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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亨度.◨奇形圖. 그것은 아무래도 추상어일 것이다. 짧은 생애를 가졌던 어떤 정신과 감각의 덩어리를 추상화하여 명사로 만든 것. 그것은 아무래도 예술사의 어느 시점에 새로 생긴 어떤 사조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그 사조에 스스로 속했다고 생각한 내성적인 사람들은 오랜 우울로 인한 무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주로 겨울날을 흑백의 배경 속에서 다루었으며 채도보다는 명암을 통해 음화를 그렸다. 따라서, 의도치 않게 대담한 그림을 생산해내는 경우가 있었다. 도시의 암울한 고독과 아직 중간관리자가 되지 못한 젊은 사무노동자의 실존적 불안, 가로수처럼 도시에 아주 약간 남은 자연물들의 위압적이거나 계시적인 침묵과, 주기가 긴 변용 속에서 불길한 징조를 자주 발견했으며, 오래 전에 자기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죽은 자신을 애도하..
벌레의 눈과 새의 눈 16세에 학교를 뛰쳐나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대영박물관에서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독특한 사상을 펼친 콜린 윌슨은 제도화된 학문분과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이른바 ‘B급 관심사’들을 진지한 학문적 주제와 더불어 고찰하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그는 인류의 범죄사를 서술한 『잔혹』이라는 책에서 줄리언 제인스의 ‘분리 뇌’에 관해 논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현생 인류의 대뇌는 우반구와 좌반구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 사이를 두툼한 뇌량이 연결하고 있다. 좌뇌는 언어와 논리적 사고를, 우뇌는 직감과 패턴의 인식을 담당한다. 간단히 말해 좌뇌는 과학자, 우뇌는 예술가이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의 오래된 우리의 선조는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 지극히 작거나 없어서 두 개의 뇌가 동시..
상한 마음의 분노 조리법: 안미옥 시집 『온』 죄를 더하는 친절 궁금해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징그럽고 다정한 인사 희고 희다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캔들」 전문. 안미옥의 시는 여러 번 꼼꼼한 퇴고를 거친 듯한 간결한 언어로 쓰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종의 애매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시의 전반적인 정서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진술들은 명확하고 화자는 자신의 끔찍함을 견디는 사람들,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지우는 사람들, 아..
기찻간 변사사건 관련 진술서(<사랑손님과 어머니> 이어쓰기) 박옥희의 외삼촌 천덕구의 진술서 나는 금년 열다섯 살 된 중학생 천덕구입니다. 나는 박옥희의 작은외삼촌이고 천명희의 남동생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집에서 멀쩡한 것은 나뿐이지 싶습니다. 다른 순사분이 옥희의 진술서를 읽어주셨습니다. 아주 순진하게 썼더군요, 마는 고 앙큼한 것은 눈치가 백단이란 말입니다. 옥희는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요. 물론 어린 계집애 말을 다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저를 왜 부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뭘 속이거나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는 바에 관해서는 모두 숨김없이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랑채서 지내던 그치가 왜 기찻간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랑 한 방을 썼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치가 누이랑 사랑놀음하느라 편지를 쓰네, 시를 쓰네, 등잔불 밑에서..
그 말은 움직일 수 없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위안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들도 가장 고결한 신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1930) * 작년 겨울, 계절 학기 수업 보고서에서 읽은 문장 몇 개가 잊히지 않는다. 광장에서는 한창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었고, 수업이 진행되던 중에 헌재에서는 탄핵 심판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3주 동안 평일 겨울 오후의 강의실에서 몇 권의 시집과 몇 편의 단편 소설, 또 몇 편의 에세이를 함께 읽었고, 이 세미나에 가까운 수업은 최근 몇 년 간의 사회적 사건들을 화제에 올리며 종종 격론의 장이 되기도 했다. 나는 나대로 내가 지나온 20대와는 완연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20대의 친구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홉스봄의 말대로 과..
굿모닝, 수북 씨 어? 수국이 수북수북 피었네? 라고 한 것은 남편의 말. 농업 시험장에서 일하시면서 온갖 종류의 식물을 키우셨다는 할아버지 때문인지,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하나 빠짐없이 모두 식물 키우기를 좋아했는데, 친정에서는 아버지가 35년 전에 대리인지 차장인지 승진하실 때 동료들이 가져온 군자란이 아직도 해마다 꽃을 피우고 함께 들어온 소철은 사람 키를 넘어간다. 분갈이도 안 해주는데 그 피우기 어렵다는 군자란 꽃이 어떻게 한 해도 안 빼먹고 피는지는 수수께끼. 언젠가 아버지가 베란다에 가득한 화분들에 너무 골몰하시는 걸 보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 아빠는 왜 말 없는 것들만 좋아해? 아버지는 슬픈 표정인지 서러운 표정인지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사람도 말을 못했으면 좋겠다. 그런 가족력 때문인지 동생도 식물을 키운..
출국장에서: 작란(作亂) 트리뷰트 도깨비장난 (...)작란(作亂)이라는 동인에 가담해서 장난을 치고 다닌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건 적법한 행위입니다. 왜 헌법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작란은 예전부터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 장난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었습니까? 다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잘 돌보겠습니다. 장난에도 수위가 있는 걸 모르십니까? 소꿉장난, 흙장난, 불장난, 도깨비장난…… 도깨비장난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밑줄을 그을 단어가 나온 것 같습니다.(...) -오은, 「청문회」(『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작란 말고는 동인을 모른다. 물론 문학사 책에 나오는 동인들과 동시대를 사는 다른 동인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의 이름, 그들에 속한 다른..
사후의 사후를 사는 냉담자의 멜랑콜리, 혹은 신성성의 재상상: 송승언의 시 돌의 감정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의 윤리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문득, ‘나는 돌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상상이야말로 가능한 상상과 불가능한 상상의 접점에 서는 첫 경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철학자는 근대 초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아직 매일 햇볕을 받으며 물속에 잠긴 돌 위를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강변을 산책하는 일에 익숙했고, 콘스탄틴주의와 유대교의 강력한 신 개념과 그 이름을 통한 현실적 지배 속에서 살았지만, 이상하게도 경전의 글자들에 얽매여 있지 않았던 듯 보이는 데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자기 민족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자기의 국가 종교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더욱 더 이상한 것은, 그가 지극히 종교적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는 범신론적이고도 유물론적으로 자연과 우리의 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