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학교 옥상에서 미끄러지는 순간을 뭐라 불러야 할까 붕대를 둘둘 말고 교련 시간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구하는 법을 배운다
『이방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너는 딱 한 페이지만 읽었다 창가 맨 뒤에 앉아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의 귀퉁이를 칼날로 도려냈다
쌍둥이의 청바지는 언제나 고급스럽군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동생의 허리춤에 손을 넣고 웃었다 태양 때문에 누굴 죽이지는 않겠어 코를 킁킁거리던 쌍둥이는 한 군데서 달라진 자신들의 얼굴을 마주보고 침을 뱉었다
붕대를 감는 시간보다 푸는 시간이 더 빨랐던 너, 책상 밑으로 기어가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던 너는 『이방인』의 살인 이후 장면은 궁금하지 않았다 붉은 물을 들이마시며 담장의 나무들이 똑같은 표정으로 창문을 긁었다
시범을 보이려 교실 앞자리에 누워 있던 쌍둥이는 모든 삼각 붕대를 풀고 일어난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우리는 간호사 모자를 썼다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데 너는 왜 내 심장을 누르고 태어난 거니
쌍둥이 동생의 꿈은 유전학자였다 밤마다 학교 담장 벽돌들의 유전자 공식을 만들며 어떤 벽돌을 빼내야 하는지 고심했다 옥상에서 미끄러지는 순간에는 몇 개의 유전조합을 만들어야 공중으로 떠오를까
붕대를 쓰레기통에 처넣고 너는 꼭대기로 올라간다 자신을 구원하고 싶었던 페이지를 딱지 모양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담장에 기대어 손을 내뻗는 나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딱 하나의 다른 표정을 기억하고 붉은 눈이 된다
‘소녀’의 갱생 여행 ; 그것은 죽었다, 고로 나는 달리 존재한다 - 이영주의 시
이영주의 시는 소녀로 가득 차 있다. 언제까지나 성장하고 있는, 그러므로 성장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소녀는 끊임없이 저의 기원을 찾아 나선다. 기원? 기원이라니? 기원이 발견되기보다는 발명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틈만 나면 상기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이다. 그녀가 찾아나서는 기원은 그녀를 그녀이도록 정체성을 정향하는 사실(fact)로서의 기원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의 밑그림이다. 현실의 그로테스크함은 부조리한 꿈들의 자원이다. 그녀는 상상의 도움을 빌어 현실을 그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가장 사실적인 사건들의 몽타주로 현실의 밑바닥에 그려져 있는 근원 환상들의 흔적을 복구한다. 나는 방금 ‘복구한다’고 썼다. 그러나 기원과 마찬가지로, 근원 환상도 그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대로 끄집어내어진 분명한 장면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근원 환상 역시 ‘창조된다’고 써야 마땅하다. 그러나 무의식과 의식이, 내부와 외부가, 배와 등이 붙어 있는 원초적 장면들의 세계는 복구되는 동시에 창조된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동시에, 마치 애초에 그러했던 것처럼 당분간 그녀의 기원이 될 것이다.
그녀의 ‘나’의 기원과 발생에 관한 시적 표현들은 각 편마다 한정된 장소와 그 경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숲의 안팎과 그 사이 어디엔가 있는 공터(「공」), 집의 안팎과 그 사이의 베란다(「종이인형」, 「일기예보」), 교실과 외부의 경계인 학교 옥상(「교련 시간」), 집 혹은 병실의 안팎과 그 사이의 창문(「적도로 가는 여행」) 등 시적 화자가 위치한 곳은 일정한 장소의 안과 밖을 조망하는 자리다. 그곳에서 시의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대개 비밀스럽게 파국으로 치닫는다. 「공」이라는 제목의 비밀스러운 숲의 그로테스크한 우화는 엄마인지 아이인지 “담요에 싸인 공”을 “파먹으며 점점 아름다워”지는 “뿌리들”의 이미지로 끝나고, 「종이인형」에서 모성적 초자아와 갈등을 일으키는 ‘언니’는 “부릅뜬 눈으로 하루 종일 꿈속을 향해 걸어갔”지만 “꿈속으로 가는 길에는 아무것도 없어”라고 체념조로 말한 뒤 ‘여자’가 되며(“키가 큰 언니의 초경이 시작되었다”), 「교련 시간」에서 아마도 쌍둥이 중 손위 형제인 듯한 ‘너’는 자신의 거울상이자 위협적 타자인 상대에 대한 살해 충동에 시달리다가 학교 옥상으로 올라가 미끄러지고, 기상캐스터를 동경하던 「일기예보」의 소녀는 계단에서 실족한다. 다만, 마지막 시편인 「적도로 가는 여행」만은 예외로 하고, 그녀의 시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과거형으로 기술되기를 고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공간에 고착된 현재진행중인 심상, 즉 트라우마의 장면들처럼 읽힌다.
그녀의 시들이 대개 과거형으로 기술되는데도 현재진행중인 트라우마의 장면들로 독해될 가능성의 증거는 대개 이미 종료된 파국과 모순되는 현재진행형 어투의 첫 구절들에서 드러난다. 「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거형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그 외 네 편의 시들은 모두 현재형으로 시작해 과거형으로 끝난다. “너는 가위질을 너무 못해”라는 ‘어머니’의 현재형 언명은 직접 인용이라 하더라도 시 전체의 사건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이인형」 전체에 현재적 상처의 기원으로 기능한다. “네가 학교 옥상에서 미끄러지는 순간을 뭐라 불러야 할까” 역시 「교련 시간」에 함의된 이야기의 극적인 마지막 장면(이미 일어났다고 간주된 사건)부터 호명한다는 점에서 외상의 증거다. “기상캐스터를 볼 때마다 소녀는 숨이 차지”라는 「일기예보」의 현재형으로 기술된 첫 구절은 유혹에 관한 근원 환상으로서, 역시 결구에서 과거형으로 기술된 ‘실족 사건’의 발단이 되며, 「적도로 가는 여행」의 “창 밑에는 공사가 끝나지 않은 하수관.”은 수미상관의 방식으로 결말부와 연관되지만, 역시 결구는 “골목과 골목 사이 어느 자궁으로 돌아가야 할지 죽음의 기초 공식을 풀기 위해 노트를 펼쳤습니다.”라고 과거형으로 끝난다.
과거의 사건들(시적 화자의 기억 속에서건 환상 속에서건)이 현재형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은 이 사건들의 외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면서 그것을 끊임없이 과거로 돌려보내려 하는 시적 화자의 무의식적 의도를 드러내준다. 될 수 있으면 감정을 배제하려 한 흔적이 역력한 시인의 시편들은 시의 행위 주체들을 고의적으로 사물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물화를 위해 배제된 감정들은 무정(無情)한 명사들로 귀환한다. 무정한 명사들은 한 무더기로 시 전체를 불안과 공포로 물들인다. 죽음의 위협과 공포는 예외 없이 한 번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아마도 새로이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사실, 죽어야 다시 산다는 예감으로 가득 찬 이 시들은 ‘그것은 죽었다, 고로 나는 달리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아마도 이 명제의 실재 형태는 ‘그것은 죽어야만 한다, 고로 나는 달리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일 것이다.
가령, 시 「교련 시간」에서 등질적인 삶, 그리고 동일성과 차이에 대한 동등한 공포와 증오로 비롯되는 추락사의 장면은 갱생을 위한 자살이면서 동시에 위협적 타자에 대해 벌어지는 타살이다. “붕대를 둘둘 말고 교련 시간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구하는 법을 배운다”는 진술과 주요 인물인 쌍둥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람’과 지나치게 밀접한 타인이라는 두 개의 극을 중심으로 한 편의 사건이 벌어짐을 보여준다. “<이방인>의 살인 이후 장면은 궁금하지 않았던 너”는 “태양 때문에 누굴 죽이지는” 않는 대신 “붕대를 쓰레기통에 처넣고” “꼭대기로 올라간다”. “자신을 구원하고 싶었던 페이지”, 그것은 자기 대신 위협적 타자를 제거하는 것이었겠지만, 이미 누구도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교련 시간”이라는 학과목의 이름이 암시하듯, 벽돌처럼 몰개성적이고 불특정한 등질적 다수, 사회의 상징적 질서의 대상으로 호명되는 주체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어차피 ‘모르는 사람’의 일부로서, 이 ‘쌍둥이’는 정말 쌍둥이라도 상관없고, 형제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으며, 한 사람의 두 개의 인격이라도 하등 문제되지 않는다. ‘쌍둥이’라는 표현조차 단수인지 복수인지 불분명하다. 이 불분명함이 실은 이 시의 핵심이다. “쌍둥이”라는 노골적인 등질성의 비유는 이들 사이의 “딱 하나의 다른 표정”을 드러내는 시적 계기일 뿐이다. “쌍둥이 동생의 꿈은 유전학자였다 학교 담장 벽돌들의 유전자 공식을 만들며 어떤 벽돌을 빼내야 하는지 고심했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의 또 하나의 벽돌처럼, 혹은 “담장의 나무들”의 똑같은 표정처럼, 그들의 “딱 하나의 다른 표정”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안의 너의 계기’를 품고 “네가 학교 옥상에서 미끄러지는 순간”은 타살로서의 자살, 혹은 자살로서의 타살이다. 그것은 타인의 견딜 수 없는 등질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심리적으로는 타인과 지나치게 친밀해짐으로써 차이를 인지한다(“딱 하나의 다른 표정을 기억하고 붉은 눈이 된다”) 해도 사회의 상징적 질서가 그를 벽돌로 다루는 이상(“교련 시간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구하는 법을 배운다”) 피할 수 없는 사건처럼 보인다. 똑같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똑같이 견딜 수 없다. 누군가를 구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에 누군가가 옥상으로 올라가 미끄러지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타살 사건의 아이러니는, 주체들의 몰개성을 전제해야만 하는 ‘법’이 언제나 특이성으로만 발현되는 실재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을 충격적으로 드러낸다. 교련 수업은 바로 그 시간에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그 누구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타살적 자살은 자신의 특이성을 발현하는 극단적인 조처다. 그것은 등질성에 대한 무자비한 복수극, 하나의 테러이면서, 갱생에 대한 충동의 실현 방식이다.
이 같은 갱생에 대한 욕망은 「적도로 가는 여행」에서 보다 시인 자신의 목소리에 가까운 어조로 발현된다. “하루살이들”과 “눈을 감으면 길거리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형태로 태어나는 나”, “낡은 천으로 온몸을 감싼 아기들”은 “탈바꿈”을 기다리고 있다. 화자는 “적도 근처의 도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지만, “나”는 기다렸다는 듯 “이제 드디어 얼굴을 바꿀 수가 있구나”, “가방을 버리고 흙처럼 가만히 뭉개”진다. 특이성과 차이의 결정적 표지인 자신의 얼굴을 지우겠다는 소망은 “죽음의 기초 공식”을 푸는 일의 동기가 된다. 그러기 위해 화자가 하는 일은 또 한 번의 죽음을 감행하는 것, “건너편 집 하수관의 철골을 떠올리며” “노트를 펼치”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자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새벽마다 싸움질 하며 서로의 이름을 지우던 이웃집 모녀의 비명을 구분하면서 어느 자궁으로 돌아가야 할지” 스스로 선택하고자 한다. 흥미로운 것은 얼굴을 지우려 하는 화자가 이름과 목소리를 보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우연히 주어진 자신의 태생의 장소와 자신의 얼굴을 변경하고자 하는 일, 이 불가능한 공식을 풀려는 안간힘으로 화자는 우연한 “사고”를 ‘기회’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낯선 “적도 여자들의 옷자락을 움켜쥔”다. 이 시는 일찍이 첫 시집에서 “너는 고아다/너를 키운 것은 기호였다”(「나쁜 피」, <108번째 사내>)고 말한 시인이 갱생에의 의지로서의 죽음을 어떻게 자기의 기호로 실현하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시론인 셈이다.
「공」에서 비교적 잘 드러나듯이 그녀의 세계는 히브리인들의 창조론처럼 발생 과정에 대한 기술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의 시들 중 어떤 유형은 범람하는 명사들과 지나칠 정도로 세세한 세부 묘사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이미지의 기승전결을 잇기 어렵다. 그것은 그녀가 완결된 세계상보다 발생과 소멸의 ‘과정’에 더 집착하고 있음을 실증한다. 마치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과정을 세세히 기록해놓은 「창세기」의 부분을 읽으면서 방주의 전체적인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그녀의 환상이 전적으로 시각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각적 이미지로 이루어진 환상은 조망할 수 있는 하나의 큰 그림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초현실주의자의 몽타주처럼 대개 부정합적인 장면들의 접합으로 이루어진다. 그 목적은 하나의 조화로운 형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괴하더라도 발생의 과정 그 자체를 될 수 있으면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원을 발견/발명하려는 소녀의 모험은 끝없이 원초적인 장면들로 돌아간다. 그것은 태어나는 장면이기도, 낳는 장면이기도, 죽는 장면이기도 하다. 소멸과 재생, 재생산의 순간들은 그러나, 언제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배가 등이고 등이 배다. 그녀의 근원 환상, 발생과 소멸의 세부 장면들을 어떻게 결정할지에 따라 그녀는 매번 자신의 얼굴을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