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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모순에 대한 중단 없는 사랑을 위하여

나는 오랫동안 하이데거와 첼란을 둘러싼 몇 개의 장면들을 하나의 유비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내가 이 일화들에 흥미를 느낀 것은 제도적 절차를 통해 시인이나 평론가가 되기 전이었다. 그때 나는 하이데거와 첼란을, 시를 사랑하는 사람과 시를 쓰는 사람,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과 아름다운 사람, 이를테면 나보코프의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 혹은 토마스 만의 구스타프 아셴바흐와 폴란드 소년의 관계와 같이 생각했다. 롤리타는, 폴란드 소년은, 험버트와 아셴바흐를 얼마나 절망에 빠뜨렸나! 하이데거는 횔덜린과 릴케와 첼란을 읽을 때마다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 단지 시를 사랑할 뿐이라는 확인에 얼마나 비참했나! 얼마나 시인이 되고 싶었나! 시가 명명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철학사 전체를 자신의 신조어로 바꾸어 쓴 그 자신은 성서 속의 최초의 인간처럼 세계를 시 짓고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아셴바흐가 머리를 염색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화장을 해도, 여전히 폴란드 소년의 아름다움의 노예였듯이, 오히려 점점 추악해졌듯이, 하이데거가 아무리 신조어를 만들어도 그는 시인이 아니라 회색의 철학자였다.

이 관계들은 모두 대책 없는 짝사랑이었다. 험버트는, 아셴바흐는 그들이 사랑한 금지된 대상에 홀리고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 그들은 도망치지 말고, 죽지도 말고, 롤리타와 폴란드 소년이 늙는 것을 지켜봤어야 했다. 하이데거는, 첼란의 병과 첼란의 가족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했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시인의 고통을 대면했어야 했다.

1967, 하이데거는 수용소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던 첼란을 자신의 별장 토트나우베르크에 초대한다. 그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첼란은 이 별장의 방명록에 적힌 나치 수뇌부의 이름들을 읽으며 심란해지고 말았다.

 

아니카, 눈밝음 약초,

별모양이 위에 달린 우물에서

취하는 물 한 모금

 

산장에서

 

그 책 안에

- 어떤 이름들이 내 이름앞에

쓰였을까?-

그 책 안에 적어 넣는

한 사색가의

마음에 담긴

한 마디 말을

오늘, 듣기를

소망하는

 

숲의 초지, 고르지 않는,

여기, 저기 홀로 핀 오르키스,

조금 후, 차 안에서 두드러지는

서먹함,

 

우리를 태우고 가는 사람,

그는 그것을 함께 느끼네.

 

반쯤

가다만 늪지의

통나무 길

 

축축함

가득히.

--파울 첼란, 토트나우베르크(정명순 옮김, 독일언어문학17(2002.6)에서 인용.)

 

그들은, 만났지만, 고통스런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전해진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 미학의 시작이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 미학과 윤리의 숙명적인 동반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더 멀리 갔어야 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첼란을, 혹은 첼란의 시를 사랑했을 때, 그가 사랑한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 유명한 질문, “당신이 당신의 신을 사랑할 때,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변형이지만, ‘당신이 시를 사랑할 때,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바꾸어 읽어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 질문의 구조는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본질을 모르고 가상에 자주 홀리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생성중인 관계 속에서 실행되고 있는 주의 깊은 모험이라는 사실을 거듭 기억하기 위해서다. 사랑은 모든 구체적인 사례들이 독특하다는 의미에서 독특하며, 아무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다소간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하이데거를 생각하면서, 시를 사랑하는 자의, 시를 논하는 자의 분열에 관해 생각한다. 2014, 하이데거의 검은 공책이 출간되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이었던 그의 명성은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그와 나치의 관계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들하이데거가 유대인 스승 후설을 밀고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의 미출간 원고를 참조하여 존재와 시간을 썼다는 추문, 혹은 반대로, 총장 취임 연설이 보여주는 나치즘에 대한 동조가 실은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나치즘의 어떤발상에 동의할 만한 지점이 있다고 잠시 생각했을 뿐, 현실 정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시종 비판적 입장이었다는 필사적인 옹호에 이르기까지은 일거에 한 쪽 방향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하이데거가 라캉의 나치즘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철학자들 덕분에 감옥에 가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자신의 철학 저서들에서 인간 실존의 구체적 조건과 필멸성, 존재 방식이 모든 것은 서로 단단히 얽혀 중층 결정하고 있다에 관해 그토록 열렬하게 집필했으면서도 역사성을 강조할 뿐 현실적인 참조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일이 아주 드물었던 그는, 자신의 일기인 검은 공책들에서만큼은, 중단 없는 확신 속에서 나치즘을 지지했으며, 뼛속까지 반유대주의자였음을 직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랬을까? 이런 질문은 시적 언어의 독창적인 말하기가 말의 파괴의 경험이라는 발상을 광범위하게 유포한 시에 대한 견해의 대가(大家)’,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론가이자 철학자에 대한 모욕과 오명에 정말로 관계된 것일까? 만일 그가 나치의 열광적인 지지자였고 인종주의자였다면, 그런 그의, 시와 인간에 대한 촘촘하고 거대한 사유 뭉치를, 그의 어휘 꾸러미를 우리의 손에서 내려놓아야만 하는 것일까? 로티가 상상적으로 재서술하며 관대한 태도로 옹호했듯이, 하이데거의 삶에서 총장 취임과 연설과 나치와의 접점을 모두 삭제하더라도, 그는 그가 쓴 글들을 여전히 동일하게 썼을 것이라는 추정은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그 모든 되어간 상황은 그저 약간의 불행한 우연이었나? 아니면, 그는 거대한 위선자에 불과한 것일까? 아무래도 그가 제시한 심화적 극복은 그 자신에게서 실행되지는 못했거나 지나치게 수행한 나머지 합리화에 복무한 것처럼 보인다. 하이데거에게서 책임 있는 말을 듣지 못한 첼란은 1970, 수용소증후군으로 세느강에 투신한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학적 분리주의는 자기모순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주지만, 광범위한 자기분열을 방치함으로써 커다랗고 정교한 멍청이를 만들어낸다.

현대의 예술가는 점점 자기 지시적이고 비평적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낭만주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는 기술을 연마하고, 사라진 천재의 이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인이 되려 한다. 하지만 때때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천재가 아닐 가능성에 사로잡혀 깊은 밤,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셴바흐와 폴란드 소년이, 험버트와 롤리타가, 하이데거와 첼란이, 그리고 이 모든 관계들을 적든 많든 해석해내는 독자와 아무것도 모르는 자연인이 한 몸에 산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있을 거야! 아니야, 왜 그래야 한다지? 그냥 그때그때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훨씬 민주적이지 않나?

이 다글거리는 동거야말로 포스트모더니티의 다른 말이 아닐까? 반성과 황홀과 이에 대한 메타비평이 한 몸에 거주하는 시대.

시를 쓰는 시간과 시를 논하는 시간은 아주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만취 상태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는 것처럼, 서로 낯설다. 다만, 앞의 사례들과 다르게 그들은 일방적인 짝사랑의 관계에 놓여 있지만은 않다. 거울 속의 얼굴은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고, 비웃는 듯한 웃음을 띠고 있다. 너는 나를 모른다. 너는 나를 모른다. 너는 나를 모르면서 나를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낭시는 나르시스의 신화가 오해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나르시스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자기인지 몰랐을 것이라고, 그는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에 홀린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아름다움에 홀렸을 것이라고 어린이들을 위한 강연에서 이야기했지만,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너무 많은 낯선 사물을 발견하는 사람들에 관해서는,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이제 내 안의 타자가 아니라 내 안의 우리-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또 누구란 말인가?)

-비평가-시인이 지겨워졌다. 그는 무슨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거나 최소한 쓸모없는 인간이 될 것 같다. 그가 한편으로는 모험적이고 예측 불가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여유를 부린다는 점에 끌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무슨 범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가슴을 두근거리며 스릴에 빠지고 자기도 확신할 수 없는 어떤 말을 마구 썼다 지웠다 하다가는 그저 게으르게 하루 종일 빈둥대는 꼴을 보고 있으면 질려버리고 만다. 그는 도대체 적정선이 없다.

-시인-비평가의 비겁하고 안전하며 따분하고 기생적인 생존방식이 경멸스러워졌다. 온갖 알은체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아는지 의심스럽다. 어떤 때는 사랑한다고 열렬히 입맞춤을 퍼붓다가 또 다른 때는 도덕적인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형량을 선고하려 한다. 그는 내가 쓴 시를 자기 것처럼 취급하며 멋대로 사랑했다가 함부로 찢으려 한다. 그는 고집쟁이에 완고하고 위선적이며 고압적이고 곰팡내가 난다.

그리고 이 꼴을 지켜보고 있는 -독자는 둘 다 취소해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 ‘-독자는 바로 이들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용서해버리기로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시와 철학을 한 몸에 지니려 했던 분열적인 다른 사람들을 또한 떠올리게 된다. 신랄하게 자신과 현실을 비판하는 시와 산문을 썼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우산으로 때린 사람과 시와 산문으로 미학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군부 독재 정권으로부터 호명을 받자 단 사흘을 망설이다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 또는 정치적인 시를 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우주의 운행을 논하다 입이 삐뚤어진 사람. 첫 번째 사람의 과오가 그래도 가장 경미하다고 하지만, 역시 치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세 사람의 각기 다른 모양으로 멋진 시와 시론들을 다 떠나서, 알 만한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그 많은 멋진 사유들을 펼쳐놓고서, 하이데거는 왜 그랬을까?

무언가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음험한 사정이. 그리고 무수한 -독자들은 -시인-비평가의 그런 협잡들에 관해 사실은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남들은 모를 거라고 위로하면서. 알아도 모른 체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합리화하면서.

또 다시 본론은 쓰지 못했다. ‘-독자는 실망하고, ‘-시인은 눈을 가리고, ‘-비평가는 이 기획을 원망한다. 이건 협잡이야. 내 오른손으로 하여금 왼손을 쓰다듬도록 하는 협잡이다. 다만, ‘내 안의 그들-우리모두는, 첼란이 고통 속에서 강물에 뛰어들 때조차, 거대하고 비겁한 멍청이를 포함한 이 세계, 자신에게 환호와 모욕과 위협을 가했던 이 세계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계간 <파란> 2016년 여름.