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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출국장에서: 작란(作亂) 트리뷰트

도깨비장난

 

(...)작란(作亂)이라는 동인에 가담해서 장난을 치고 다닌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건 적법한 행위입니다. 왜 헌법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작란은 예전부터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 장난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었습니까? 다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잘 돌보겠습니다. 장난에도 수위가 있는 걸 모르십니까? 소꿉장난, 흙장난, 불장난, 도깨비장난…… 도깨비장난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밑줄을 그을 단어가 나온 것 같습니다.(...)

-오은, 청문회(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작란 말고는 동인을 모른다. 물론 문학사 책에 나오는 동인들과 동시대를 사는 다른 동인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의 이름, 그들에 속한 다른 문학 동료들의 몇 몇 이름을 알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들의 글을 지면에서 마주치고 사랑하기도 하지만, 다른 동인들에 관해 정말로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글의 청탁을 받았을 때, 나를 난감하게 한 것은 그 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동인은 내 동인뿐이라는 사실, 그래서 동인 일반에 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가령 문학사적 의의를 서술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다는 저항감왜냐하면, 이 지면 기획의 배면에 공동체가 있으며 공동체라는 어휘에 드리워져 있는 어떤 향수(목적론적이거나 성과 지향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친밀이나 취향 공유의 감각, 그러나 폐쇄와 배제의 동시적 가능성 속에 놓여 있는, ‘쉽볼렛을 요구하게 되고야 마는, 따라서 의문에 부칠 수 없는 마지노선을 가진 그 공동체에 대한 학습된 향수)에 대한 양가감정, 가령, 지난 해 가을 어느 계간지 지면에서 읽은 아테네움에 관한 글에서 정신성의 통일이 환기시킨, 지난 세기까지 존속했던 어떤 낭만적 이상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열망의 기억과 그에 대한 내 내부의 즉각적인 주저함을 어떤 식으로든 명료화해야 한다는 부담이 나를 짓눌렀으므로이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의 작란에 대한 앎은 내 동인들 각자의 작란에 대한 앎과 얼마나 비슷한 것일까? 나는 내 동인들 중에서도 내 동인들에 대해 가장 무지한 사람이 아닐까? 나는 들판보다 동굴이 편안한 사람이므로. (SNS조차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런 질문까지 겹치자, 심지어 내가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가볍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작란의 탄생에 관해. 그 끝나지 않는 탄생에 관해. (영리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문학사적인 목적이 없어서 완료도 없으므로.) 같은 게 하나도 없었던 4인 동인 시절의 좌충우돌에 관해. 하도 동일한 게 없어 혈액형이 같다는 사실에 탄성을 질렀던 주차장 골목에서의 첫 모임에 관해. 한 번으로 끝난 독서 토론에 관해(내가 선택했던 이 독서 토론의 텍스트는 카진스키의 선언문이었고,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나는 우리들의 호감 사이에 분열증적인 테러리스트의 고독하지만 일리 있는 사회적 의의를 불어넣고자 하는 흑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것은 작란에 대한 배반이었다.). 시집 원고를 돌려 읽고 누구도 비판하지 않았던 여린 마음들에 관해. 아무것도 계획된 것 없었던 여행들에 관해. 식도락에 관해. 지면에서 마주치는 동인들의 시어 하나하나를 보듬었던 우리의 자랑에 관해. 함께 했던 낭독들과, 실행이 무한히 유예되고 있는 동인지에 관해. 거의 얼굴이 없는 우리 중 하나에 관해. 이런 따뜻하고 유쾌했던 추억들을 가로질러, 그러나, 어떤 사유가 나를 강제한다. 마치 내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쓰라는 강제. 내가 우리에 속해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쓰라는 강제. 그러니까 내가 유일하게 모르지 않는 동인에 관해. 동시에 동인으로서. 내부의 외부로서. 외부의 내부로서.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에 존재하기 시작할 때 그러했듯이, 우연히 시작되었다.

물론, 최초에 말을 건넨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도 그다지 확신에 차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첫 인상은 그랬다. 그는 몹시 긴장해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 와 생각하면 어차피 확신이 문제되는 것도 아니었다.) 7년 전 그 카페에 핸드폰을 충전하러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작란이 아니었을 것이다. 작란도 아마 작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이름은 내가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날은 추웠고, 나는 합정동에서 약속이 있었고, 그보다 며칠 전, 동인을 하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는데,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았던 나는 이 들의 견해를 다 수용할 수 없어 합류를 완곡히 거절한 터였다. 나는 들의 연합체야. 연방도 아니고 연합체다. 이 연합을 챙기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뭘 도모할 수 있겠어? 논문을 써야 한다고 핑계를 댔지만 실제 내 마음은 그런 것이었다. 만남에의 결의는 내게 그토록 무거운 것이었다. 그런데 추워서 들어간 아무 카페에 이 친구들이 앉아 있었을 줄이야. ,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이리 와서 앉아요.

그때 나는 마치 알고나 온 것처럼 옆 탁자에서 의자를 끌어다 앉고 천연덕스럽게 동인이 되었다. 당시를 생각하면 영화 <엑스페리멘트>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죄수 실험 모집에 응모한 전직 택시기사에게 참여 동기를 묻자 그가 대답한다; 사고가 나서 택시가 박살났는데 마침 실험 참가자 모집 광고를 보게 되었어요. 운명이라고 생각했죠. (이 영화의 나머지 장면들과는 연관 짓지 말기로 하자. 무서운 영화다.) 나는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때 거기에 있게 되다니. 그런 것을 우연이라고 한다면, 운명은 우연에 붙이는 사후적인 이름일 테니까.

그러니까, 마침 거기에 있었다는 것은 연속된 사건을 전제로 한다. 사고가 난다. 그리고 하필 모집 광고를 보게 된다. 나라가 개판이 된다. 헤매다가 하필 광장에 오니 하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추운 날 핸드폰이 방전된다. 그리고 하필 들어가게 된 카페에 이 친구들이 있다. 나는 나대신 이 결정을 내려준 셈인, 이러한 우연과 벗들(그때는 아직 호의적인 타인들)에게 경의의 감정을 가졌다. ‘들의 연합체로서의 나는, 글 쓸 때 무의식적으로 우리라는 주어를 사용하는 나는, 종종 그 들의 견해 차이와 지향과 방법상의 격론을, 나를 뛰어넘는 어떤 절대로서의 우연적인 조건들로서가 아니면 끝장내기 꾀까다로운 순간들을 자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완곡한 거절의 뉘앙스는 들의 연합체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었고, 아무 결정도 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깊은 밤, 여러 개의 가로등 사이에 있을 때 그림자가 많아지는 것처럼 피곤한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모순적이고 강력한 견해들 가운데 있다는 뜻이었다. 모인다는 것, 함께 있음이 시작되자 조도가 낮은 몇 개의 불빛이 사라진다. 모임은 그런 것이다. 모임은 지나치게 민주적이어서 격론이 끝나지 않는 들의 연합체로서의 -우리로부터 어떤 (잠정적인) 결정()을 이끌어낸다. 모임에 의해서야, 그 즉흥성에 의해서야, 비로소 복수 1인칭이었던 내가 하나의 경향으로, 단수로 표현된다. 그렇게 된 것을 발견한다. 이미 어떤 동질성을 전제로 친해진 친구 집단과 다르게 연쇄적인 말 건넴을 통해 이루어진 동인은 우리가 서로에게 거의 완전히 낯선 사람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가능한 어떤 종류의 조율된 즉흥성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우리는 서로의 시를 읽고 있었다. 약간 과장하자면 거의 순전히 우리의 시만이, 서로에게 알려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시가 우리의 명함이고 프로필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그 최초의 연쇄적인 말 건넴은, 유희경의 시가 오은의 시와 의기투합하고, 그들의 시가 정한아의 시에게, 서효인의 시에게 공명의 용의를 제안한 것이었다. (몇 년 뒤, 우리는 전혀 비장할 것 없는 흔쾌한 만장일치를 거쳐 송승언, 김소형, 최예슬의 시 들에도 이 같은 용의를 제안한다.) 혈액형 말고도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막 알게 된다. (물론 7인 동인이 되면 혈액형의 공통점조차 사라지고 오롯이 이것만 남는다.) 그것은 우리의 명함이고 프로필 사진이었던 우리의 시가, 또한 우리의 장기(臟器)였다는 사실이다. 오은의 드러난 장기에 밑줄을 긋고 사전을 찾아본다.

 

도깨비장난: 1. 도깨비가 사람을 홀리려고 하는 못된 장난.

                2.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거나 터무니없는 짓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아이러니다. 능청맞은 도깨비 녀석, 또 사전에서 재밌는 말을 찾아냈구나. 우연 중의 우연, 시나브로 운명처럼 여겨지게 되는 도깨비장난 같은 불쑥 돌출한 우연은 출국장(지금은 없어진 카페 Departure Lounge)에서 터무니도 연고도 없이 건네진 말과 함께 어떤 물렁한 경계를 열어준다. 목적지는 분명하지 않다.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우리는 같은 출국장에 있고 아마 같은 비행기를 탈지도, 안 탈지도 모른다. 시작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전략)

그리고 나, 두더지

나의 진실은 거짓말이에요. 당신께 진실해지는 순간 나는 거짓이 되어버리죠. 나의 엄마 거짓말여왕은 내가 왕국에서 가장 진지한 서기관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달라요 나는 왕국에서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시인입니다.

 

 

백성들을 죽이고 왕국에 홀로 남은 거짓말여왕

너무 심심한 나머지 거짓말 놀이를 시작했다

자신은 여왕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여왕이 아니라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또 거짓말을 낳고……

결국 자신이 여왕인지 아닌지 헷갈려 광기에 사로잡혀

영원히 비밀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기록하고 있는 나,

그러니까 나는…… 누구일까

(후략)

-최예슬, 비밀의 왕국, <문학동네> 2011년 가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에 기꺼이 동의한다는 것. 몇 차례 모여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고 함께 음악을 듣고 비슷한 것과 다른 것을 확인하거나 뒤섞고 몇 차례의 투표를 거쳐 이름을 결정하고 나자 가끔 보는 문인 동료들은 동인 이름이 뭐냐, 거기엔 누구누구가 있냐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작란(作亂)’입니다. 김수영의 시에서 따왔지요. 누구누구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답을 들은 이들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묻곤 했다. 작란? 장난해? 거기에 네가 왜 있냐?

거기작란이라는 출국장. 어딘가로 가지는 않고 그저 라운지에 모여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 모임이 곧바로 어떤 장소성으로 대체되어 이해된다는 것은 우리가 관계를 공간으로 대체해서 생각해버릇 한다는 뜻일까.

시작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 재미있을 거야,로 시작한다는 것. 어떤 과업을 부여함으로써 비장해지거나 지나치게 방만해지지 않는다는 것. 어떤 적정선. 과도함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기. 따라서 일종의 중용. 그 세심함이 우리를 계속 우리로 있게 해온 듯하다. 어쩌면 이건 너무 의지적인 서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적어도 나)는 이 의지들 속에 어떤 태업의 기미들이 부역했다는 점을 적시해야겠다. 무위의 공동체에서 무위(無爲)’로 번역된 것을 조금 중화시켜본다면, 말이다. (나는 지금, 작란을, 내가 모르지 않는 유일한 동인을, 가능한 어떤 모임공동체라는 단어의 부담을 애써 피하면서의 한 사례로 탐구하는 마음으로 될 수 있으면 세밀하게 서술하려 하고 있다.)

5년 전쯤 나는 시와 정치 논쟁의 경과를 되짚으면서, 리처드 로티의 메타포를 빌려 숭엄의 열광에 사로잡힌 무한한 운동, 유한성을 끌어안은 사람들이 한정된 작은 성과들을 위해 개최하는 시기적절한 캠페인들을 대비시켜 우리가 점점 더 예술의 미학적인 측면들을 외면하기 싫어하는 방향으로 이동해왔다고, 본질론적인 운동의 강박적인 그림자가 아직 드리워져 있기는 하지만, 이 강박의 실천적 재현의 제한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우리 자신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보다 역사적인 시각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는 페미라이터에 대한 지지를 선택하게 되거나 출판사 편집자와 서점 운영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거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명령이고, 명령의 최종 심급인 화급함 자체를 선택할 수는 없다. 화급해져라!’라고 명령할 수 없다. 그 화급함의 발효(發效)는 근본적으로 도덕의 영역이다.) 그러나, 덧붙이자면 그 같은 유한성의 체화를 통한 욕심 없는 미학적 재현은 지난 세기 심미적 실존주의의 광범위한 파장 안에 있었던 단지 미학적이기만 하고자 했던허무한 제스처와는 절연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단지 미학적이기만 하고자 함은 정치적이고 도덕(혹은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용법에 따라 윤리)적인 것을 반대편에 두고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만 가능한, 기본적으로 타율적인 태도이다. 죽은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막 사는 아들의 모습을 빼닮은 그 같은 태도는 너무나 아버지-중심적이어서 쓴웃음을 자아내는데, 자기 자신만 빼고 온 세계가 그것을 눈치 채고 있다는 사실을 그 자신은 나르시시즘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다. 조율 없는 즉흥성은 폭력적이고 즉흥성을 전연 배제해버린 조율은 규율 강박적이다. 어느 쪽이든, 자기에 대한 앎의 결핍맹목에 빠진다. 재미있을 거야,라는 예감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한다는 것, 너무 심오한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심오한 내용의 지나치게 심오한 표정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의 우연한 공통성이 아니라, 아니 그것이 우연한 공통성이라 할지라도, 그 공통성이 구성된 조건은 이 시대, 언제나 시간 속에 있어서 숙고할 지난 시간을 골라내고 있는 이 시대의 특질로부터 비롯된 것일 터이다. 각자의 최대한의 즉흥성을 최대한 조율하려는 거듭되는 노력.

 

(전략)

전쟁을 종결하고 농사를 지을 것

토지를 개간하고 이념은 폐기할 것

 

아니, 썩어 빠진 자산(資産)부터 폐기하라

광장으로 끌려 나가 히브리어로 속삭이는 빨간 머리 앤을 화염 속에 던졌는데

시인과 성직자는 불구덩이 속으로 자기 몸뚱이를 던진다

엄마가 베이커리에 다녀온 사이 전쟁에 가담한 마을 청년들이 색출되고

이럴 때 엄마 말처럼 요리라도 배웠으면

투표소에 가지 않아도 덜 심심할 텐데

발코니에 걸린 장식품을 떼어내고 당나귀 가죽을 손질하며

캄차카에서 모스크바로 달려오는 삼촌, 삼촌을 기다린다

오늘따라 가짜 사회주의자가 버겁다

(아빠는 원래부터 없었다)

(후략)

-최예슬, 꽃밭에서, <문장웹진> 20121월호.

 

삼촌, 우리에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공동체를 선사할 삼촌은 올까? 온다. 안 온다. 온다. 안 온다. 캄차카에서 모스크바로 달려오는 진정한 인민의 벗”, 삼촌을 기다리는 이 긴 시의 마지막 행은 다음과 같다. “빌어먹을 삼촌은 아직도 기차에서 뛰어내리지 못했나 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기다리던 삼촌이 (전향한) 우리 자신이었다는 것을 언젠가 구부러진 시간 속에서 확인할지도 모르지. <인터스텔라>에서 자기 자신이 외계인이었음을 확인하게 된 먼 미래의 주인공처럼. 체념이 아니다. 삼촌의 존재가 실체적이든 신화적이든 수행적이든, 우리는 그를 기다려본 적 있고, 충분히 오래 기다렸고, 그가 만일 온다고 해도 이제 그를 메시아처럼 맹목적으로 환호하지 않을 것을 안다. 그 삼촌이 진짜 사회주의자이든, ‘진짜 미학주의자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아니, 오히려 삼촌은 수정되어야 한다. 삼촌은 이모나 조카, 사돈의 팔촌으로 수정될 수도 있어야 한다. 그가 반드시 올 것이라서가 아니라, 기다림이 우리 있음의 형식이기 때문에.

 

 

터무니의 역행/카논거기에 네가 왜 있냐는 질문에 대하여

 

머무른 채 떠나지 않던 더위를 피해 옥상에 올랐을 때 우리는 그 밤의 피해자처럼 굴었지 구석에 숨어 울음을 흉내 내던 사람은 분명 너였고 낄낄대며 웃었던 것은 나였고 그제야 가을이 찾아왔는데 생각해보면 가을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을을 찾아간 것이었지만 노랗고 빨갛게 번진 우리는 버릇처럼 말했다 이 잔만 비우고 일어나자 그 잔 속에 가득 찬 것이 기름 같은 우리의 수치여도

-유희경, 그해 여름(당신의 자리 나무로 자라는 방법, 대림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 당구장, 2013)

 

인민의 벗인 삼촌보다 먼저, 사돈의 팔촌보다 먼저, 우선, ‘우리가 나에게 도래한다. 다행이다. 나는 이 터무니없는 우연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구원을 경험해왔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작지만 유의미한 구원의 안도감은 조율된 즉흥성에 둘러싸여 드러나는 각자의 무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각자의 다름은 모임그것은 몸들이 한 자리에 있는 물리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초의 말 건넴에 호응한 이후 이 모임은 비가시적으로도 계속된다. 설사 동인 모임에 거의 나오지 않는 얼굴 없는 동인이라 할지라도을 통해 비로소 진짜 드러나게 된다. 이 다름은 같이 있음을 전제해서만 다름이다. 혼자서는 아무도 독창적일 수 없다. 혼자 있는 자에게 죽음오롯이 자기 자신의 것인 죽음이 도래하지 않는 것처럼. 혼자 있는 자에게는 삶과, 그 삶의 끝장만이 있기 때문에.

영향에 대한 불안과 즐거움이 동시에 우리를 감싼다. 그것은 때로 감정적인 갈등처럼 보이기도 하고, 미학관의 차이처럼 보이기도 하며, 도덕적이거나 인식론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싸움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랑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령, 우리 중 한 사람은 카논을 쓰고,

 

영원을 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

말씀하셨지요

수업은 끝났습니다

 

어제 당신이 쬔 햇볕이 이제야 내게 쏟아집니다

 

당신이 숲 속으로 사라지면 수업은 시작됩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당신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늘 사이로 나무 그늘이 끼어드는 책상에 앉아

나무의 속을 생각했어요

상처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총보에 대해 말입니다

(후략)

-송승언, 카논, 철과 오크, 문학과지성사, 2015.

 

우리 중 또 다른 한 사람은 역행 카논을 쓰며,

 

(전략)

나의 종말은 너의 시작 / 너의 시작은 나의 종말

 

입에서 자라는 나무들

 

빛은 그의 얼굴을 모르고 / 그는 빛의 얼굴을 모르고

 

누가 종말일까? / 누가 시작일까?

 

(순서는 상관없을걸)

-김소형, 역행 카논, 『ㅅㅜㅍ』, 문학과지성사, 2015.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시와 자기 자신의 관계를, 낯설어진 감정과 정서의 표현의 물질성으로서의 시어들과 그것을 생산한 우리 각자의 소외를, 그리고 이 소외들 사이의 관계를, 이 생산물들의 담지자들로서 발산되는 인력과 척력을, 동시에 그 사이의 부인할 수 없는 상관성을 생각한다. 카논은 끝나지 않는다. 역행 카논도 마찬가지. 즉흥성만으로는 모자란다. 어떤 수학적인 균형이 찾아온다. ()가 아닌 고요가. 진행을 멈추지 않는 고요가. 같은 길을 지나는 시차 속의 다른 발걸음이. 반대편에서 오는 발걸음이. 점점 더 집요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모였다는 사실 만으로 우리 각자의 것이며 우리 공통의 것인, 기껍지 않은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도 있고(정현종), 신호도 있지만(황지우), 그것은 쉼과 가닿음에 대한 지나친 열망었을지도. 어느 누구도 침범당하고 싶지 않은 최소한의 사적 공간인 60cm의 거리는 상대의 눈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이 사실을 충분히 숙지하고 난 뒤에도 각자에게 고독하게 맡겨지는 나머지. 그것은 우리가 하필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지만, 어떤 시대가 하필이 아닐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무시할 수 없는 총체적 문제 상황의 중핵을 너무 고전적인 개념을 통해 이야기한다고 놀라지/놀리지 말자. 미학적이든, 정치적이든, 그보다 먼저, 분업이 있다는 사실. 우리는 지식생산자(무슨 지식을 어떻게?), 예술노동자(유희성이라는 중대한 본질을 일로 만든다고?)로 간주되지만, 시가 전업인 사람은 없다. 직업란을 채우고 싶지 않다. 직업란은 우리를 직종 아래에 놓아둔다. 플라톤의 유토피아마저 불편한 것은, 거기야말로 완벽한 분업화를 토대로 한 사회의 전범이기 때문이다. “캄차카에서 모스크바로 달려오는 삼촌을 예언함으로써 기다림과 분노를 창출한 마르크스가 준 아름다운 영감의 한 조각은 (지난 세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멸과 현실적 재현이 남긴 자취를 차치하고 말하건대) 여전히 우리가 직종 아래의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저 많은 산별노조는 성취가 아니냐는 질문이 귓가에 빗발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주의의 승리 이래 분업화되어 온 인간이 한 사람의 사냥꾼, 한 사람의 양치기, 한 사람의 어부, 혹은 한 사람의 비평가로 사는 것과 달리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밤에는 비평을 한다.”(마르크스·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옮김, 두래, 1989, 74쪽 이하.) 저자들 자신과 그의 충실한 후예들이 이 목가적인 언명에 서린 허황한 낭만주의를 비판했지만, 이 문장의 핵심은 그 정경의 목가성이 아니다. 그보다 오히려 우리가 한 사람의 출판 편집자, 한 사람의 서점 경영인, 한 사람의 취업 준비생, 한 사람의 학생, 한 사람의 주부, 한 사람의 강사로 사는 대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시인으로 사는 대신, 인간 일반의 잠재적 특질로서 시적 가능성을 지닌 인간,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 행위가 직종으로서 그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행위의 진짜 주어로서 자기 행위를 향유할 권리를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인간의 삶을 그렸다는 것이다. 저 문장은 문법으로 꿈을 현시한다. 인간은 직종을 지칭하는 중립적인 일반명사들로 치환되는 대신 동사 속에서 만끽한다. 자유로워진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만끽한다. 만끽을 꿈꾸게 한다. 저 문장을 썼을 때, 마르크스는, 혹은 엥겔스는 시적인 상태의 극치에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장기인 시를 무작위에 노출된 지면에 벌여놓고 있을 때 그것은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 원칙과 어긋난다. (시를 쓰거나 시 잡지를 펴내는 일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많은 시와 잡지들이 있다는 아이러니는 시가 근본적으로 시장에 반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생계에 실용적으로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점에서. 그럴 때 고료 정산은 상담사에게 지불하는 상담료처럼 거의 단지 상징적인 제스처다.--그러나 그 상징적인 제스처만으로도 상담사는 한 시간에 시 한 편 값을 번다.)

그러나 시는 자주 상품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시집의 표지 색깔이나, 출판사의 아우라나, 제목이 주는 이미지나, 시인에 대한 환상, 시가 거느리는 각자의 개성의 냄새를 단지 취향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그것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빵을 고를 때와 생각만큼 유의미한 차이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나란히 놓여있는 소보로빵, 단팥빵, ‘천연효모 참 부드러운 생크림 식빵’, ‘딸기듬뿍티라미스처럼) 시는 바로 옆 지면에 실려 있는 다른 시와 각축하는 경쟁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얼핏 보면 그게 그거인 것 같다. 사실, 생각하기를 멈춘 사람에게(그런 사람이 있을까? 생각보다 많다!) 세상만사는 다 그게 그거고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러나 세심하게 조율된 즉흥성으로서의 시그것은 본래도 그렇지만, 우리가 모이자 더욱, 터이면서 터무니(터의 흔적)가 된다. 당신이 읽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변용되기 시작한다. 당신이 읽어버렸다면, 돌이킬 수 없다. 거듭 읽는다면, 당신도 어느 날 갑자기 쓰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시적인 기분전환을 위해 사먹는 간식이나 새로 출시된 샤워젤과는 다르다. 당신은 어떤 질서에 들어선다. 질서의 원리들이 실험되는 곳에서 그 잠정적인 결과들의 효과가 된다. 터무니없이 생겨난 새빨간 거짓말이 분명히 있듯이’, 그것이 다른 있음을 증식하듯이, 터가 열리고 터무니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터의 무늬만이 유일하게 터가 있()음을 증명한다. 우리의 시가. 우리로 있()음을, 우리임을. 그러므로,

모임관계는 비정기적인 짜임 속에 녹아 있는 우리 각자의, 그러나 서로 상관없지 않을 불안과 수치의 흔적까지를 포함해서 계속되는 역행/카논이다. “이 잔만 비우고 일어나자는 말. 할 수만 있다면 무르고 싶은 그 잔 속에 가득 찬 것이 기름 같은 우리의 수치여도”. 터무니없는 계기들이 새겨내는 터의 무늬 속에서, 모든 우리속에서 우리는 잔을 나누고, 때로 수치의 잔을 비운다. 저 무뚝뚝한 청유형의 말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은 체념이 아니다. 반복되는 당분간의 해산(解散). 그 해산을 유예하는 마지막 인내를 이끌어내는 책임감. 끝나지 않는 모임의 시작. 동인(同人)의 동인(動因), 무늬는 자란다. 앞을 향해서도, 뒤를 향해서도, 게걸음으로도. 거기에 네가 왜 있냐는 물음. 거기에서 자라는 무늬가 바로 거기다. 그 무늬가 우리다. 우리가 우리를 움직이는 작인(作因)이다.

 

 

우리가 우리를

 

(...)여행이었지. 어디든 끝이 보이는 곳에 가닿고 싶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고 성질머리가 차가운 이곳의 산맥은 품고 있던 눈을 오래 참은 울음처럼 쏟아냈다. 높게 올라간다. 다시 내려온다.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멈춘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인가. 아냐 그건, 강릉이 보내는 안부였을 뿐. 파도가 거품을 내고 거품을 업은 파도가 다시 거품을 덮는다. 끝 속의 끝에서 다른 끝이 나타난다. 기와에 써내려간 적절한 소망들처럼 우리는 영원히 이루어져 갈 것이다. 강릉에서 빌었던 소원은 사실 모두 실패다. 울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 잘린 오징어처럼 손가락을 펴고, 강릉의 파도를 천천히 받아 적기 시작한다.

-서효인, 강릉(여수, 문학과지성사, 2017)

 

이렇게 쓰고 나자, 이상하게도 나는 조금 슬퍼지고 만다. 이 글이 tribute 앨범이 담고 있는 감정들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tribute’를 대체할 적절한 한국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나는 마치 미래에서 아주 멀어진 작란의 처음을 떠올리는 기분으로 이 글을 쓴다. 내 손은 모든 처음에 관해 쓴 미래의 회상처럼 애도와 존경의 공기를 반향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상처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총보”(송승언, 카논)이고, 모든 연애시가 담고 있는, “순서는 상관없을”(김소형, 역행 카논) 시간을 초월한 조사(弔辭)이고, 신 없는 세계에서 여전히 기도가 있어 다시 상상해내는 신비를 향해 있고, “(모르면 몰라도) 나를 닮아서 낯선 너희들, 피 같은, 피톨 같은”(오은, 흡혈성) 자기의 무늬에 대한 각자의 애증을 내 것과 겹쳐놓으며 생겨나는 사랑이고, 그건 어쩐지 몹시 부끄러운 일이어서 나는 내 부끄러움에 찬성하지 않는다”(유희경, 불행한 반응). ‘전직 파르티잔이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다는 짧은 문장 안의 내력처럼 애달프다. 우리가 시간의 형식이라는 것, 우리가 우리사이를 깜빡거리며 넘나들며 되어가는 것, 혼자이며 여럿인 우리가 물렁한 경계 속에서 만들어내는/만들어지는 무늬가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시작되었다는 것.

우리 중 하나는 우리는 영원히 이루어져 갈 것이다.”강릉에서 빌었던 소원은 사실 모두 실패다.” 사이에서 뜸을 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긴 침묵 끝에 다시 다음 문장을 썼을 것이다. “울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 잘린 오징어처럼 손가락을 펴고, 강릉의 파도를 천천히 받아 적기 시작한다.”

우리의 끝나지 않는 시작에 관한 이 시는 과거형으로 시작해서 현재형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미/아직 같은 출국장에 있고, 우리가 거기고, 아마 같은 비행기를 탈지도, 안 탈지도 모른다. 재미있을 거야, 우리 내장에서 우러나는 이유 없는 크고 작은 용기와 함께. 시작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 <쓺> 2017 상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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