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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굿모닝, 수북 씨

orinto 2017.07.18 17:28


 

? 수국이 수북수북 피었네? 라고 한 것은 남편의 말.         


농업 시험장에서 일하시면서 온갖 종류의 식물을 키우셨다는 할아버지 때문인지,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하나 빠짐없이 모두 식물 키우기를 좋아했는데, 친정에서는 아버지가 35년 전에 대리인지 차장인지 승진하실 때 동료들이 가져온 군자란이 아직도 해마다 꽃을 피우고 함께 들어온 소철은 사람 키를 넘어간다. 분갈이도 안 해주는데 그 피우기 어렵다는 군자란 꽃이 어떻게 한 해도 안 빼먹고 피는지는 수수께끼.

언젠가 아버지가 베란다에 가득한 화분들에 너무 골몰하시는 걸 보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 아빠는 왜 말 없는 것들만 좋아해? 아버지는 슬픈 표정인지 서러운 표정인지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사람도 말을 못했으면 좋겠다.

그런 가족력 때문인지 동생도 식물을 키운다. 내성적인 녀석은 가시가 많고 물이 없어도 잘 자라는 그런 종류의 식물을 좋아한다. 좋아하다 못해 심어서 팔고 있다. 그런 녀석이 2년 전 우리 집엔 파란 수국 화분을 하나 들고 왔다. 수국은 파랬고, 파랬다. 너무 파래서 자연에 저런 색이 가능한 것인가 의문일 정도로 파랬다. 그러더니 한 달쯤 후엔 초록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수국은 질 때가 되면 꽃이 이파리처럼 초록색이 된다고 했다.

작년에는 꽃을 피우지 못했다. 물을 좋아하는 식물이라 잊지 않고 물만 잘 주면 결코 죽을 리 없는 놈이지만, 뿌리파리의 공격도 다른 화분들과 달리 의연하게 이겨냈지만, 그리고 잎도 줄기도 쑥쑥 자라 깻잎 텃밭 같이 무성해져서 큰 분으로 갈았지만, 아무튼 꽃은 피우지 못했다.

올 초봄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수국을 비롯해 다른 열댓 개의 화분이 봄여름이면 뿌리파리의 공격을 받고, 결혼 선물로 받은 호접란은 화원에서부터 따라온 달팽이에게 뿌리가 먹혀 죽고, 화랑곡나방이 스파티필름과 테이블야자와 안시리움 화분에서 부화하기 일쑤였으므로, 단기 처방인 농약 살포를 포기하고 자연 처방을 쓰기로 한 것이다. 님 오일과 천연 세제와 쌀뜨물을 섞어 특식을 만들어줬다. 벌레들이 다 사라졌다. 3년 전 스승의 날에 내 강의를 듣던 한 학생이 준 편의점 출신 카네이션 줄기가 갑자기 빵빵해지고, 26년 글벗이 집들이 선물로 준 스투키 화분에 실수로 씨앗이 섞여 무임승차 중이던 사랑초에서 꽃이 무더기로 피기 시작하더니, 수국과 카네이션과 3년 간 꽃이 피지 않은 남천에 꽃봉오리가 대롱대롱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식이 알칼리성이라서인지 파란 수국은 붉은 수국으로 피었다. 하지만 파란 수국이든 붉은 수국이든 필 때는 흰 빛을 띤다. 수북하니, 한 송이가 통째로 여럿이다. 여럿이 희다가, 여럿이 붉다가, 여럿이 푸르고, 여럿이 초록이 된다. 이것은 빛깔의 협동조합. 화분을 하루에 서너 시간씩 바라보며 어제와 달라진 것들을 발견하고 희열에 찰 때는 아버지를 이해할 것 같다가, 이해한다고 믿다가, 아냐, 그래도 사람은 역시 말을 좀 할 줄 알아야지, 속엣말을 중얼거리다가, 화분마다 어른거리는 얼굴들과 인사를 한다. 굿모닝, 하나인데 여럿인 수북 씨, 오늘 기분은 어때? 아직도 붉어?

(릿터 6호)


 

 

댓글
  • 프로필사진 9 이 오두막의 주인이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밝혀 두시진 않으셨(그래서 이렇게 개인적인 공간에 불쑥 들어와 문을 탕탕 두드리는 것이 너무 큰 실례일까봐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여차저차해서 몇 편을 찾아 읽었습니다. 떠도는 별과 사물 그 쓸쓸함에 대하여 가 좋았어요.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속속들이 읽고 싶어서 주문을 했는데, 시집은 월요일이나 되어야 도착할 것 같습니다. 더 잘 쓰기 위해서는 더 잘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남겨 두신 단상이나 리뷰들을 보며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훔쳐 배우고 있습니다.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나 허연의 내가 원하는 천사는 원래 갖고 있던 시집이라 오랜만에 다시 꺼냈습니다. 리뷰와 원문을 번갈아 읽으며 새로 깨닫는 부분이 있었어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니까 분명 읽었던 시집이었는데도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지금껏 제가 직관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어쩌면 아주 오래 생각해야 하(게 만드)는 시, 배경지식이 필요한 시는 읽어낼 능력이 부족한 까닭에 그저 취향에 안 맞는다는 핑계로 배척해 왔던 것은 아니었나 문득 되돌아봅니다. 왜 이마에 작은 총알구멍이 달렸는지, 이데아도 질료도 없는 어딘가에서 들리는 고동 소리는 무엇인지, 왜 신은 벙어리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덕분에 저는 즐거운 고통 속에서 내일도 새벽잠을 설치게 되겠군요.

    동굴을 더 편하게 여긴다고 하셨는데, 제가 흙발로 마구 들어와 버린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혹 어느 정도 폐쇄적인 공간으로 유지하기를 원하신다면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는 댓글을 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2018.04.06 07:05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orintorinco.tistory.com BlogIcon orinto 너무나 늦게 다는 댓글이네요. 포스팅이 시작되면 온전히 사적인 공간이 될 수 없지요. 그러니 '사적인 블로그'는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요. 아무튼 여기서 재미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2018.06.19 17: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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