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든 생각
이사라
수천 년 물들여진 염색공장 가는 길은
좁고 구부러진 골목들로 이어집니다
이런 골목들은 미로를 낳고
미로는 언제나 생각을 낳습니다
오랜 가난이 묻어나는 그 길 가는 길에
어린 일꾼들이 할당된 오랜 슬픔을
염색하고 있습니다
슬픔의 장치는
염색물이 고인 벌집 구덩이들처럼 꿈틀댑니다
피부를 뚫고 가슴 속에 자라나는
벌집 같은 기억들도 염색되는지
창공에 널리는 것들 모두
골목의 그늘을 비의(悲意)처럼 드리우고
미로를 지나갑니다
여인의 손아귀 속에 손목 잡힌 저 아이도
미로 속 골목의 아이로 자라서
금새 한 몫을 하는 일꾼으로 염색될 것입니다
색색으로 물든 빛깔을
햇살에 너는 것을 보면서
염색공장 가는 길에
나는 자주 자주 멈추어 서서
길마저 염색되는 지표(地表)에 관한 생각들을 건져 올립니다
이사라의 근`신작시 다섯 편을 읽으며 나는 봉분으로 향하는 발바닥들의 생을 생각한다. 무덤과 밥숟가락 사이에는 미로가 있고, 이 미로는 나날이 염색공장으로 향하는 물든 일상으로 이루어진다. 애인들은 바뀌고, 이 밀접한 타인들은 언제나 ‘내’게 동일한 위협적 타자―‘그 애인’이 된다.
이러한 운명론은 기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시대는 온통 냉소적이 되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잃어버렸는데, 그 상실은 정치적 기획과 일상의 변혁 가능성의 상실이 아니다. 정말이지, 중요한 것은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많은 이데올로기들을 맛보았고, 그리하여 그로부터 어떤 거대한 명제를 부지불식간에 도출해내었다. 그것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우리를 무덤으로 가는 지리멸렬한 “물든 생각”의 대전제로부터 주의를 빼앗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염색공장의 이름과 상관없이, 그 길은 “수천 년 물들여진 염색공장 가는 길”이고, “이런 골목들은 미로를 낳”는다(「물든 생각」). 탄생과 죽음 사이만이 유일한 ‘나’의 몫이다. 어떤 방식의 개별적인 삶도 색깔이 다른 염색된 천일 뿐, 같은 공장에서 나온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나의 고백이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대리하는 언필칭 글 쓰는 자의 횡포이며 월권이다. 그러나 나는 다 털어놓을 요량이다. 오늘 내게 주어진 시들을 빌려, 이 시들에 관해 쓴다는 핑계로, 온통 냉소적이 되고만 나와 당신들의 발바닥이, 단단해져서 갈라질 때까지 즈려밟고 가야만 할 요람과 무덤 사이에 관하여. 월권에 대한 과욕이야말로 쓰는 자들로 하여금 세계를 넘어서기를 포기하지 않을 책임을 방기하지 않도록 추동하는 연료이기 때문이다.
물든 세계; 시대는 온통 냉소적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을 하고, 곧 결혼하고 대출 받아 집 장만하고, 아이들을 낳고 학교에 보내고, 더 많은 돈을 벌어 학비를 대고 빚을 갚고, 아이들은 대개 너무 오랫동안 학교에 다닌 뒤 ‘나’의 삶을 반복한다. 은퇴 후의 짧은 휴식을 안전하게 보장받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노동을 적금에 바친다. 명확한 기획이 없이 이 생활의 순환에 등을 돌린다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비정한 짓이다. 게다가, 이 불안한 현대에 개인 차원의 명확한 기획은 가능한가? 우리의 대부분은 대답을 망설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물들었다. 태어나는 순간, 세계는 그렇게 생겨먹어 있었다. 우리가 우리 아닌 무엇으로 당장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가 우리의 목구멍을 위해 하는 일들, 염색공장의 노동으로 생산되는 것들은 “모두/골목의 그늘을 비의(悲意)처럼 드리”운다. “여인의 손아귀 속에 손목 잡힌 저 아이도/미로 속 골목의 아이로 자라서/금세 한 몫을 하는 일꾼으로 염색될 것”이다(「물든 생각」). 그래서 뭐?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당장 굶어죽을 위협에 처하지 않는 이상 이 삶을 나는 끝장날 때까지 살 수 있으리라. 시인은 생각한다. “색색으로 물든 빛깔을/햇살에 너는 것을 보면서/염색공장 가는 길에/나는 자주 자주 멈추어 서서/길마저 염색되는 지표(地表)에 관한 생각들을 건져 올립니다”. “자주 자주 멈추어 서서”의 “자주 자주”는 자줏빛 지엄한 깨달음을 예비해 둔다. 저 염색공장은 사람들을 물들일 뿐 아니라 지표마저 물들인다고. 염색공장이 물들이는 것은 아름답고(다시 말해 미적이고), 시대를 초월해 목구멍과 연결되어 있고(다시 말해 필수적이고), 그래서 지배적이며, 땅거죽(地表)마저 바꾸어놓는다. 그런데 시인이 건져 올리는 “지표(地表)에 관한 생각들”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 내용은 시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표제로 추측하건데, 이 생각들은 “물든 생각”이다(다시 말해 염색공장의 지배하에 있다). 그러니까 요는, 우리는 염색공장 가는 도정에 있으며, 어느 시점에 염색공장에서 염색을 하고, 이미 물들기 시작해 물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 성찰마저 “물든 생각”이라는 것이다. 물들지 않을 수 있을까? 물들지 않을 수 없을까? 아니, 어쩌면 질문을 바꾸어야 할까? 물든 세계에서 어떻게 나갈 것인가가 아니라, 거기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로?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희망해도 좋으리라. 문제는 우리의 물든 세계에 대한 깨달음조차 물든 생각이라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온통 물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물들어 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절망과 운명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러한 절망감으로부터 오는 통찰이 조금씩 다른 빛깔로 다섯 편의 시를 물들이고 있다. 사실 그 고통스러운 절망과 통찰은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 본 「물든 생각」 이외의 나머지 시편들의 첫줄과 결구들을 살펴보자.
1) 그는 요즘 날마다 발바닥을 내게 보인다
...(중략)...
언젠가는 먼 길 가는 새들처럼
떠나야 하는 발바닥들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창 안에는
-「세상의 창 안에는」, 마지막 연
2) 식탁 위에 놓인 밥숟가락이
한 덩이씩 생을 담고 나를 기다려요
...(중략)...
그래요
밥숟가락이 봉분이 되고
당신들 무덤이 세상의 밥숟가락이 되어
나를 기다려줘요
-「밥숟가락」, 마지막 연
3) 초원에 점점이 섬이 있다
...(중략)...
초원의 모래바람에 섬이 깎여가듯
몸을 깎아가며 살아온 길이 보이는 사람들이
모서리 없이 둥근
또 한 점
섬이 된다
-「섬」, 마지막 연
4) 어느 날 애인을 잃어버린 적이 있을 것이다
...(중략)...
돌아온 애인은 이미 그 애인이 되어 있고
내 안에서 저 멀리
수평선처럼 하나의 금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애인」, 2연 마지막 부분.
시인은 ‘그’(아마도 아버지)의 발바닥을 “먼 길 가는 새들”의 발바닥의 하나로 아우르거나(1), 섬(무덤)의 풍경으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도 오래토록 그렇게 낡아간다”는 진술로 일반화함으로써(3) 죽음의 보편성을 이끌어내고, “식탁 위에 놓인 밥숟가락”으로부터 “당신들 무덤”=“세상의 밥숟가락”이라는 등식을 도출하며(2), 반복되는 연애의 애인(들)을 “그 애인”으로 통합하여 상흔처럼 남은 자리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살이의 역사를 일반화한다(4). 나머지 네 편의 시들보다 조금 더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기는 하지만 앞서 살펴 본 「물든 생각」도 풍경에 대한 개별 묘사로부터 물든 세계라는 인식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이 다섯 편의 시들은 모두 현재에 대한 묘사와 진술로부터 시작해 삶에 대한 통찰을 이끌어낸다. 나는 방금 ‘인식’이라고 말했다. 이사라의 시편들을 주조하고 있는 것은 상상보다는 인식의 거푸집이다. 그러므로 시적 진술이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이 시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귀납적 논증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개별 사례들로부터 보편을 이끌어내는 것은 시인들의 아주 오래된 장기 중의 하나다. 그러한 시적 진술은 삶에 밀접해 있으며, 경험적 진리를 전달한다. 게다가 이러한 방식은 ‘물든 세계’라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과 한 몸이다. 수많은 비슷한 사례들을 경험하면서 일반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을 어느 정도 균질화하지 않고서는, 그 차이들을 ‘모두’ 감당하고서는, 우리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때로 나태의 위험을 내포하는데, 이때의 위험은, 귀납 논증에 의한 일반화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사례들의 바깥을 배제하려는 고집스러운 시선으로부터 비롯할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바꿔 말해, 절망으로부터 오는 통찰로 인해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관건은, 일반화로 가는 도정의 진지함의 밀도에 있을 것이다. (정말 그것뿐일까? 나는 이 물음을 잠시 접어둔다.)
‘발바닥’과 ‘금’
「물든 생각」에서 명백하게 보이고 있는 이 ‘알고 있는 나’라는 ‘물든 생각’이 염색공장의 거대한 지배를 드러내어 보여준다면, 나는 그 절망스러운 통찰들의 밀도로부터 오는 희망의 편린을 시 「세상의 창 안에는」의 ‘발바닥’과 「그 애인」의 ‘금’에서 발견한다. 시인이 절망스러운 통찰의 핀 조명을 쏘는 지점은 대개 ‘죽음’으로 수렴되는 풍경들인데, 그것은 타인들의 죽음이라는 사례들로부터 도출된다. 죽음은 언제나 타인들의 죽음이다. 그것이 ‘나의 죽음’이라면, 그것에 관해 발화할 행위의 주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우리는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을 살’ 수만 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살게’ 하는 것은 심정적으로 밀접한 타인들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매일 누군가가 죽고 있는 지구에서 죽음을 한 시도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밀접한 타인의 삶을 알고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죽음’이다. 「세상의 창 안에는」에서는 이 구체적이고 밀접한 타인의 구체적인 경험의 주체가 ‘발바닥’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노인요양원에서 “요즘 날마다 발바닥을 내게 보이”는 ‘그’는 이제 “다시는 걸을 일 없는 삶을 시작”하고, 창밖의 새들이 그러하듯이 땅을 딛지 않고도 먼 길 갈 시간을 앞에 두고 있다. 하늘을 날고 있을 때가 아니라면, 새들은 죽기 전에는 발을 뻗지 않는다. 새들의 운명이 날개에 있는 것처럼, 인간의 운명은 발바닥에 있다. 발바닥을 자주 보인다는 것은 그의 운명이 쉬이기 직전이라는 것. 발바닥만큼 그 주인이 있었던 장소들에 관해 피부로 알고 있는 다른 신체기관이 있을까? 이 시에서 발바닥은 눈으로 보거나 머릿속으로 추억하는 (가상-)시각적인 것과는 달리, 전적으로 육체적인 사건들을 밟아나가는 스캐너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인간적 행위이므로, 발바닥은 그 어떤 육체의 표면보다도 과소평가되고 부당하게 혹사당해 왔다. 화자에게 ‘그’의 어떤 신체 부분보다도 “곰발바닥처럼 갈래갈래 시큼”한 그의 발바닥이 눈물겨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발바닥의 운명’이 끝나면, 그는 ‘세상의 창’ 바깥의 새들처럼 날개의 운명을 시작하리라. 그런 그의, 거의 추억이 되어버린 삶에 관해 지각적으로 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낡은 구두처럼 해진 발바닥의 체험을 공유해야만 비로소 앎은 경험적 진리의 차원으로 도약한다.
「그 애인」은 어떠한가. “어느 날 애인을 잃어버린 적이 있을 것이다”라는 추측성 진술로 시작해 “하나의 금으로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의지적 미래(완료)로 끝나는 이 시는 ‘애인’의 ‘사라짐’과 ‘돌아옴’의 반복을 ‘해일’로 경험하며 “돌아온 애인은 이미 그 애인이 되어 있고”라는 후반부에 오면 연애의 질곡을 노출하는 것으로 끝날 기미를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어지는 결구는 “내 안에서 저 멀리/수평선처럼 하나의 금으로 남아있을 것이다”로, ‘금’의 다의성을 끌고 들어온다. 그것은 아득한 상흔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화자의 연애의 선(線), 혹은 금제(禁制)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며, 잘 알려진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의 결구,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에 바쳐진 오마주 같기도 하다. 그럴 때 아득한 상흔으로 희미해지기를 바라는, 혹은 그럴 것이라 추측하는 화자의 고통을 견디는 일반화의 방식은 이 여러 가지 의미들과 함께 훨씬 복잡한 정서적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앞서 썼듯이 다섯 편의 시들이 ‘귀납적 논증을 통해 경험적 진리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이 시의 ‘결론’ 부분은 다른 시들에서와는 다르게 시의 고유한 애매성과 다의성을 시 속에서 소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려나, 내게 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주체의 사고로부터 비롯되는 일반화는,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 반대 방향으로 무한히 환유되는 겹쳐진 상자들처럼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생각되지만, 우리를 이 사유의 외피로부터 구원할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 자체의 중첩된 의미와 애매함이 환기하는 빛깔들의 결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기로 한다. 시대는 온통 냉소적이 되어서 우리는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리하여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만큼 더 곤란해졌지만, 그것들을 아우르는 것은 여전히 우리 스스로에게 남겨진 우리를 구성해야 할 책임-혼돈을 견디지 못해 성급하게 교훈으로 마무르지 말아야 할-으로부터 멀지 않다고. 그것은 우리의 눈이나 머리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체험하는 수고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9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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