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100

엘비스의 찹쌀 도나쓰

* 이 모든 것은 팩트이며 전혀 허구가 아니다. 1982년 봄, 엄마와 아빠와 나, 세 식구가 구반포 아파트에 셋방을 들어 살 때였다. 프로야구가 막 창단되고 MBC 역사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에서 엄마를 닮은 이미숙이 여우 짓을 하면서 강석우 손가락을 물던 시절이다. 어린 엄마는 나를 데리고 밖에 나갈 때면 이모라고 부르라 했다. - 왜? - 재밌잖아. 내가 이모, 이모, 부르면 시장 아줌마들이 어머, 조카가 귀엽네요, 하면서 사심 없이 뺨을 꼬집어주었다. 그래서 엄마는 상가에 가면 이국적인 물건들이 잔뜩 쌓인 수입품점 구경하기를 즐기는 발랄한 이모가 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이모는 길 건너 에서 소보루나 팥빵을, 그보다 기분이 더 좋으면 찹쌀 도나쓰를 사주었다. 겉은 바삭하고 씹으면 쫀득쫀득한 찹쌀 ..

지난 글/tender 2012.01.20

2011 아시아 시 페스티벌 발제문) 아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인류는 이제 단일재배를 개시하려 하고 있다. 인류는 마치 사탕무를 재배해내듯 문명을 대량생산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인류의 식탁에는 오직 그 요리뿐이리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힘의 탐구」, 슬픈 열대 아시아 시 교류 심포지움의 발제문을 청탁받은 후 저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권역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중동 아시아와 서남 아시아, 중앙 아시아, 동남 아시아, 동북 아시아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는 건너뛸 수 없을 만큼 넓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륙 개념으로 생각하자니 유럽과 아시아가 어디에서 나누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시아’라는 말은 대충 ‘비(非)서구’를 가리키는 말이 ..

지난 글/hard 2011.12.22

무(無)의 두드러기에 대한 명상

처음 시를 썼던 때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것은 1987년 6월의 어느 날이었고,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작은 치자 화분에 깔린 이끼 위를 기어다니던 민달팽이를 꼼짝없이 한 시간쯤 들여다본 후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 단순한 생물은 그토록 느린 속도로 젖은 이끼 위를 돌아다니며 화분을 빠져나갈 생각 같은 것은 하고 있지 않았다. 집이 없구나, 너도. 이렇게 혼자인데 말이지. 연무가 깔린 뿌연 대기는 온화하고, 오후 네 시의 햇빛은 알맞게 익어 평온이랄지 나른함이랄지 느리게 유동하는 어떤 집중된 정서가 나를 일종의 명상 상태로 몰아넣었다. 어린아이들이 종종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이때를 생각한다. 그럴 때 아이들은 온몸으로 명상 중이다. 살갗에 열려 있는 ..

지난 글/tender 2011.12.15

저 가늘게 뜬 눈의 황홀

잘 익은 살구 알처럼 눈높이에 떠 있었던 저물녘의 태양은, 터뜨리면 흘러나올 듯한 무게감을 늘어뜨리며 천천히 마천루 뒤로 사라져갔다. 그 광경을 함께 보면서,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석양을 본 지 만 33년 하고도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내 눈꺼풀 속에서 보고 있는 이것은, 2년 하고도 절반이 지난, 마지막 석양의 꿈. 오래된 어제의 석양이지만, 어제의 석양도, 내일의 석양도, 내게는 매양 오늘의 석양만 같다. 해가 나지 않는 흐린 날이나 지난여름처럼 내내 비가 퍼붓던 계절에도, 어제의 석양이나, 내일의 석양이나, 내게는 매양 오늘의 석양만 같아서, 두 눈 속 저녁의 노을빛은 어떤 떠남을 암시한다. 떠남의 가장 떠남다운, 모든 떠남의 궁극적인 떠남을. 처음 석양..

지난 글/tender 2011.10.12

유토피아에서 아나키로

기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시인에게 시 쓰기 자체가 실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개성이 다양한 만큼 실천의 모습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 이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를 여러 평론가와 시인의 시각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기획의도에 대한 나의 해석이 이 글의 성격을 규정지을 것이었다. 1. ‘실천’은 무슨 뜻인가? 2. 1.의 의미와 관련하여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2의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성립 가능한 구문이라면, 그것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은 가능한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라는 의문은 타당한..

지난 글/hard 2011.09.16

서평) 고등어 소년은 어떻게 리틀보이가 되었는가

조인호 시집, 방독면(문학동네, 2011) 아이는 무서웠다. 첫 번째 무서움은 어머니로부터. “만삭의 어머니가 생선을 굽던 비릿한 어느 저녁, 프라이팬 밖으로 튕겨오르던 기름방울처럼 지글지글 나는 태어났지 아기야,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어머니는 나무 도마에 흥건히 젖은 피를 닦으며 말하셨지 그날 이후로 나는 똑똑한 생선 한 마리”(「고등어 나르시시즘」). 고등어가 된 아이는 어머니와 유치원 선생님과 친구들과 첫사랑으로부터 조롱당하고 명령 받고 버림받고, “물 좋은 직장 하나 만나지 못하고 퀭한 생선 눈깔을 지닌 실업자”가 되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랩으로 포장된 고등어 한 마리로 태어나” “얘야, 어머니 같은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여전히 같은 말만 하”..

지난 글/review 2011.09.08

세계를 늘릴 것인가, '나'를 늘일 것인가

아메바(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최승호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증식하는 유령들; 최승호, 아메바(문학동네, 2011) 등단 이후 꾸준히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최승호의 이번 시집은 자기 자신의 말들로부터 뻗어나간 실뿌리 같은 상상의 편린들을 그 원천들과 함께 수록하고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인터뷰들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충분한 기획 의도를 가지고 수행된 것으로, 이번 시집의 출간이 시인 자신에게는 등단 이후 30여 년간의 자신의 詩作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것을 ‘실험’이며 ‘일종의 문체연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연습은 ‘완성된 한 편의 시’라는 관념을 잠시 괄호 속에 넣고 ..

지난 글/review 2011.05.25

흑백의 밤 녹색의 불면증

 아마도아프리카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제니 (창비, 2010년) 상세보기 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시가 너무 명백할까봐 걱정하고, 또 너무 모호할까봐 걱정한다. 어떻게 하면 잘 숨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머리카락이 보이게 숨을 수 있을까. 어떤 시인들은 시가 재현하려는 대상의 전체가 지닌 뚜렷한 윤곽, 황금비율, 색채, 의미의 완전한 전달에 골몰하고, 또 어떤 시인들은 아직 드러난 적 없지만 (그래서 공상이나 망상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도 있을) 세계에 편재하는 ‘무엇’의 손가락, 휙 돌아서 막 달아나며 사라진 실루엣에 불과한 뒷모습, 바람에 흔들린 옷깃 같은 단서들(만)을 독자에게 인색하게 제공한다. 이 기술들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이제까지 제출된 모든 시론들을 다..

지난 글/review 2011.04.09

to Indimina

 론 울프* 씨의 혹한 론 울프 씨가 자기 자신을 걸어 나와 불 꺼진 쇼윈도 앞에 서자 처음 보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하나의 입김으로 곧 흩어질 것 같은 그의 영혼.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유일무이한 대기의 조각으로 이 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의 단벌 외투를 벗겨간 자들에게 그는 반환을 요구할 의사가 없다. 처음부터 외투는 그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겨울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친구가 셋 있었는데 하나는 시인, 하나는 철학자 그리고 자기 자신이었다. 그들은 자존심이라는 팬티만 걸치고 혹한을 견디려는 그의 무모한 결심을 존중해주었지만, 이 존중이 그의 저체온증을 막아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스테판에게 말했었다; 저 육각의 눈 결정이 아름답다면, 보이지 않는 내 영혼의 아름..

지난 글/시 2011.04.08

김영승 선배님,

공개된 지면에 편지를 쓰라는 분부를 받고 이 편지를 쓰기까지 저는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남들이 볼 걸 뻔히 알면서 쓰는 편지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까요. 그래서 마감 기한 최후통첩을 받고도 한참을 지나 선배님 단 한 분만 읽는다 치자 결심하고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선배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배님을 20년 전부터 압니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들어간 문예반 반실에 놓여있던 날적이에 추상같은 2학년 선배가 어여쁜 글씨로 적어놓았던 「반성641」을 읽고 나서, 저는 반실 책장에 꽂힌 선배님 시집을 들고 학교와 집을 오가며 참 불온한 말들을 낄낄거리며 열심히 읽었더랬습니다. 굴헝같이 습하고 어둡고 서늘해서 이상하게 아늑한 문예반실에서, 동기들과 겨울이면 곱은 손가락을 호호 불며 갱지..

지난 글/tender 2011.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