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의 사체가 먼지를 머금고 아직 직립해 있을 때
썩지 않는 생선 꼬리를 맡으며
나는 누구의 이름을 생각해냈던가
인공물이 자연에 근접하며 낡아간다 지워지고 흔들리며
지붕은 속살이 드러나
그곳에선 빤히 혼자라는 게 허기처럼 떠오르고
태양계를 벗어나는 탐사선처럼
깊은 수심 속으로 내려가는 죽음을 상상한다
살마다 녹슨 새장은 스스로를 속박한다
들떠 일어난 천장의 페인트가 나방처럼 날개를 젓고
버려진 스패너들 검어진다 네 얼굴처럼
묽게 칠한 그의 아랫도리가 가리고 있는
두 개의 흐린 눈은
언제를 기억해내려 했던가
해가 흘린 피를 유리창이 반사한다
광택을 잃은 구층 아파트의 허물어지는 베란다
느리게 몸을 열고
거품을 무는 바다에서 새가 제 흰색을 공중에 그린다
짙은 물이 고인 거대한 욕조 바닥
마개를 뽑을 때 들리는 비명소리는 언제나 물리지 않았지만
더럽혀진 젖은 손가락은 결국 어디를 가리켰는가
― <창작과비평> 2007, 가을
‘아직’과 ‘결국’의 현장에서 춤추는 추억의 유령 - 이승원,「폐허의 섬 파르티타」
느리게 풍화하는 폐허를 처음엔 윤곽만 보았다. 그리고 목에 걸리는 사물과 생물의 이름들이 올록볼록 렌즈 속으로 들어왔다. 세 번째 읽었을 때, 나는 그가 현실주의자라고 정말 믿게 되었다. BBC 다큐멘터리 팀이라면 30년 동안 나무의 생장을 관찰하고 빈 건물이 정말 폐허가 될 때까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카메라를 계속 돌릴 수 있을 테지만, 그런 것은 불에 손을 넣어봐야 뜨거운 줄 아는 ‘좀 아둔한 경험론자’들의 일. 현실주의는 아둔한 경험론과 다르다.
왜 파르티타인가. 나는 그와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은 ‘깍두기가 되고 싶었으나 감수성이 예민해서 안타깝게 포기한 사람’이었다. 음악으로 치면 21세기의 테크닉으로 도모하는 70년대 로큰롤 같았다. 그에 대한 인상은 시와 겹쳤다. 분노의 베이스가 깔린 그의 내달리는 어조는 펑크밴드의 속주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대체로 테크닉과 절제가 클라이맥스로 가는 길을 적절히 예비하는 잉베이 말름스틴이나 메탈리카의 한창 시절 기타연주를 떠올렸다. 그런데, 왜 파르티타인가.
생각해보면 잉베이 말름스틴이나 메탈리카의 한창 시절 기타는 바로크 음악을 떠올린다. 무반주 바이올린, 혹은 하프시코드 파르티타를 들으며 시를 다시 읽는다. (피아노는 그럭저럭 어울리지만 기악협주의 숨 쉴 틈 없이 꽉 찬 소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복되는 동기들의 변주가 되풀이되는 것이 들린다. 파르티타는 무도곡이다. 그러나 「폐허의 섬 파르티타」는 결코 장조가 아니다. 실외의 폐허를 실내로 끌어들이는 우울한 무도곡. 파르티타에 맞추어 춤을 출 때는 도대체 어깨를 들썩이기는 힘들 것이다. 여기에서는 절도가 필요하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 철거 직전의 낡아가는 건물에서 춤추는 대립적인 이항들은 이를 드러내고 웃거나 노골적으로 찡그리지 않는다.
2연의 “인공물이 자연에 근접하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를 인공/자연의 익숙한 구도로 읽기 쉽다. “건물의 사체...직립해 있을 때”, “지붕은 속살이 드러나”, “살마다 녹슨 새장”에서 “살”의 중의적 의미, “페인트가 나방처럼”, “버려진 스패너들...두 개의 흐린 눈” 같은 시구들은 현대 시에서 자주 사용하는 활유법으로 읽힌다. 활유(活喩)라니? 여기에 장치가 있다. 이 시의 활유는 인공물을 자연물과 혼합하려는 활유가 아니다. 인공물인 건물의 구석구석을 해부실의 사체처럼, 사물이 아닌 ‘죽은 생물’처럼 보여준다. 죽은 생물은 무생물은 아니지만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은 것’, 그러니까, 언젠가 살아 있었던 비-생물, 추억을 지닌 비-생물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인공물/자연물의 도식을 다른 구도로 흔들어 재배치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인간이 생물학적 생기를 부여할 수 없으니 인공물은 본디 비-생물이다. 그러나 물, 돌, 해 같은 자연물도 유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비-생물이다. 도저한 활유법의 사용, 가령 7연에서 “느리게 몸을 열고”라는 한 행이 앙장브망(의도적 행갈이)을 통해 ‘베란다’와 ‘바다’와 ‘새’가 하나의 행위로 연결되면서 시계(視界)로 들어오는 장면, 그리고 마개 뽑힌 욕조에서 들리는 물의 ‘비명소리’를 보라. 그것은 인공물을 자연으로 활유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물을 유기물로 활유하는 것에 가깝다. 다시, 활유라니? 그것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사체, 해체되어가는 중인 유기물이다. 그들은 섭식도 생식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서히 무기물이 되어가고 있다. 이 썩지 않고 스러지는 폐허는, 이미 1연의 ‘썩지 않는 생선 꼬리’에서 암시된 것이다. 지붕, 살, 천장, 스패너, 유리창, 베란다는 시체농장의 시체처럼 썩어가는 중이다. 다만,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 냄새 없는, 풍경만의 부패야말로, 죽어도 죽지 않는 추억과 유령성을 공유한다. 그래서 ‘거대한 욕조 바닥의 마개를 뽑을 때 들리는 비명소리’는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가상의 것이다.
그런데, 왜 파르티타인가? 이 시에서 기본적인 동기는 다음과 같이 변주되고 있다. 1. “나는 누구의 이름을 생각해냈던가”(1연)→“죽음을 상상한다”(3연) 2. “두 개의 흐린 눈은/언제를 기억해내려 했던가”(4연)→“거품을 무는 바다에서 새가 제 흰색을 공중에 그린다”(6연) 3. “더럽혀진 젖은 손가락은 결국 어디를 가리켰는가”(7연). ‘누구’와 ‘언제’와 ‘어디’—추억의 삼각형을 이루는 의문사에 상응하는 해답들을 화자는 알고 있(는 듯하)지만 암시적인 묘사로 일관하다 입을 다문다. 이 의문문들은 사실 감탄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시구의 의문형 종결어미 때문에 우리는 되돌이표를 만난 듯 첫 연으로 돌아가 다시 ‘건물의 사체’와 손잡고 ‘아직’(“건물의 사체가 먼지를 머금고 아직 직립해 있을 때”)에서 ‘결국’(“더럽혀진 젖은 손가락은 결국 어디를 가리켰는가”)으로 또 한 번 나아간다. ‘누구’와 ‘언제’와 ‘어디’는 변주된 동기로, 하나의 뭉뚱그려진 추억의 덩어리를 지시한다. 추억의 삼각형, 그 꼭짓점들은 자리를 바꾸어가며 죽어도 죽지 않고, 무도곡을 따라 돈다. 죽은 추억의 자리에서 그 유령과 만날 때, 이 ‘현실’을 증언할 자 누구인가. 그는 이 유령들과 공생하는 우리 삶의 현실주의자다. BBC가 백 년 동안 카메라를 갖다 댄다 해도 이런 것은 절대 찍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