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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김영승 선배님,

공개된 지면에 편지를 쓰라는 분부를 받고 이 편지를 쓰기까지 저는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남들이 볼 걸 뻔히 알면서 쓰는 편지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까요. 그래서 마감 기한 최후통첩을 받고도 한참을 지나 선배님 단 한 분만 읽는다 치자 결심하고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선배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배님을 20년 전부터 압니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들어간 문예반 반실에 놓여있던 날적이에 추상같은 2학년 선배가 어여쁜 글씨로 적어놓았던 「반성641」을 읽고 나서, 저는 반실 책장에 꽂힌 선배님 시집을 들고 학교와 집을 오가며 참 불온한 말들을 낄낄거리며 열심히 읽었더랬습니다. 굴헝같이 습하고 어둡고 서늘해서 이상하게 아늑한 문예반실에서, 동기들과 겨울이면 곱은 손가락을 호호 불며 갱지로 만든 원고지에 문방구에서 산 싸구려 중국산 만년필로 교지에 실을 동창회장사, 교장 축사, 졸업생 대표 감사의 말 등을 수 십 년 전 교지까지 꺼내어 짜깁기를 하고, 시, 수필, 기행문, 독자 투고란까지 없는 이름을 만들어 채우던 시절이었습니다. 노는 날에도 이유 없이 창문으로 반실에 넘어 들어가 공연히 센치해져서 날적이에 멋져 보이는 말들을 적고 있으면, 교과서에 실린 죽은 시인들의 시는 왜 그리 낡아 있었던지요. 그러면 저는 또 문학청소년이 제도교육에 너무 열심을 내면 안 되지, 하고 밑도 끝도 없는 반항심을 불태우며 불온 불순한 동시대 청년들의 시를 꺼내어 머리에 불이 나도록 조숙한 척을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만날 대학 가라고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를 시키는 전국 방방곡곡의 합법적인 청소년 인권 탄압 기관에서 이런 고급한 취미 활동을 주로 하는 써클을 허용한 건 참으로 불가사의하고 신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꽃과 별과 바람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순하고 성실하게 야간 자율학습에 임할 거라 생각했나 봅니다. 덕분에 저는 20년 만에 선배님께 이렇게 체신머리 없는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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