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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굿모닝, 수북 씨


 

? 수국이 수북수북 피었네? 라고 한 것은 남편의 말.         


농업 시험장에서 일하시면서 온갖 종류의 식물을 키우셨다는 할아버지 때문인지,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하나 빠짐없이 모두 식물 키우기를 좋아했는데, 친정에서는 아버지가 35년 전에 대리인지 차장인지 승진하실 때 동료들이 가져온 군자란이 아직도 해마다 꽃을 피우고 함께 들어온 소철은 사람 키를 넘어간다. 분갈이도 안 해주는데 그 피우기 어렵다는 군자란 꽃이 어떻게 한 해도 안 빼먹고 피는지는 수수께끼.

언젠가 아버지가 베란다에 가득한 화분들에 너무 골몰하시는 걸 보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 아빠는 왜 말 없는 것들만 좋아해? 아버지는 슬픈 표정인지 서러운 표정인지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사람도 말을 못했으면 좋겠다.

그런 가족력 때문인지 동생도 식물을 키운다. 내성적인 녀석은 가시가 많고 물이 없어도 잘 자라는 그런 종류의 식물을 좋아한다. 좋아하다 못해 심어서 팔고 있다. 그런 녀석이 2년 전 우리 집엔 파란 수국 화분을 하나 들고 왔다. 수국은 파랬고, 파랬다. 너무 파래서 자연에 저런 색이 가능한 것인가 의문일 정도로 파랬다. 그러더니 한 달쯤 후엔 초록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수국은 질 때가 되면 꽃이 이파리처럼 초록색이 된다고 했다.

작년에는 꽃을 피우지 못했다. 물을 좋아하는 식물이라 잊지 않고 물만 잘 주면 결코 죽을 리 없는 놈이지만, 뿌리파리의 공격도 다른 화분들과 달리 의연하게 이겨냈지만, 그리고 잎도 줄기도 쑥쑥 자라 깻잎 텃밭 같이 무성해져서 큰 분으로 갈았지만, 아무튼 꽃은 피우지 못했다.

올 초봄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수국을 비롯해 다른 열댓 개의 화분이 봄여름이면 뿌리파리의 공격을 받고, 결혼 선물로 받은 호접란은 화원에서부터 따라온 달팽이에게 뿌리가 먹혀 죽고, 화랑곡나방이 스파티필름과 테이블야자와 안시리움 화분에서 부화하기 일쑤였으므로, 단기 처방인 농약 살포를 포기하고 자연 처방을 쓰기로 한 것이다. 님 오일과 천연 세제와 쌀뜨물을 섞어 특식을 만들어줬다. 벌레들이 다 사라졌다. 3년 전 스승의 날에 내 강의를 듣던 한 학생이 준 편의점 출신 카네이션 줄기가 갑자기 빵빵해지고, 26년 글벗이 집들이 선물로 준 스투키 화분에 실수로 씨앗이 섞여 무임승차 중이던 사랑초에서 꽃이 무더기로 피기 시작하더니, 수국과 카네이션과 3년 간 꽃이 피지 않은 남천에 꽃봉오리가 대롱대롱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식이 알칼리성이라서인지 파란 수국은 붉은 수국으로 피었다. 하지만 파란 수국이든 붉은 수국이든 필 때는 흰 빛을 띤다. 수북하니, 한 송이가 통째로 여럿이다. 여럿이 희다가, 여럿이 붉다가, 여럿이 푸르고, 여럿이 초록이 된다. 이것은 빛깔의 협동조합. 화분을 하루에 서너 시간씩 바라보며 어제와 달라진 것들을 발견하고 희열에 찰 때는 아버지를 이해할 것 같다가, 이해한다고 믿다가, 아냐, 그래도 사람은 역시 말을 좀 할 줄 알아야지, 속엣말을 중얼거리다가, 화분마다 어른거리는 얼굴들과 인사를 한다. 굿모닝, 하나인데 여럿인 수북 씨, 오늘 기분은 어때? 아직도 붉어?

(릿터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