-「근원적 골짜기」 전문
이 시의 은유는 ‘떨어뜨리다’라는 술어에 의해 구성된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떨어뜨렸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만, 사과나무가 사과를 의지적으로 떨어뜨렸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졌다’는 범상한 장면에서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겼다’는 다른 시각을 발견한 근대 과학의 출현을 기억한다면, 같은 사태에 대한 다른 형식의 문장 구조는 다른 사유 내용을 가진다는 점을 당신도 수긍하리라. 사과나무를 마치 행위가 극도로 제한된 동물처럼 취급하는 시인은, 무위(無爲)를 향한 무궁동(無窮動)이야말로 실존적인 현존재의 존재조건이라 생각하는 철학자의 우수에 찬 눈빛을 띤다. 삶은 ‘영원한 안식’이라는 관습적 비유로 지시되는 죽음을 향해 가는 고단한 노역이고, 선택으로 가득 찬 도래할 시간 속에 놓인 갈등으로 가득한 실존적 주체의 피로로 지시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파산이 아니라 파산의 절차이듯/슬픔보다 통증이, 절망보다 피로가 먼저 찾아오는”(「불효자는 웁니다」) 이곳에서, 자유, 자유라고? 사과나무가 잘해봤자 사과를 떨어뜨리는 것 이외에 자유의지에 따라 할 수 있는 행위란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인가를 하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삶. 당신은 결단하고, 당신은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중력처럼 작용하고 있고, 그것은 사과나무의 의지와 의지의 실현에까지 관여한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떨어뜨리고, 떨어진 사과는 운이 좋으면 다시 사과나무가 되어 사과를 떨어뜨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과나무의 자유나 자유의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과나무의 자유에 대해 골짜기가 무슨 배려를 할 수 있겠는가? 중력과 풍속(風速)과 지형이 바뀌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것이 설령 극소 자유처럼 보일지라도 발 없는 사과나무의 최대 자유는 사과를 떨어뜨리는 것, 아니, 떨어지도록 놓치는 것이 고작이고, 이것은 이제 아파트 난간으로 아이들을 떨어뜨렸던 여자의 미친 짓처럼 극도로 절망에 차 있다고, 혹은 아이들을 떨어뜨렸던 여자의 미친 짓은 사과나무가 사과를 떨어뜨리듯이 그럴 수 없이 자연스럽다고 양방향으로 이해된다. 극적인 제스처나 훈훈한 감동, 교훈은 시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사과나무를 이해하고자 한다. “사과나무를 이해하기 위하여 바람이 불어오는 골짜기를 쳐다봐야 한다.” 이해하려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대상을 지배하는 환경을 쳐다본다. 애초에 목격한 사태의 원인은 그 자리에 있지 않다고.
살인과 사육과 대화의 기술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중력이 지배하는 세계에 발을 묻은 식물처럼 우리는 손가락을 까딱하고서 우리가 자유롭다고 여긴다. “비관주의자들은 갈파한다/죽음이야말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농담」을 위한 삽화」) 그것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처럼 시간문제이고, 자유는 “다만 최선을 다해 무너져가고 있을 뿐”(같은 시)인 우리가 어떻게 죽어갈 것인지 적은 선택지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다. 지성의 사람에게 세계는 희극, 감성의 사람에게 세계는 비극이라 했던가. 조심스럽고 내성적인 관찰자들이 그렇듯, 그는 사물과 사태의 거리를 넓혔다 좁혔다 조절하면서 희극과 비극의 세계를 번갈아 보여준다. 그가 농담을 할 수 있도록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살벌한 뉴스 속의 주인공들은 생활의 달인이나 슈퍼 영웅들을 닮았다.
뉴스 속 주인공들은 손에 칼을 가지고 있으며
스타킹과 마스크와 야구모자도 갖고 있다
가끔 그들은 정말 요리사나 운동선수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처럼 가스관을 타고 건물을 오르고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착지한다
나이키 점퍼로 얼굴을 둘러쓴 채
변조된 목소리로 책을 읽듯이 말한다
그들은 가리고 변조할 권리가 있지만
우리는 모자이크로 분할된 얼굴을 맞추고
변조된 목소리를 원래 상태로 복원한다
음식을 만들던 칼로 사람을 찌르거나
초강력 스파이크를 얼굴에 작렬한다면
그건 좀 비범한 일인데 놀랍지는 않다
놀라움이란 뉴스 바깥의 몫이다
비범한 재능이 탄생하는 순간 뉴스는 완성된다
평범함이야말로 비참한 최후라는 것을 절감한 듯
뉴스 바깥에선 여중생들이 줄인 치마를 입고
좆나 씨발을 발음하고 침을 좀 덜어낸다
-「뉴스의 완성」 전문.
“음식을 만들던 칼로 사람을 찌르거나/초강력 스파이크를 얼굴에 작렬하”는 이 “비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전작 시집에 등장했던 ‘은하슈퍼 장씨’나 ‘주름세탁소 주인’의 변형 같은데, 달인이 되거나 범인(犯人)이 되거나, 이들이 비범해지는 이유는 진화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현실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달인은 상징계에서 상징을 성취하기 위해 진화하고 범인은 상징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돌연변이가 되고자 한다. 범인들은 형이상학적인 생각을 할 여유 같은 것은 없으므로, 차마 죄인이 되지도 못한다. 달인과 범인들은 안간힘을 쓰며 완벽한 평범(그런 것이 있다면)을 달성하거나 최선을 다해 평범으로부터 달아날 뿐이다. 줄인 치마를 입은 여중생들에로 거리를 좁혀 다가가면 당신은 이런 고백을 듣게 된다.
우리는 정말이지 거지 같습니다.
배고프고 더럽습니다.
더럽게 배고파서 부끄럽습니다.
우리에겐 세계적인 부끄러움이 있어요.
껌도 세계적으로 씹습니다.
침도 세계에서 제일로 잘 뱉습니다.
(...중략...)
십대라는 말, 잘 들으면 욕설 같아요.
우리는 정말이지 휴지조각 같습니다.
-「천국의 아이들」
물론 이 시는 십대에 비유된 ‘우리’의 고백이지만, 배고프고 더럽고 세계적인 부끄러움을 가진 “휴지조각 같”은 ‘우리’가 껌도 세계적으로 씹고 침도 세계에서 제일로 잘 뱉는 건 바로 그 거지 같은 비루함 때문이다. 이 글로벌한 비루함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비범한 재능은 “사육의 기술”을 견디어 달인이 되거나 “살인의 기술”을 익혀 연쇄살인범이 되는 것(「살인의 기술」). “어쩌면 모든 것은 기술의 문제”인 걸까?(같은 시) 그러니까, 이전 시집부터 지속적으로 이현승의 문제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설탕, 아이스크림—단것(sweets)의 사육의 기술(그것이 ‘똥개’가 ‘개’가 되는 비의悲意이다. 「똥개」)과, 늑대, 동물의 왕국을 지배하는 살인의 기술은 내면의 희생자와 포식자가 극단적으로 취할 수 있는 두 개의 태도이다. 대부분의 시간에 우리는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것이/떠난 것이기도 하고 머문 것이기도”(「활주로」) 한 이중구속 상태에 놓여 있다. 이 기술들의 배후 진영들 사이의 투쟁 상태에는 휴식이 없고, 도덕감을 동원한 감동적인 화해도 일시적이며 회의적이다; “사자의 친절한 사냥술이 양에게 위로가 될까/사자를 위해 어떤 포즈로 쓰러지는 것이 좋겠는가”(「근본주의자」). 이를테면, 또 다른 기술로 제시된 「대화의 기술」은 포식자 앞에서 희생자가 시도할 수 있는 최후의 기술이지만, “불완전한 결혼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총애를 구해야 하는 열세 번째 아내” 세헤라자데가 “어쩌면/목숨밖에 더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제 무릎을 베고 잠든 야수의 등을 쓸어내릴 때/야수의 등에서 돋아난 부드럽고 따뜻한 털을 만질 때” 완성되는 “핏빛 아름다운, 천 하루의 퀼트”(「대화의 기술」)는 스톡홀름 신드롬에 사로잡힌 희생자의 자기기만인가, 예술의 어쩔 수 없는 생존 책략에 의해 완성되는 예술 그 자체인가?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다정도 병인 양」) 인질과 인질범은 늑대와 비명처럼 한 몸이고, 살인도 사육도 대화도 종국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 그러므로 예술은, 무도덕적이며 우연한 자연의 일부인 직립한 짐승들이 포식자와 희생자를 내면화하면서 사후적으로 구성된 양가성 속에서 날마다 정신의 생존을 연습하는 성실한 감각의 흔적이 아닐까?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원숭이가 되었다가
떨어지면서 다시 새가 되지만
사실상 떨어지는 내내 나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
가장 촘촘하게 추락을 몸에 새기는 중이다
-「낭떠러지」 부분.
우리는 아직 바닥에 닿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 떨어지고 있는 중이고, 완료되지 않는 추락 속에서 빚어지는 것은 몸에 새긴 추락의 가장 섬세한 디테일과 그 감각의 흔적들. 그는 마치 잠수하듯이 (잠수란, 물속에서 추락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추락의 순간들을 자기의 온 감각들을 동원하여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 한다. 그렇게 그의 가장 빛나는 기술, 감각과 성찰의 동시적인 기술(記述)이 완성된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너무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계속 아마추어일지도 몰라. “바닥을 벗어나면 다른 바닥이 기다릴 뿐”(「느와르」), ‘몰두의 방식’을 연구하는 동안에는 몰두할 수 없고, 스텝에 집중하면 펀치가 날아오고(「몰두의 방식」), 가끔은 잠자는 법, 밥을 씹는 일, 자전거를 구르는 방법조차 잊고 “매번 하는 일이 이따금씩 처음 하는 일 같다”. “눈과 귀를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하는 사람들이”(「초심자들」), 그러니까 죄 달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곳에서 그는 이미 젖은 사람들에게 더 내리는 “빗속에서 완전히 몸을 잠그고”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걷”기로 결심한다(「일인용 잠수정」). 다음의 시는 이번 시집에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비 맞는 삶에 관한 성찰들 중 가장 빛나는 장면의 하나다.
삼촌은 도축업자
사실 피 묻은 칼보다 무서운 건
삼촌이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입에 넣어줄 때.
입 속에 혀를 하나 더 넣어준 느낌
입 속에선 토막 난 혀들이 뒤섞인다.
혀가 가득한 입으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고기에서 죽은 짐승의 체온이 전해질 때
나는 더운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다.
차 속에 빠진 각설탕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녹아내린다.
네 귀와 모서리를 잃는다.
삼촌이 한 점을 더 넣어준다면
심해 화산의 용암처럼 흘러내려
나의 눈물은 금세 돌멩이가 될 것 같다.
-「따뜻한 비」 전문.
입 안에 들어온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어쩔 수 없는 난감한 표정으로 느리게 씹고 있는 어린 화자가 느끼는 무서움은 “피 묻은 칼”의 시각적 충격을 넘어선 촉각의 직접성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아직 더운 짐승의 살점은 토막 난 혀들처럼 그의 입 안을 채우고, “혀가 가득한 입으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미지근하고 물컹거리는 남의 살에 대한 첫 경험은 모든 처음이 그렇듯, 폭력적이다. 생생한 ‘이제 막 죽음’의 찜찜하고 난감한 맛은 죄책감, 공포, 연민으로 독자를 전율시킨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 이후 수십 년 간 익힌 것으로, 날것으로 남의 살을 씹으며 살아왔을 시인이 털어놓는 말문 막히는 첫 경험의 현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자라기 위해, 문명인이 되기 위해, 버젓한 사람이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공모의 의례들이라는 사실의 실감 아닐까? 거기에는 마치 한여름, 우산 없이 더운 비에 젖는 것만 같은 난감함이, 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은 수치감이 어려 있다. 소시지를 먹을 때 우리는 돼지가 소시지가 되는 과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돼지가 소시지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정말로 돼지를 소시지로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은 다른 일이겠지. 보고도 계속 먹는 것은 더 다른 일이겠지. 정말 다른 일일까? 우리는 모르고도 먹고, 알고도 먹는다. 남의 살을 더, 더, 더, 자주 먹으면서 우리는 뻔뻔하고 능란하게 사회화되어 왔을 것이다. 이 잔인한 공모와 수치의 사회화 과정의 단면을 이토록 사실적으로 그리고서 ‘따뜻한 비’라는 제목을 적어 넣었을 때, 그는 모두가 알았지만 각자 잊어간 비밀의 슬픈 성분들을 일컫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망측한 접촉들에 대해 친애하는 경의의 감정을 품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이 “풍선과 선인장들과 원심분리기의 세계/충돌하고 뒤집히고 총을 쏘면서 딸꾹질이 멎는 곳”, “울다가 웃으면서 머리카락이 하늘로 자라는 곳”(「놀이공원」)이라 능청을 떨 때, 놀라움 가득한 세계의 소식들은 TV 뉴스(「뉴스의 완성」)나 실험실(「무중력 실험실」), 만두방의 유리창 너머(「만두방에서 사라진 사람들」)처럼 짐짓 희극적인 풍경들로 그릴 수 있지만, 브라운관이나 유리창 같은 투명하고 안전한 칸막이로 분리되지 않는 현실, “내리는 비 속에서/더 이상 젖지 않는 것들은/이미 젖은 것들이고/젖은 것들만이/비의 무게를 알 것이다”(「비의 무게」)라고 젖은 목소리로 읊조릴 때, 어쩌면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너무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너무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 그는 어떤 존재론적인 전제에서부터 이 같은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현재적 감각 경험들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이 경험들 전체가 은밀하고도 총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이 실은 사과와 사과나무에 대한 중력이나 풍향, 풍속, 지리적 조건처럼 우리 머리 위의 기후—쉽게 물러갈 것 같지 않은 광범위한 기단처럼 개별적인 저항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임을 암시해왔다. 우리는 이것이 시적 화자의 행위를 사과나무의 식물적 자유에 비유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채감이 우리의 존재감”인, “낮에 켜진 전등처럼 우리는 있으나마나,/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유령들이며, “삶은 여전히 지불유예인데,/우리는 살면서 한 가지 역할놀이만 한다/채무자채무자채무자채무자채무자”. 비유이기도 실제이기도 한 이 빚진 인생의 담지자들은 “딴 사람은 없는데/잃은 사람만 있는 판돈 같은 이야기,/혹은 빌린 사람은 없는데/빌려준 사람만 있는 신체포기각서 같은 이야기”, 또 “때린 사람은 없는데/언제나 아픈 사람만 있는 폭력적인 이야기”처럼 괴담 같은 현실을 살아간다(「있을 뻔한 이야기」). 이 시의 제목은 얼핏 ‘있을 뻔했지만 없는 이야기’로 읽히도록 계산해놓았지만, 이와 반대로 실은 ‘십중팔구 있을’, ‘뻔한 이야기’임을 눈치채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종종 상반되는 의미로 읽히도록 의도된 이현승 식의 말놀이는 대개 풍자적인 뉘앙스를 띤다. 이 점에 집중하여 이 통찰력 있고 영민한 시인이 지나치듯 써내려간 구절들의 풍부한 의미들을 천천히 저작하여 읽어주시기를. 가령, 전작 시집의 「캐츠 아이」에서 고양이를 친 “운 나쁜 남자”는 1차적으로는 ‘운이 나쁜 남자’로 읽히지만, 표층을 한 겹 벗기면 자기 안의 양가성을 고백하고 있는 “a cried bad man”으로 읽힌다. 또, 「지나친 사람」의 ‘지나치다’를 형용사와 동사, 두 의미로 읽어보라.) 우리는 “못과 망치를 빌리러 갈 이웃이 있”고(「좋은 사람들」), 그 못과 망치로 생산적이거나 끔찍한 무슨 짓을 벌일 수도 있다. 이 빈곤하고 비루하고 무서운 삶을 견디기 위해 진지한 비관주의자가 잔인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방편은 농담과 웃음이지만(“웃음은 현재를 살아가는 데 소용되는 비용이다/입맛 없이 우겨넣는 식사처럼 그것은 몸에 좋다”, 「「농담」을 위한 삽화」), 그리고 밤이면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당신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지만/당신은 결국 당신에게로 돌아온다”(「침대의 영혼 2」).
당신은 결국 당신에게로 돌아온다. 여기로. 오늘로. 그리고 사육과 살인과 대화의 기술 훈련은 오늘도 계속된다. 계속되는 납세와 훈련과 연습 속에서 당신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당신은 오늘, 부디 깊이 깊이 침잠하기를. 당신은 당신 자신의 깊이에 놀랄 수도 있다. 거기서 당신은 망측하고 희한하고 우습고 슬픈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당신 자신의 가없는 수심(愁心)의 깊이에서 나온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랄지도 모른다. 열 길 물속보다 깊은 한 길 사람 속의 측량할 수 없는 수심, 그것이 자기 안팎의 망측한 (괴)사물들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려는 선의의 깊이에서 나온다는 것을. (끝) (2012-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